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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04월01일 19시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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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췄던 만나와 흰 돌(묵강 5)
 

하나님을 대적한 인류최초의 이단은 시날(Shinar) 땅에서 시작된 니므롯의 태양신 숭배 바벨론종교다. 시날에서 나라를 일으켜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한 ‘잔혹한 전쟁광’(창 10: 9의 ‘특이한 사냥꾼’은 문자적으로 “짐승을 난폭하게 잡는 사냥꾼”으로 “잔혹한 전쟁광”을 의미한다) 니므롯은 막강한 군사력으로 함무라비 왕 때에 바벨론 제국의 수도인 메가 도시 바벨과 바벨론 동남쪽의 대도시 에렉(Erech), 사르곤이 창건한 아카드 왕조(BC. 2300-2100)의 수도 악갓(Accad)과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동쪽의 큰 성 갈레(Calneh)를 세우고 세력을 뻗혀 앗수르의 고성 니느웨와 난공불락의 거대한 성 레센(Resen)을 세워 고대 바벨론제국 최고 군주가 된다.

바벨론의 절대군주 니므롯의 막강한 권세와 명성을 등에 업은 세미라미스는 남편을 태양신으로 추앙하고 그를 ‘살아있는 신’으로 섬기는 바벨론종교를 만들고 여제(女帝; 여황)와 신녀로 등극한다. 전설에 의하면 니므롯과 세미라미스가 정치와 종교를 통해 막강한 권세로 천하를 통치하던 어느 날, 그의 첫째 삼촌 셈(Shem)이 자객을 거느리고 쳐들어와 니므롯을 살해한다. 그러자 졸지에 남편을 잃은 세미라미스는 막강한 권력과 돈을 이용해 조직을 정비하고 바벨론종교를 더 든든하게 세운다. 그리고 유복자로 태어난 이시스를 ‘니므롯이 환생했다’고 공포하므로 이시스를 태양신으로 섬기게 하고 심지어는 자기 아들과 결혼까지 한다. 이렇게 바벨론종교는 천륜과 인륜을 배반한 음녀종교가 되고 역사와 시대를 따라 세계각처로 퍼져서 세계종교가 됐는데 놀라운 사실은 역사종말인 21세기에 바벨론종교, 음녀종교는 옛 바벨론종교를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도입한 로마가톨릭이 된다는 것이다.

저 옛날 시날 땅의 니므롯과 세미라미스가 하나님을 대적한 태양신숭배 바벨론종교와 바벨탑으로 멸망했듯(창 10: 25, 11: 16) 역사종말인 불원장래에 세상에 나타날 타락한 종교바벨론과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인 정치와 경제바벨론(계 18: 1-2)으로 지구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파멸당할 것이다.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든지, 온 몸에 뼈마디가 쑤시고 아프면 천기를 분별하여 날이 궂을 것을 알듯(마 16: 3) 이시대의 표적들을 분별하며 사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길 축원한다.

                   감췄던 만나와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

   1. 사탄의 위가 있는 곳, 버가모

버가모는 서머나 북쪽 60마일 떨어진 내륙 도시로 한때 소아시아의 수도였다가 에베소로 수도가 옮겨진 후 무시아 주의 수도가 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도시다. 버가모 성중엔 ‘버가모’, 또는 ‘성산’이라는 산에 사면을 둘러 견고하게 석축한 성이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성을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라 불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 성에 금과 은을 비축해 두면 아무도 도적해가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어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몰래 그곳에 엄청난 금과 은을 숨겨두었는데 그것을 알고 비밀히 모든 금과 은을 도적질해 그 막대한 재산으로 왕국을 세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 왕국이 바로 앗달루스 왕국이다.

버가모는 주전 5세기에도 이미 잘 알려진 도시였지만 앗달루스 왕국의 유메네스 2세(Eumenes II, BC 197-159) 때는 버가모 성이 세계최강의 성과 최고의 호화로운 성으로 전성기를 이뤘는데 특히 책을 만드는 양피지 생산지답게 당시 세계최고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맞먹을 장서 20만권의 도서관이 있을 정도의 문화도시였으나 주전 130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된다. 그럼에도 버가모는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되는 주후 1세기 말까지도 아시아의 중심도시로 위용을 자랑하는 도시였다. 그래서 버가모는 거의 600년간 아시아 최고 도시로 명성을 날렸다.

종교적으로는 치료의 신이라 부르던 에스클레피우스(Asclepius)란 뱀의 신전과 술 신인 제우스(Zeus) 신전, 승리자 아테네 신전, 지도자 디오니소스(Dionysos) 신전이 버가모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버가모의 수호신’으로 섬겼다. 그리고 네 개 수호신 신전 외에도 주전 29년에 황제 아구스도에게 바친 신전과 로마황제들을 위해 계속 더 큰 신전들을 건립하므로 황제숭배 중심지가 됐고 잡다한 미신들의 본거지가 되므로 버가모는 예수 믿기가 정말로 힘든 ‘사탄의 위가 있는 마귀소굴’로 불릴 정도의 도시였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그곳에도 전파됐고 말씀의 뿌리가 내려 교회가 생겼으니 그것이 바로 버가모 교회이다.

당시 버가모엔 네 개의 세계적인 관광거리가 있었는데, 첫째는 아름다운 궁전과 으리으리한 신전들이고, 둘째는 어마어마한 저택들이며, 셋째는 20만권이 넘는 장서를 소장한 세계최대의 도서관, 넷째는 유명한 의과대학이다. 특히 고대희랍의 술 신 제우스에게 제사하던 제단은 아직까지 인간에게 알려진 제단 중 가장 큰 제단으로 넓이 100피트, 높이 40피트나 되는 거대한 제단으로 고대 7대불가사의 중 하나다. 그래서 버가모의 관리들은 우월감으로 하나님을 안 믿었고, 지식층은 교만해서 복음을 거절했으며, 무식층은 각종 우상숭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먹고 살기 바빠서 교회를 멀리했고, 그 중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교회에 침투한 잘못된 이단과 혼합교리 때문에 그리고 극심한 박해 때문에 믿음이 성장하지 못했다. 이렇게 버가모는 총체적으로 병든 도시였고 우상과 각종 죄와 불신앙으로 가득 찬 도시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 의사가 칼을 들듯 버가모교회를 수술하기 위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자신을 보여주셨다.
12절과 13절을 본다.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I know where you dwell, where Satan's seat is.

예수님은 버가모교회가 있는 곳, 버가모 교인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사탄의 위’ (Satan's throne; 사탄의 자리, 사탄의 보좌)가 있는 곳, 호 드로노스 투 사타나(“사탄의 거주지, 사탄의 본거지”)라고 했다. 버가모가 영적으로 “마귀의 소굴, 사탄의 총본산”이라는 말이다. 우상숭배, 황제숭배, 향락주의가 난무했기에 버가모를 사탄의 총본산으로 부른 것이다. 캄보디아엔 인도의 뱀 신인 힌두이즘 영향을 받아 지은 앙코르 와트와 정부청사 벽담들과 관광지 다리 난간들에 사람 몸통보다 굵고 70피트, 100피트 길이의 거대한 뱀을 유명한 호국장군들이 바쳐 들고 서있는 동상조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심지어 집의 지붕 끝에도 조각한 뱀을 달아 놓을 정도로 뱀 신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버가모에도 제우스 신전에서 술 신에게 제사 드리는 사람과 가지각색의 뱀 제단이 있는 에스클레피우스 신전에는 뱀들에게 제사 드리는 사람이 줄을 이었고 심지어 살아있는 뱀에게 제사 드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버가모는 바벨론종교의 본거지요 온상지였기에 ‘사탄의 총본산’이다.

구 바벨론제국의 절대군주 니므롯을 태양신으로 섬기게 했던 요녀 세미라미스는 니므롯이 자객에게 죽임 당하자 유복자 이시스를 ‘환생한 니므롯’으로 선전해 믿게 하고 자기 아들과 결혼하여 자신을 ‘하늘 황후’로, 아들남편을 ‘태양신’으로 선포한다. 그리고 이시스를 품에 안고 있는 그림을 그려 사람들로 신봉케 했는데 이것이 바벨론종교의 시작이다. 오늘 이북의 가짜 빨치산 영웅이 광신자들에게 60년 이상 민족의 태양신으로 숭배를 받고 3대 세습으로 20대의 김정은이 지도자로 추앙되듯, 시날 땅의 바벨론군주 니므롯이 태양신 되는 것과 세미라미스가 성모가 되는 것과 이시스가 환생한 니므롯과 태양신이 되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대접받는 거대종교 창시자가가 된 세미라미스는 바벨론종교의 조직을 세우고 발전시켰는데 그 종교조직은 놀랍게도 오늘날 가톨릭의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신부의 조직과 같다. 그것은 로마가톨릭이 바벨론종교를 그대로 받아드렸다는 증거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가 어린아이 예수를 안고 있는 가톨릭의 성화그림은 세미라미스가 이시스를 안고 있는 바벨론종교 그림이다. 이것이 지상최초, 지상최대종교인 태양신숭배의 바벨론종교요, 그리고 이것이 영적으로 역사종말에 지구촌을 혼합종교로 타락시킬 마귀의 총본영, 사탄의 총본산인 바벨론종교 가톨릭의 실체이다.

바벨론종교는 노아홍수 후 100년째인 노아의 6대손 벨렉이 출생할 때(창 11: 10- 16) 하나님의 진노로 하나였던 땅 덩어리가 바벨탑 붕괴와 천지개벽으로 오대양 육대주와 수백만 개 섬으로 분리되고 인류가 전 세계로 분산되면서 세계각처로 퍼져나갔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강성하고 깊게 뿌리를 박았던 바벨론종교의 본체는 바벨론에 남아 있었는데 페르시아 왕이 바벨론을 함락하면서 바벨론에서 쫓겨났다가 앗달루스 1세가 버가모에 정착하여 그의 왕국을 세울 때 바벨론종교는 다시 전성기를 맞는다. 그리고 앗달루스 3세가 주전 133년에 사망하고 3년 후 버가모 성이 로마 식민지가 되면서 자동적으로 바벨론종교는 로마로 옮겨간다.

로마에 정착한 바벨론종교는 주전 63년부터 주후 359년까지 약 400년 동안 로마황제들이 비호하고 육성하므로 크게 발전한다. 당시 많은 백성들이 바벨론종교를 신봉하자 로마황제가 바벨론종교의 제사장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어 백성들의 존경을 얻고 권위를 가지고 통치하기 위해서 로마황제들은 바벨론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그러자 소아시아에 사는 많은 로마인들이 황제를 따라 바벨론종교를 숭배하고 분향한다. 그러다가 주후 376년 그리시안 황제가 예수를 믿은 후 자기는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바벨론종교 제사장 직분을 맡을 수 없다고 포기하고 거부한다. 그런데 2년 후 다마스커스 감독이 로마가톨릭 교황과 바벨론종교 제사장직분을 맡겠다고 자청하므로 두 직분을 맡았는데 다마스커스는 로마교황과 태양신 제사장직분을 맡은 후 지금까지의 기독교예배의식을 바벨론종교 예배의식과 병합해 버린다. 그래서 378년은 기독교(가톨릭)와 바벨론종교가 결합된 치욕의 해라고 부른다.

그때부터 교회 안에 ‘성모 마리아가 어린 아이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그림과 흉상들’이 생기게 됐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의 이런 나약한 모습은 없다. 그것은 바벨론종교 창시자인 악녀 세미라미스가 자기 아들이요 남편인 이시스를 안고 있는 모습일 뿐이다. 그러므로 가톨릭의 마리아 상 그림이나 동상들은 바벨론에서 도입해 온 비성서적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버가모 성을 ‘사탄의 위가 있는 곳, 마귀의 소굴, 사탄의 총본산과 본거지’라고 말씀했고 그런 이단종파를 받아드린 버가모교회를 향해 단호한 심판의지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분으로 자신을 보이셨던 것이다.

오늘도 예수님은 “자기들을 피로 사신 예수를 부인하고 호색과 탐심으로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선택하여 멸망케 할 이단을 좇는 자”(벧후 2: 1-3)들과 “한번 중생한 기독교인으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됐었으며,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까지 경험했다가 이단에 빠져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을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배교자와 타락한 자”(히 6: 4-6, 10: 26-31)의 이단들을 “사탄의 위가 있는 곳, 마귀와 사탄의 총본산”이라 하신다. 성경은 그런 자들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빠져 들어갈 자들”(히 10: 31)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자기들을 소멸할 불만 기다려야 할 자”(히 10: 26)들이라고 했다. 그렇다. 신앙배교의 이단은 성령 훼방 죄와 함께 영원히 죄 용서함이 없는 죄다. 사람을 죽인 살인과 임신중절, 도적질과 간음, 마약과 알코올, 사기와 횡령과 동성연애와 천인공노할 흉악한 전범(戰犯)까지 인간이 짖는 어떤 흉악하고 더러운 죄도 회개하면 용서를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이단에 빠지는 죄는 회개치 않을 때, 용서가 없다. 그만큼 이단의 죄는 두렵고 무서운 죄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 성도들은 세계적으로 공인된 이단인 가톨릭과 여호와 증인, 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교회인 몰몬교, 크리스챤 사이언스, 안식교, 뉴에이지 운동의 뿌리인 바벨론종교와 힌두교 요가, 불교와 영지주의와 진화론에서 탈출해 나와야 하고 문선명의 통일교회, 박태선의 전도관(한국 예수교 부흥협회), 이만희의 신천지 장막성전, 권신찬의 구원파, 노영구의 동방교(기독교 대한 개혁 장로회), 박한경의 대순진리회, 안상홍의 증인회, 정명석의 애천교회, 이교부의 삭발교 아가동산, 천옥찬의 천도관, 이성수의 에덴성회 등 100개가 넘는 한국산 이단들을 멀리해야 한다. 지금도 예수님은 이단들을 향해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분으로 맞서 계시고 주의 날엔 그 검으로 이단들을 파멸하실 것이다. 저 에덴동산에서 ‘빛나는 자’로  하와에게 접근해 선악과를 따 먹도록 유혹한 뱀처럼 이 말세에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 당신에게 접근해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고후 11: 1-4)을 전하는 이단들의 유혹을 모두 이기고 승리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2. 충성된 증인 안디바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13절)

예수님이 이방신과 황제숭배 중심지 버가모에서 안디바가 순교를 당할 때, 교회에 많은 위협과 핍박이 있었음에도 주의 사자인 버가모교회 담임목사가 주의 이름을 굳게 잡고 주를 믿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포기치 않은 것을 칭찬한 말씀이다. '굳게 잡아서‘(You hold fast, 크라테이스)는 “계속해서 굳게 잡았다”는 뜻이니 여러 우상과 황제숭배 강요 중에도 버가모교회 목사가 예수 따르는 믿음을 굳게 잡고 버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주의 사자인 버가모교회 담임목사의 믿음도 칭찬하셨고 그 교회성도인 안디바의 믿음도 칭찬하셨는데 특히 안디바를 ‘나의 충성된 증인’(My faithful martyr; 호 말투스 무 호 피스토스 무: “자기 목숨을 바치기까지 나에게 충성을 다한 사람”)이라고 최고의 찬사를 하셨다. 예수님께 일반적인 칭찬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고 설렐 일인데 그분이 “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란 최상최고의 칭찬을 하셨으니 얼마나 엄청난 칭찬인가? 그렇다면 그런 칭찬을 들은 안디바는 누구인가?

안디바 행전(The Acts of Antipas; 안디바의 헬라어 안티파스는 “전부를 대적하는 자”란 뜻)에 의하면 안디바는 버가모교회의 장로요 감독이면서(The Bishop of Pergamos) 유명한 헬라의 지식층 학자로써 당시 버가모에 있던 세계제일의 도서관 관장이었고 신앙이 돈독한 사람이었는데 역사가 요세푸스와 터툴리안의 기록과 주후 3세기 버가모 비문 기록에 따르면 안디바의 순교사화는 이렇다.

당시 버가모 시민들은 로마황제 카이저를 신으로 숭배했는데 어느 날, 로마관리가 안디바를 잡아다가 황제신상 앞에 세워놓고 “안디바야, 로마의 황제, 모든 왕의 왕,카이저 신상에게 절을 하라”고 했다. 그러자 안디바는 “나에게 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다. 예수님 외엔 누구에게도 절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화가 난 로마관리가 “안디바야, 온 세상이 너를 대적하고 있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소리쳤다. 그때 안디바는 “그렇다면 나 안디바는 온 세상을 대항하여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시인한다”고 담대하게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자 격분한 로마관리는 철로 만든 소 형상의 우상 속에 안디바를 잡아넣은 후 철제우상을 뜨거운 불에 달구어서 안디바를 태워 죽였다.

“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Antipas, My faithful martyr; Antipas, My witness, My faithful one) 이것은 버가모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 하던 많은 믿음의 동료들과 교회성도들이 죽음이 두려워 살기 위해 신앙을 배반하고 황제숭배의 우상을 따르고 교회와 신앙을 떠날 때, 온 세상을 대적한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불덩어리 철제우상 안에서 용암이 분출하듯 구규(九竅: 구혈(九穴); 사람 몸에 있는 아홉 구멍, 눈 코 입 귀 오줌구멍 똥구멍)에서 피가 솟구치고, 바람 가득 찬 고무풍선 터지듯 배가 터지며, 살가죽과 살이 타 녹아 죽어가면서 끝까지 예수 이름 붙잡고 자기 신앙을 지켰을 때 예수님이 안디바에게 붙여준 명예의 훈장이다.

“지상최고의 권세권력 로마가 나를 대항한다면, 나도 로마를 대항한다”며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을 지킨 안디바를 “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라고 칭찬하신 주님의 축복과 “저 웜스의 기왓장들이 마귀와 귀신들이 되어 나에게 달려든다 하어도 나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고 담대하게 신앙을 고백했던 마르틴 루터를 붙잡아 종교개혁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오늘 어떤 악조건의 환경과 핍박 속에서도 예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주를 믿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주기도문 성도들에게 있기를 소원한다. 그리하여 오늘과 주님의 날에 주님께서 “나의 충성된 증인 김 엘리야목사, 호 말투스 무 호 피스토스 무(My faithful martyr) 이 장로, 정 권사, 최 집사”로 칭찬하실 축복의 사람 되길 축원한다.

   3.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14-15절)

버가모교회는 담임목사를 중심해 전체적으로는 신실했지만 부분적으로 이단교리를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 주의 이름을 굳게 붙잡은 주의 종과 자기 목숨을 바쳐 믿음을 지킨 충성된 증인 안디바 같은 믿음의 영웅이 있었는가 하면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이단자들도 있었다는 말이다. 오늘날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신천지 이단의 공격으로 극심한 시련과 고통을 겪고 있듯이 버가모교회도 외부적으로 교회 전체는 핍박과 정면으로 맞서서 믿음을 지키며 순교의 대열에 나서는 동안에 내부적으로 불순세력이 이단과 야합하여 방종과 타락을 하므로 분열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것을 경계하고 책망하신 것이다.

버가모교회에 침투한 이단은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 교훈이었다. 히브리어로 발람은 “탐닉하는 자,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란 뜻이고, 헬라어로 니골라는 “백성의 정복자”란 뜻이니 버가모교회의 발람과 니골라당 이단은 독버섯과 암 덩어리처럼 성도들의 신앙을 좀먹으면서 정복하며 파괴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단은 어떤 이단이든 성도들의 믿음을 파괴하고 정복하는 치명적인 독약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단의 마수에 걸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당시 버가모교회에 침투한 첫째 이단은 ⑴ 발람의 교훈이다. 신통력이 뛰어나고 축사능력이 탁월해 명성을 날리던 당대 최고의 술사 발람은 돈과 명예로 유혹하는 모압 왕 발락의 초대를 받고 400마일(640km: 1600리)을 달려와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시도했으나 하나님께서 그 입을 주장해 세 번씩이나 저주신탁을 실패한다(민 22-24장). 한 마디 저주만 해도 자기와 후손의 장래가 보장될 돈과 명예를 얻을 일생최대 기회를 놓친 발람은 마지막으로 발락에게 이스라엘 청년들을 우상숭배와 혼음으로 미혹하는 간계를 알려주고 범죄케 하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재앙 염병으로 2만 4천명이 죽게 한다(민 25장)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을 타락케 하고 저주받게 하므로 발락에게 돈과 명예와 권세를 얻고 미디안에서 왕 같은 봉신 대접을 받았던 발람은 얼마 후 모세의 미디안 정복전쟁에서 비참한 죽임을 당하고 허무하게 일생을 마친다(민 31: 1-8, 수 13; 22) 성경은 발람을 ‘불의의 삯을 탐낸 탐욕의 선지자’, ‘거짓 선지자’, ‘정신 나간 미친 선지자’, ‘음행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던 선지자’(빋후 2; 1-22)라 부르고 그날 이후 발람은 거짓 선지자의 대명사가 됐다.

⑵ 두 번째 이단은 니골라 당의 교훈이다. 초대 예루살렘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던 니골라가 타락해 만든 이단으로 ① 율법의 때는 지났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 ② 육신은 악이요 영만이 선하므로 육신으로 무슨 죄를 짓든지 구원 받을 수 있다 ③ 그리스도인들은 은혜로 보호 받기 때문에 어느 곳에 가서 무슨 짓을 하든지 해를 받지 않는다고 가르친 이단이다.

‘육신은 아무리 방탕하고 타락해도 죄 짓는 것이 아니기에 구원 받아 천국에 간다. 황제숭배는 우상숭배가 아니고 국민의 의무이며 황제신상에게 절하고 뱀 신을 숭배해도 죄 짓는 것이 아니니 염려할 것이 없다...돌아가신 조상에게 제사 지내고 죽은 성자들과 교제하며 그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맘대로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바람을 피워도 구원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구원이 보장되고 천국이 보장된다면 이런 가르침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맘껏 죄 지으며 넓은 길을 가도 천국이 약속됐다는 교훈을 거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버가모교회는 고리타분하게 정통신앙을 사수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담임목사와 미련스럽고 위험하게 목숨 바쳐 예수이름 굳게 잡고 믿음을 지킨 안디바 보다는 현대적인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 교훈이 더 인기가 있었다. 이렇게 에베소교회에서는 배척 받아 쫓겨났던 니골라당 이단은 버가모교회에 침투해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오늘날 이단들이 불신가정보다는 교인가정을 끊임없이 찾아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나 100년 200년 전에 일이 아니고 이미 2000년 전 아니 에덴동산에서부터 있었던 마귀의 전략이다. 예수님이 마 24장 종말론 강해에서 “사람의 미혹을 받지 말라”는 이단경고를 휴거 직전의 첫 번째 말세징조(마 24: 1-14)로 말씀하셨고, 성도들이 휴거한 후 지상에 있을 칠년 대환난의 징조(마 24: 15-28)에서도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의 많이 일어날 것”(마 24: 23-26)을 예고하며 이단을 경계하셨으니, 첫 번째 세상종말인 예수님의 공중 재림과 성도의 휴거가 가까워진 오늘날 이단들의 단말마적인 최후발악의 미혹을 물리쳐 이기는 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버가모교회가 핍박에는 승리했지만 발람과 니골라당 이단에 미혹돼 음행과 우상숭배를 용납하므로 예수님의 준엄한 책망을 듣고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심판자 예수님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맞았으니 오늘 우리는 어찌하든 모든 핍박과 이단의 유혹을 이기는 성도들이 돼야 한다. 말씀과 기도로 무장하므로 이단들의 지뢰밭을 성공적으로 통과하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4. 감추었던 만나와 새 이름의 흰 돌

교회사적으로 에베소교회가 오순절부터 사도시대 종말까지인 주후 100년까지의 초대교회시대의 상징이라면, 서머나교회는 100년 속 사도시대에서 312년 콘스탄틴 대제까지의 핍박받는 교회의 상징이고, 버가모교회는 312년 콘스탄틴대제 기독교 공인부터 590년 그레고리 법황까지의 방종과 타협으로 타락한 국교시대교회의 상징이다. 버가모(Pergamos)란 헬라어 펠가모는 “결혼”이란 뜻이니 버가모교회는 예언적으로 “세상과 결혼한 국교시대”를 가리킨다. 교회가 정치와 결혼한 시대, 정통교회가 이단종파와 결혼한 시대이다. 특히 이 시대에 기독교가 바벨론종교와 결혼한 사건은 교회사에 치욕적인 오점이다.

정적 막센티우스와의 일전을 앞두고 태양신에게 기도하다가 ‘이 표적으로 정복하라’고 새겨진 불타오르는 십자가 환상을 본 콘스탄틴이 전쟁을 이긴 후 기독교를 포용하면 모든 적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란 신념으로 기독교 국교인정칙령을 내렸지만 원래 그는 기독교에 대한 올바른 관념을 가진 중생한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정략적으로 교회에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해주고 교회 사업을 위해 국고에서 자금을 충당해주며 심지어는 우상의 신전까지 기독교인들에게 넘겨주자 이제까지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했던 기독교인들이 대접을 받게 되고 지하 땅굴 카타콤에 숨어살던 성도들이 밖으로 나오게 됐으며 깊은 산속과 동굴 속에 숨어살던 성도들, 외국으로 도피했던 성도들이 돌아와 좋은 대접을 받게 됐다. 그러자 교회는 황제를 기쁘게 하려고 온갖 아양을 다 떠는 추태를 보였다. 교회지도자들은 황제의 관심을 사고자 이교도 관습을 교회규례로 정하였고 심지어 주후 325년 니케아종교회의 때는 불신자 콘스탄틴에게 사회를 맡기기까지 했다. 교회가 정치에 아부했던 창피스런 단면이다.

이후 300여 년간 기독교는 완전히 세상과 타협하는 종교로 전락한다. 바벨론 종교에서 도입한 묵주가 들어왔고, 전혀 성경적 근거가 없는 교황, 추기경의 교권주의도 들어왔으며 바벨론 종교에서 제단을 지키는 성녀제도인 사제나 수녀의 독신주의가 도입됐다. 국교시대 300년 간 기독교에 도입된 성경에 위반된 거짓 교리와 이단교리는 ① 주후 300년,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와 성호 긋는 풍습 ② 375년, 죽은 성도와 천사를 숭배하는 풍습 ③ 394년, 최초로 미사를 도입함 ④ 431년, 성모 마리아를 숭배함 ⑤ 500년, 사제들이 세인들과 구별된 옷을 입게 됨 ⑥ 526년, 종부성사(Extrema Unctio; 임종시 몸에 기름을 바르고 최후로 사죄의 은총을 받는 예식)가 시작됨 ⑦ 593년, 연옥에 대한 개념이 도입됨 ⑧ 600년, 라틴어로 미사를 드리고 마리아에게 기도드리기 시작함 등인데 모두가 성경진리에 어긋난 이방의 종교교리들이었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열띤 공방전에 기독교교리를 전혀 모르는 콘스탄틴을 사회자로 추대했다는 것은 기독교의 큰 수치였다. 이때 이론이 밝고 똑똑했던 아리우스가 ‘예수는 창조된 존재요 하나님이 아니라’며 청산유수의 달변으로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모든 반대의견을 제압한 후 의기양양하게 앉아 있었는데 그때 그의 가랑이 밑으로 한 사람이 기어들어 왔다. 그는 아프리카 사막으로부터 온 사람으로 호랑이 가죽으로 온 몸을 덮어쓰고 있었다. 사회자 콘스탄틴 앞까지 기어간 그는 입고 있던 호랑이 가죽을 벗어서 자기 등에 있는 끔찍한 흉터를 보여주었는데 그 흉터는 로마 원형극장에서 사나운 짐승들에게 찢겼다가 살아남은 흉터였다. 그는 청중에게 우렁찬 소리로 “내 등에 있는 흉터는 주 예수님이 나에게 주신 새로운 표적이다. 나는 더 이상 아리우스의 불경스런 언동을 참을 수가 없다”고 외치면서 일장연설로 장내를 숙연케 했다. 그러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은 그의 말이 성령의 말씀임을 깨닫고 통곡하며 회개했는데 회의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15년 전만해도 디오클레티안 황제의 박해를 피해 지하 땅굴 카타콤, 산속 밀림, 동굴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니케야 종교회의에서 이단자 아리우스는 극적으로 졌고 “예수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심”이 증명된다.

이렇게 콘스탄틴은 기독교를 정치와 결혼시킨 정치가였지 중생한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가 당시 로마 주교였던 요세푸스에게 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성경사본 50부를 만들도록 하고 그 사본 중에 몇 개가 지금까지 세계적인 사본으로 남아 있는 것은 칭송받을 일이지만 그가 기독교를 정치와 결혼시킴으로 기독교를 타락의 길로 인도한 것은 기독교의 치욕이다. 기독교가 고난과 박해 중에서 자유를 얻자마자 이단의 교리와 타협하고 권력과 야합하며 정치와 결혼하므로 방탕과 타락의 길을 걷게 된 역사를 통해 우리도 환난과 핍박에서만 이길 것이 아니라 평안과 안일과 축복 중에서 유혹들을 이겨야 된다는 것을 배운다.

그러므로 버가모교회 시대는 가톨릭교회가 조직화되면서 바벨론종교와 혼합하여 영적인 음행을 행하여 발람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좇아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향락을 좇아 타락해 가는 비극적인 교회시대를 의미하고, 버가모교회는 교회가 안정권에 들어가자 게을러지고 조직에만 의존하여 세속적으로 흘러가는 교회들을 의미하며, 버가모 교인은 환난과 박해와 고통은 잘 이겼으나 시험과 유혹과 게으름에는 쉽게 저 버리는 교인들을 의미한다. 지금 우리가 받아 누리는 축복, 은혜, 교회부흥, 기이한 도움은 피 흘리고 땀 흘려 얻은 귀중한 축복들임을 명심하고 그 축복을 쉽게 빼앗기지 말기를 축원한다. 마지막으로 버가모교회를 향하신 예수님의 권면과 약속을 알아보자.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그렇다. 버가모교회, 버가모 교인 같은 이단을 묵인하고 받아드린 교인, 세상과 타협하고 결혼한 성도, 발락을 꼬여 이스라엘을 범죄케 한 발람처럼 믿음 약한 교인을 유혹해 넘어뜨리는 교인, 그리고 스스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회개할 것이다. 회개만이 살 길이다. 회개치 않으면 주께서 임하여 주님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실 것이다.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주와 맞서 싸워 살아날 사람은 지구상 아무도 없다. 파멸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살 길은 회개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단을 묵인하거나 이단에 빠졌던 사람이 이단을 버리고 나오든지 세상과 타협하여 세상과 결혼했던 사람이 회개하고 영적으로 이기는 성도가 되면 그러한 성도에게 ① 감추었던 만나를 주실 것이며 ② 흰 돌을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⑴ 감추었던 만나(The hidden manna)는 후손들을 위해 언약궤 안에 담아두었던 만나 항아리(출 16: 32-34, 히 9: 4)가 솔로몬 성전이 파괴될 때 예레미야나 천사에 의해 감춰졌다가 장차 메시야 왕국에서 공개된다는 유대전설을 반영한 것으로(마카비 하 2: 4-6, 바룩 29: 8) 첫사랑을 회복하는 에베소교회에게 약속했던 에덴동산에서 하늘나라로 옮긴 생명나무 열매처럼 천년왕국과 새 하늘 새 땅에서 생명의 양식이요 생명의 떡이신 예수(요 6: 32-33, 35, 48, 51)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약속이다. 그렇다. 세상과 타협해 세상과 결혼한 신앙생활을 청산하는 성도와 각종 이단에서 탈출해서 나오는 성도들에겐 이 세상에서도 영혼이 살 수 있는 신령한 만나인 예수님의 말씀을 주시고 천년왕국과 새 하늘 새 땅에서도 영원히 살 수 있는 축복을 주신다.

   ⑵ 흰 돌을 주신다. 흰 돌(A white stone, 텐 푸세폰)은 “둥글고 작은 흰 돌”이란 뜻으로 흰 돌은 ① 당시 재판소에서 배심원들이 무죄를 인정할 땐 흰 돌을 던졌고 유죄를 인정할 땐 검은 돌을 던졌으니 무죄판결을 의미하고, ② 당시 연회 초대권 표시로 흰 돌을 주어 흰 돌 가진 자만 연석에 참여했듯 흰 돌은 예수님의 천년왕국과 영생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초대권을 의미하고, ③ 당시 그리스 경기장에서 우승자에게 흰 돌에 이름을 새겨 주었듯이 흰 돌은 이긴 자로 인정하는 특권을 가리킨다. 그렇다. 예수님은 이단에 빠졌던 악한 사람, 이단의 앞잡이, 마귀의 행동대원, 사탄의 특공대였던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에겐 과거를 묻지 않고 무죄를 선언하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주시며, 이긴 자로 인정해 주신다. 그러나 회개치 않는 자는 멸망의 자식, 지옥의 자식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17절 하반 절에 “흰 돌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A new name written on the stone)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① 흰 돌에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이름을 기록해 주신다(계 3: 12, 14; 1)는 해석과 ② 천년왕국이나 부활성도로 천국에 들어갈 때 이단을 이긴 성도에게 새 이름을 주신다(사 62: 2, 65: 15)는 해석이 있는데 모두 타당성이 있다. 회개하고 이기는 사람에게만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이다.

오늘,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마다 그리고 발길 닫는 곳마다 우상과 죄와 유혹들이 범람하는 세상과 교회 안까지 각종 이단의 교리와 세속의 탁류가 범람해 위험수위를 이미 넘어있는 마귀와 사탄의 총본산인 버가모 같은 21세기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세속과 타협하고 세상과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로 자처하는 일이며 자기 파멸이고 달콤한 이단의 미혹에 빠지는 것은 영적인 자살행위라는 사실을 기억하여 예수이름을 굳게 잡았던 버가모교회의 목사와 자기 믿음을 생명까지 바치며 지켰던 ‘예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처럼 온 세상을 대적하여 이기는 자로 주 앞에 서는 성도들이 되자.

그리하여 영광의 그날, 주께서 저 공중으로 재림하시는 날과 이 땅에 심판주로 오셔서 천년왕국을 세우시는 날에 우리 모두 생명의 떡인 만나와 흰 돌을 받으며, 그리고 저 영원한 새 하늘 새 땅의 천국에서 감추었던 만나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이 기록되고 구원받은 자신의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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