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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01월05일 21시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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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죽도록 충성하라(묵강 4)


주후 155년, 오늘날도 번창하고 있는 터키 항구도시 이스마이어인 서머나에서 올림픽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원형으로 된 경기장 수백 층 돌계단 의자엔 수만 명 군중이 입추의 여지가 없도록 가득 채워 함성을 지르며 응원했는데 당시 경기출전 선수들은 10개월 동안 합숙하며 극기와 절제훈련을 거쳐서 선발된 사람들로 전차경기, 경마, 도보경기, 철환(鐵環) 던지기, 권투, 씨름, 창던지기, 달리기 경기들을 치렀다. 당시 올림픽 경기 승리자가 받는 면류관은 감람나무, 월계수, 소나무 잎을 한데 묶어 만든 보잘것없는 나무면류관이었는데 그럼에도 선수들은 명예 때문에 해가 갈수록 많아졌고 그것을 구경하려는 군중들도 점점 더 많아졌다.

그날 올림픽경기가 끝나갈 무렵, 로마 군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면서 경기장 가운데 집 채(더미)만한 나무장작 탑이 쌓아지고 죄수 한 사람이 끌려 나왔다. 수만 명 군중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로마관리는 죄수에게 “당신이 예수를 한번만 부인한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한다. 그러자 죄수는 “내가 지난 86년간 나의 주님을 섬기는 동안 내 주 예수님은 한 번도 나를 배반치 않으셨고 내게 악을 행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해주신 나의 왕을 부인하고 배반하며 모독할 수 있겠는가?”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당시 서머나에선 시민들에게 일 년에 한번씩 ’황제는 주시라‘는 특별맹세를 하도록 명령했는데 사도 요한의 후계자인 서머나교회 목사 폴리갑 감독은 그것을 거절했다가 잡혔고 평상시 폴리갑에게 감화를 받아왔던 관리가 사형을 집행 전 마지막으로 그를 살리려고 기회를 주었던 것인데 폴리갑이 그것을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자 성난 군중이 ’그를 산채로 태워죽이라‘고 소리친다. 놀란 관리들이 그를 말뚝에 잡아매려고 하자 폴리갑은 그렇게 묶을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스스로 쌓아놓은 장작더미 위로 올라가 몸을 단정히 한 다음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때 흥분한 군중은 ’빨리 그를 불태우라‘ 소리 지른다. 그렇게 초대교회의 교부 폴리갑은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찬송을 부르며 한줌의 재로 역사무대에서 사라져 갔고 주후 155년의 서머나 올림픽은 한 시대의 큰 별을 떨어뜨리며 막을 내렸다.

BC(주전) 300년에 헬머스 계곡을 등지고 건설된 서머나는 알렉산더 대왕이 설계하고 건설한 도시로 당시 에베소와 쌍벽을 이루는 대도시로 번창해, “소아시아의 빛나는 도시, 성좌의 첫째 별 중 하나, 이오니아의 면류관, 아시아의 훈장”이란 별명을 들은 소아시아의 중심지, 인도와 페르시아에서 로마로 가는 무역중심지였다. 서머나의 옛 도시는 주전 6세기에 패망했고 주전 300년에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재건됐다가 주후 178년 티베리우스 때 지진으로 완전폐허가 됐었으나 그 위치의 중요성으로 다시 재건된 도시이다. 알렉산더가 설계하고 건설했기에 서머나는 풍부하고 넉넉한 도시였고 로마에 대해서는 건국 때부터 충성을 다한 도시로 로마원정군들을 원조했고 주전 195년에는 로마 여신을 위한 신전을 건립했고 황제예배 중심지에, 태양신 제우스를 섬기는 제단까지 있을 정도로 로마에 호의적이어서 로마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던 도시였다.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과 함께 많은 유대인들이 서머나로 이주하면서 사도들의 신앙과 기독교신앙을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계획적인 음모로 로마관리들을 포섭하고 충동해서 폴리갑을 죽게 할 정도로 서머나는 아시아에서 기독교 핍박이 가장 극심했던 곳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머나 유대인들을 향해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9하)고 했다. 사단의 회(쉬나고게 투 사타나)에서 회(會, 쉬나고게)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의 집회, 선민들의 총회”(민 14; 27, 35)란 뜻이지만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과 하나님의 선민을 자랑하면서 기독교신앙을 박해했던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단의 모임이었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혈통과 전통에 의한 표면적 유대인과 교인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이면적 유대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이 성도이다. 당신이 교적부에 이름 올린 이름만의 기독교인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참으로 중생한 기독교인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Be faithful until death)

   1.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

3주전인 지난 3월 3일(토), 교회와 교육관에 도적이 들어왔었다. 가져갈 물건이 여러 개 있었음에도 없어진 물건이 하나도 없음을 감사했는데 교회와 교육관 대문에 Damage를 내고 두 건물에 있는 책상서랍과 옷장 안의 물건들을 다 뒤집어 놓아 쓰레기장처럼 만들어 놓은 채 그대로 돌아간 사고였다.

마침 그날 뉴저지의 딸 부부와 버지니아 비치의 아들 부부, 캘리포니아의 막내딸까지 세 아이들이 모두 우리 집을 방문했는데 교회에 도적이 들어왔었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첫째 딸은 “도적이 아빠가 없었을 때 교회 문을 부수고 왔길 다행이지 아빠가 있었을 때 들어왔다면 성한 몸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라며 아빠를 응원하고, 둘째 딸은 “아빠, 괜찮아?(기분 나쁘지 않느냐)”며 엄마 아빠를 위로하는데, 아들은 “아빠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만 새벽기도를 하니까 토요일까지 새벽기도를 하라고 도적을 통해 하나님이 경고해 주신 것 같다”고 권면해 준다. 같은 사건소식을 듣고 평소에 아빠를 보고 경험했던 아이들이 자기들의 느낀 감정과 신앙을 따라서 상황을 판단하고 나를 위로해주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아빠와 목사로서 그들에게 보여 졌던 내 모습과 그들이 목사아빠인 나를 경험했던 고백을 통해 내 자화상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주기도문교회와 김목사를 향한 예수님 마음은 어떤 마음이실까? 주님께서 오늘 주기도문교회와 김목사에게 나타나신다면 과연 어떤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실까?’를 생각해 보았다.

계시록 1: 13-18에서 아시아의 예순 세 개 교회대표인 일곱 교회와 지구촌 모든 교회에 임재(臨在)해 계신 예수님은 자신의 모습을 ① 왕과 제사장과 재판관으로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으신 분 ② 인류의 모든 무거운 짐을 져 주시고 당신을 찾는 모든 죄인들에게 안식을 주시는 제사장과 왕으로서 가슴에 금띠를 띠신 분 ③ 지혜와 성결과 존엄의 상징으로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신 분 ④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통찰하시고 투시하시며 이단자들을 향해 타오르는 의분을 가지신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분 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겐 은혜와 축복을 가져다주는 발이면서 배교자들은 심판하시는 주석과 같은 발을 가지신 분 ⑥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불가항력의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분 ⑦ 풍진세상과 더러운 세속에 물들지 않고 밤하늘의 별처럼 고고하게 시대와 역사를 밝히는 자기 종들을 그 오른손으로 붙잡고 계신 분 ⑧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분 ⑨ 해가 힘 있게 비추는 것과 같은 얼굴을 가지신 분 ⑩ 죽었다가 살아나시고 세세토록 살아계신 분 ⑪ 사망의 열쇠를 가지신 분 ⑫ 마지막으로 음부(陰府)의 열쇠까지 가지고 계신 분으로 보여주셨다.
 
그런데 처음 사랑을 버렸던 에베소교회에게는 촛대가 옮겨질 것을 염려하사 제사장이 등불을 간검하기 위해(출 27: 21) 촛대 사이를 왕래하는 것처럼 에베소교회를 감시하시고 순회하시면서 은혜를 공급하시는 “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계신 분”(계 2: 1)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고, 극심한 박해와 환난 중에서 신앙을 지키는 서머나교회에겐 “너희에게도 죽음과 고통이 다가올 것이다. 내가 처음이요 나중이니 이제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라. 내가 죽었다가 산 것처럼 너희도 나를 위해 죽으면 살아날 것이다”를 권면하기 위해서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셨으며,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 이단을 용납한 버가모교회에겐 이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이기에 가차 없이 잘라버리겠다는 예수님의 단호한 의지와 결의를 보여주시고자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분”으로, 자칭 선지자 이세벨을 용납하고 영적 간음에 빠진 두아디라교회에게는 그들의 죄를 찾아내 단호하게 심판하실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분”으로 나타나셨다. 그다음, 사치와 부도덕으로 영적사망 상태에 있는 사데교회에겐 성령의 역사를 통해 내적 생명이 필요한 교회인 것을 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로, 신분과 지위와 자산 등 외적능력이 변변치 못함에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예수 이름을 배반치 않았던 필라델피아교회에겐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나타나셨으며,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아 예수님이 입에서 토해낼 지경의 미지근한 신앙, 아멘과 진실이 없는 신앙, 신앙의 정체성도 없으면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며 스스로 속고 있는 라오디게아교회에게는 “아멘이신 주,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며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분”으로 나타나셨다.

그렇다. 똑같은 부모지만 첫째에서 일곱째까지의 아들딸 마음태도와 그들의 처지와 인격에 따라 부모가 자식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듯 한 분이신 구세주 예수님도 일곱 교회 주의 종들과 교인들의 신앙과 믿음생활, 영적상태에 따라 각각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지금 미국과 캐나다의 40만 교회, 5천개 북미한인교회, 워싱턴의 5백 개 한인교회, 한국의 6만 교회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모습을 보이시며 오늘 우리 교회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겐 어느 모습을 보이실까? 한국의 900만 교인, 중국의 1억 3천만 교인과 전 세계 20억 교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실까?

아시아 일곱 교회 중 칭찬만 들었던 서머나, 필라델피아 교회에게 보이신 모습일까, 책망만 들었던 사데,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보이신 모습일까, 아니면 칭찬과 책망을 함께 들었던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이신 모습일까? 일곱 교회 중 가장 작고 약한 교회였지만 박해와 핍박 중에서 신앙을 지켰던 서머나교회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인내로 말씀을 지키고 예수 이름을 배반치 않았던 필라델피아교회처럼 우리를 흡족해 하시고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환하고 밝은 모습을 뵐 수 있는 주기도문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2. 부요한 자, 서머나 교회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I know your works and tribulation and poverty, but you are rich; 9상)

기록에 의하면, 서머나 교회가 당한 환난과 박해는 폴리갑 교부의 순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은 신앙 때문에 원형극장으로 끌려가 굶주린 사자나 이리의 먹이로 죽임 당한 성도에서 채찍에 맞아 살이 찢어지고 눈알이 빠진 자, 불에 태워 죽임당한 자, 네 마리 말에 묶여 사지가 찢겨져 죽은 자, 몽둥이와 곤봉으로 맞아 팔다리가 부러지고 헤어진 옆구리로 창자가 흘러나온 교인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한 결 같이 그러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오히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를 바라보며 “오, 주여, 주님은 나를 위하여 손과 발에 못이 박히시고 옆구리에 창 찔림을 당하셨는데 나의 이 환난이야 주님이 당하신 고난에 비길 수 있나이까”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서머나 교인들의 재산은 몰수당했고 아이들은 배고파 울며 노인들은 의복이 없어 추위에 떨면서 바위틈에서 지내는 등 그들의 궁핍은 극심했다. 성도들의 집은 불에 타 전소됐고 성경책도 빼앗겨 태워졌으며, 여자 성도들은 닥치는 대로 잡혀 여종이나 노예로 팔려갔고, 남자들은 광산 노예광부로 끌려갔으며, 흩어진 교인들은 땅 속에 굴을 파고 숨든지 산속으로 피하여 신앙을 지켰으나 그들은 이러한 궁핍과 환난 속에서도 주를 바라보며 신앙을 지켰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서머나 교회를 향해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라고 하셨다. 신앙 때문에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게도 빼앗기며, 직장과 일터에서 쫓겨나 당장 일할 곳이 없고 먹을 것도 없으며, 매 맞아 팔다리가 부러진 불구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그들을 You are rich!(네가 부요한 자다, 너는 부자다)라고 하셨다. 어떻게 길바닥으로 쫓겨난 채 굶주리고 헐벗으며 내일이 없고 대책이 없는 그들이 부요한 자며 부자란 말인가?

욕심 많은 형을 타일러 자기와 재산을 나누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한 부자 비유를 들려주신다. 끝도 안 보이는 넓은 들녘에 풍년이 들자, 부자는 ‘이 많은 곡식을 쌓을 곡간이 부족하니 현재의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곡식과 물건을 저장하리라. 그리고 내 영혼에게 평생 먹고 남을 물건을 저장해 놓았으니 이제는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한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시고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다”고 하셨다.          

누가복음의 18번째 비유인 ‘어리석은 부자 비유’(눅 12: 16-21)는 “사람의 생명은 땅의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설명해 주신 예수님의 비유다(Parable of the rich fool, illustrating that life does not consist of earthly possession) 그렇다. 사람의 생명은 인간의 지상소유에 있지 않다. 지상에서 돈과 권세가 많은 것도, 명예와 재산이 많은 것도, 잘 생기고 건강한 것도, 머리가 좋고 재능이 뛰어난 것도 내 영혼이 영생을 얻는 것, 생명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서 어리석은 부자처럼 평생 먹고 남을 재산이 있고, 김정은처럼 3대에 걸쳐 천하를 호령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으며, 땅에 발이 닿지 않을 많은 땅과 평생 해가 지지 않는 곳에서 살 수 있는 돈이 있어도 모든 육체의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들의 생명을 취하실 때, 땅에 소유는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가난한 자의 운명이다. 그래서 자기를 위해 지상에 아무 것도 쌓아둔 것은 없지만 천국에서의 상급이 큰 서머나 교회를 “너는 부자”라고 하신 것이다. 당신은 하늘에서의 부자인가? 하나님이 오늘 내 영혼을 부르신다면 천국에 쌓아둔 재물과 상급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하늘의 초청을 받아드릴 수 있는가?

하나님께 대한 부자, 하늘나라에 재물을 많이 쌓아둔 부자성도는 ⑴ 의를 위하여,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는 자(마 5: 10-12)다. 서머나 교회 성도처럼 예수 위해 핍박을 받고 재산을 빼앗겨 환난과 궁핍을 당하므로 천국에서 받을 상급이 큰 성도들이다. ⑵ 주의 법도를 지킨 성도(시 119: 56)다. 시편저자는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라”(원문해석: “내가 가졌던 이것은 내가 당신의 법도를 지켰기 때문입니다”)고 했는데 본문에서 ‘이것(This)’이란 50-55절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① 인생의 모든 곤란 중에서 말씀으로 위로를 받는 것 ② 교만한 자가 조롱해도 주의 법을 떠나지 않은 것 ③ 말씀과 규례를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를 받는 것 ④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을 향해 거룩한 분노를 갖는 것 ⑤ 나그네 인생길에서 주의 율례가 나의 노래가 된 것 ⑥ 칠흑 같은 고난의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킨 것이다. ⑶ 되갚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베푼 성도(잠 19: 17,눅 14: 12-14, 딤전 6: 18) ⑷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고 값없이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들(고전 9: 18)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종들이다. ⑸ 성도의 사대의무(구제, 기도, 금식, 헌금)를 행할 때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지 않는 성도(마 6: 1)이다.

당신의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 사람들의 칭찬을 듣거나 헌금 드리고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하고 칭찬받는 것은 이미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하늘나라에서 당신이 받을 상은 없다. ‘받았느니라’(They have their reward: 2, 5, 16)의 아페쿠신은 “전액을 영수했다”는 상업용어로 “이미 Receipt(영수증)를 받았다”는 뜻이다. 그렇다. 당신에게 돈을 받거나 회사물건을 접수한 영수증이 있다면 또다시 같은 액수의 돈이나 물건을 받을 수 없듯 이 땅에서 칭찬으로 상을 받은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더 이상의 상은 없다. 칭찬은 영수증이다. 귀를 즐겁게 하려는 세치 혀 칭찬유혹에 속지 말라. 당신은 지금 하늘나라의 부자인가 가난한 자인가? 하늘나라부자면 어느 정도의 부자인가? 사람들에게 듣고 싶은 칭찬의 욕심과 인정받고 싶은 유혹 때문에 하늘나라 상급을 잃어버리는 미련한 성도가 되지 않고 묵묵히 참고 헌신하고 충성하므로 하늘나라의 부요함을 그대로 간직하여 주의 날에 천국에서 상급을 많이 받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3. 생명의 면류관(10절)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장차 너희가 당하게 될 핍박과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권면하면서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이라 했다. 그리고 “너희가 십일(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인데 네가 죽도록 충성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줄 것이고 너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당시 서머나 교회가 당할 환난과 각 시대마다 교회가 당할 환난 그리고 장차 적그리스도의 대환난 때에 성도들이 당할 고난의 내용으로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이 유대인이든 교인이든 불신자와 정부이든 그 핍박의 주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이고, 마귀는 서머나 교인들을 시험하기 위해 몇몇 성도를 감옥에 넣을 것이고, 시대마다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둘 것이며 마지막 대환난 때도 많은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고 핍박하며 죽일 것이다. 이렇게 마귀의 발악과 성도 박해는 어둠이 빛을 대적하듯 필연적이다. 특별히 칠년 대환난 때에 땅에 남아있는 성도들이 당할 환난과 박해는 수억 년 동안 자유를 누리던 마귀가 1000년 동안 무저갱에 갇혔다가 영원한 유황불지옥으로 들어가기 전에 주어지는 마지막 기회고 최후발악이기 때문에 그 환난과 박해는 공전절후, 전무후무한 미증유의 박해가 될 것이다.

이러한 대환난 같은 특정기간의 환난 외에도 하나님은 평상시에 성도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하시는데 그 환난의 네 가지 이유는 ⑴ ‘환난과 시련을 통해 신앙과 인격을 온전케 하시기 위해서’(벧전 4: 12)이다. 뜨거운 풀무 불에 단련을 통해 황금이 순금으로, 순금이 정금으로 순도 높은 최상품의 금이 되듯 성도는 환난과 시련을 통해 귀한 믿음의 성도가 된다. 거센 풍랑이 능숙한 선장을 만들고, 조개의 아픔이 진주를 만들며, 살을 에이는 강추위와 강맹한 삭풍이 단단한 나이테를 만들듯 환난과 시련을 통해 하나님은 강한 성도를 만드신다. ⑵ ‘환난을 통해서 온전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롬 5: 3)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430년(아브라함 75세부터 이삭 출생까지 25년, 이삭 출생에서 야곱 출생까지 60년(창 25: 26), 야곱 출생에서 죽음까지 147년(창 47: 28), 야곱 사망에서 요셉 사망까지 54년(창 37: 2, 41: 46, 47: 27-50:23), 요셉 사망에서 출애굽까지 144년(출 12: 40, 갈 3: 14-17): 총 430년) 이집트 이민생활에서 요셉을 알지 못하는 람세스 2세가 일어나 박해할 때까지 이스라엘은 286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까맣게 잊은 채 ‘여기가 좋사오니’였었다. 그러다가 박해와 환난을 당하자 비로써 가나안 땅에 대한 소망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과 환난과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이 세상의 소망이 무익함을 알게 하시고 내세소망을 주시기 위함이다. ⑶ ‘환난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고’(고후 1; 8, 9)이다. 바울은 자기가 아시아에 있었을 때, 살 소망까지 끊어지도록 극심한 환난을 주신 것은 인간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했다. 그렇다. 인간이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상황을 만날 때,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찾으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게 된다. ⑷ ‘환난 통과자에게 귀한 상급을 주기 위해서’(마 5: 11-12)다. 바울은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주와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딤후 2: 11-12) 고백했다. 환난에서 포기하거나 낙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환난을 통과하는 성도에게만 이러한 상급과 축복이 주어진다.

서머나 교회는 예수를 위하여 환난과 궁핍을 당했다. 환난과 궁핍(Tribulation and poverty; 압박이나 박해에 의한 큰 불행과 가난과 빈곤)의 환난, 들맆신은 “내리 누르고 짓누르는 압력과 압박 등의 신앙적 핍박”을 의미하고, 궁핍, 프로케이안은 “그 결과로 찾아오는 생활의 가난”을 가리킨다. 당시 서머나는 항구도시로 일반적 생활수준은 부유한 편이었지만 기독교인들은 예수 믿는 이유로 직업을 박탈당하고 매매의 권리도 빼앗겼으며 심지어 재산까지 몰수당해 그들의 궁핍과 가난은 처절했다.

그다음, '열흘 동안(Ten days)의 환난‘이다. 열흘 동안, 헤메론 데카의 문자적 의미는 “짧은 기간의 열흘 동안”을 의미하지만 열(10)이란 숫자의 성경적 의미는, 라반이 저지른 열 번의 품삯 변경(창 31: 7, 41) 이스라엘이 열 번이나 하나님을 시험함(민 14: 22) 친구들이 열 번이나 욥을 꾸짖고 학대함(욥 19: 2) 다니엘의 열흘 동안의 채식 시험(단 1: 12-15)등을 통해 볼 때, 열 번(Ten times)이나 열흘 동안의 환난은 “극도까지의 시험과 환난”을 의미한다. 서머나교회가 견디기 쉽지 않은 시험과 환난을 겪을 것이란 말씀이다. 그리고 그렇게 힘든 환난과 시험을 통과하는 서머나교회에게 생명의 면류관 주실 것과 역사상의 모든 죄인과 악인들이 그들의 생각과 언어와 행위로 지은 죄를 따라 심판받아 지옥에 들어가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면류관은 다섯 가지다. ⒈ 의의 면류관(딤후 4; 7-8)“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豫備)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니라” 그렇다. 의의 면류관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을 사모하여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의 달음질을 마치며 자기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지상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면류관이다. ⒉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 9: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애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썩어 없어질 물질을 사치와 허영과 무익한 것에 사용치 않고 절제하여 선교와 구제와 건축과 교회사업의 하나님 영광만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면류관이다. ⒊ 기쁨의 면류관(단 12: 3, 빌 4: 1, 2; 16, 살전 2;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앞에 너희가 아니냐”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므로 전도해 주 앞으로 인도하여 구원하는 성도들이 받을 면류관이다. 이런 성도는 땅에서 죄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축복과 자신의 허다한 죄도 용서받는 축복을 받고(약 5: 20) 저 하늘에서는 자랑과 기쁨의 면류관을 받는다.

⒋ 영광의 면류관(벧전 5: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영광의 면류관은 ⑴ 복음 전하는 주의 종들이 목회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고 더러운 이익보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며 양 무리의 본이 되게 할 때 받을 면류관이고, ⑵ ‘그가 선지자이고 의인이며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에’(선지자, 의인, 제자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a prophet)에서 ‘...의 이름으로’, 레쉠은 “그가 선지자, 의인, 제자이기 때문에”라는 의미) 주의 종들을 주님처럼 영접하고 예수님처럼 섬기는 평신도들이 받는 면류관이다. 영광의 면류관은 성직자만 받는 면류관이지만 평신도가 함께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면류관이다. ⒌ 생명의 면류관(계 2: 10, 약 1; 12-15) 면류관 중에 최고 면류관으로 ① 예수와 복음을 위해 목숨 바친 순교자들이 받는 면류관 ②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속적인 모든 욕심을 물리치고 온갖 유혹과 시험을 끝까지 참아내는 성도들이 받게 될 면류관이다(딤후 2: 11-12) 오늘 우리 중에 의의 면류관 하나뿐 아니라 썩지 않는 면류관, 기쁨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까지 많은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가 많이 나오기를 축원한다.

   4. 죽도록 충성하라(Be faithful until death)

‘열흘 동안(For ten days) 환난을 받을 것’이란 말씀은 서머나 교회가 특수상황에서 당할 극단적인 시련과 환난을 의미하지만 교회사적으로는 주후 100년에서 312년까지의 핍박받는 교회시대의 십대 환난을 가리킨다. 그래서 열흘 동안의 환난은 주후 64년에 시작된 네로 박해에서 312년 콘스탄틴 기독교 공인까지 250년 동안 10명의 로마황제에게 박해당한 ‘10대 환난’을 가리킨다.

첫 번째로 기독교 박해를 시작한 사람은 열일곱 살 나이로 로마황제가 돼 로마시를 불태우고 방화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서 성도들을 죽이다가 31세 젊은 나이에 자살한 네로 클라우디아 씨저였고, 두 번째 박해자는 자신을 주피터 신으로 숭배를 강요하고 그것을 거절하는 성도들을 죽였던 도미티안이었으며, 세 번째는 주후 98년부터 117년까지 20년간 기독교신앙을 불법화하여 박해한 트로얀(Trojan) 황제였다. 황제예배를 반대한 죄로 트로얀에게 잡혀 사자 굴에 던져진 익나티우스가 그의 허벅지를 물어뜯는 사자에게 박장대소하면서 “사자여, 어서 빨리 내 허벅지를 깨물어라. 그리고 내 갈비뼈를 파헤쳐라. 허파를 끌어내고 심장을 끌어내라. 그래서 나를 속히 내 사랑하는 예수님 앞으로 보내다오”하면서 장엄하게 순교한 순교사화는 모든 시대 환난성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네 번째는 순교자의 대명사인 유스틴 마티르를 죽인 마르쿠스 오렐리우스 황제(AD, 161-180), 다섯 번째는 소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아프리카의 많은 지역에서 기독교인을 처형한 셉티머스 세베루스 황제(AD. 193-211년까지 12년간), 여섯 번째는 막시니미우스(주후 235-238년까지 4년간), 일곱 번째는 데시우스(주후 149-251년까지 3년 동안), 여덟 번째는 발레리아누스 리시니우스(발레리안) 황제(주후 253-260년까지), 아홉 번째는 오렐리안 황제(주후 270-275년까지) 마지막 열 번째 황제는 열 명의 박해자 중 가장 잔악한 자였던 디오클레티안 황제(주후 284-305년 재위)였다.

디오클레티안은 노예 후손으로 태어나 군인이 됐다가 황제까지 된 자로 처음엔 기독교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가 부하 가레리우스가 ‘기독교를 근절해야 치안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에 주후 303년부터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칙령은 일체의 기독교예배 금지와 성경을 몰수해 불태워 버리는 것과 예배당 파괴였고, 제 2칙령은 ‘기독교인이 관리나 군인 중에서 해고당하지 않으려면 우상에게 제물을 드리라’였으며, 제 3칙령은 ‘기독교인은 무조건 시민권이 박탈되고 현재 노예로 일하고 있는 자는 절대로 자유가 없다’, 제 4칙령은 ‘현재 감옥에 수감된 기독교인 중에 우상에게 절하는 자에겐 자유를 주고 우상숭배를 거절하는 자는 강제로 숭배케 하라’. 제 5칙령은 ‘기독교인이 우상숭배를 거절할 때는 어떤 고문이라도 감행하라’였다. 그러자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진해서 성경을 불태우고 우상을 숭배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킨 성도들이 훨씬 더 많았다.

디오클레티안은 성경을 모두 불태워버렸다는 신하의 보고를 듣고 ‘기독교 박멸기념비’를 세워 자축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저주로 305년에 왕위에서 물러났고 313년, 그의 나이 78 세로 죽었는데 그가 죽을 때, Ironical(아이러니컬)하게도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로마 국교’로 공인됐다. 성경을 지상에서 모두 없앴다고 자부하고 기독교 박멸을 기념했던 그 땅에서 9년 만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 ‘세계의 국교’가 된 것이니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누가 막겠는가?

“죽도록 충성하라”(Be faithrful until death; 기누 피스토스 아크리 다나투: “죽기까지, 죽을 때까지 충성하라”) 그렇다.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신 서머나 교회에게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은 ‘죽도록 충성하라’였다. 그리고 오늘 당신과 나에게 요구하시는 예수님의 권면도 ‘죽도록 충성하라, 죽을 때까지 충성하라, 날마다 죽으면서 충성하라, 죽음을 체험하면서, 죽음의 배수진을 치고 충성하라’이다. 오늘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나를 구원해주신 예수님을 향한 당신의 충성은 어디까지 인가, 과연 죽기까지, 죽도록 까지 인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것, 지옥을 피하는 길은 결코 쉽거나 간단한 일이 아니며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일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모든 욕심을 못 박은 자, 모든 시험을 이기는 자, 마지막 생명까지 주의 제단에 바치는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최상최고, 지존의 면류관이다. 그럴지라도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성도들이 우리 교회에서 많이 나올 수 있기를 축원한다.

죽도록 충성하라. 기누 피스토스 이크리 다나투! 죽도록 충성하자. 충성만이 우리가 할 일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전 4: 1-2)며 주의 종들의 충성을 강조했고, “충성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라”(딤후 2: 1-2), 교회의 안수집사 부인과 여(女)집사들의 자격은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한다”(딤전 3: 11)고 했으며, 솔로몬은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한다”(잠 25: 13)고 했다.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 당신을 종과 일군으로 세우신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성도가 되자. 느헤미야는 “주 앞에서 아브라함의 마음이 충성됨을 보시고 그에게 가나안 땅 주시기를 언약했다”(느 9: 8)고 했으니 오늘도 주는 충성된 종과 성도들에게 미래를 약속하시고, 하나님의 집에서 모세는 사환과 머슴으로 충성했고 예수님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아들로 충성했는데(히 3: 2, 5-6) 모세의 충성을 보신 하나님은 그의 큰 실수에도 불구하고 아론과 미리암의 비난을 책망하고 모세를 변호하고 막아주시기까지 했다(민 12: 7) 비교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충성된 부하를 돌보는 조폭과 전두환씨의 충성된 부하 챙김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충성된 성도들을 돌보시고 지키시며 축복한다.

바울은 “예수께서 우리를 충성되이 여겨 집사 권사 장로 목사 선교사의 직분을 맡긴 것이라”(딤전 1: 12)고 했고, 다윗이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라”(시 101: 6)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땅에서 충성되게 하나님 수종할 자를 찾고 계시며, 예수님은 은혜시대와 환난시대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으로 때를 따라 그 종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는 청직이 종들에게 모든 소유인 은혜시대축복과 천년왕국까지 맡기겠다“(마 24: 45-47, 눅 12: 41- 48)고 하셨으니, 우리에게 직분을 맡기신 예수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자. 죽도록 충성하자. 내 혈관의 피 흐름이 멈추고 내 심장의 박동이 멈추는 시간까지 내게 직분을 맡긴 예수께 충성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시계방향으로 일곱 교회에 보낸 계시록의 수신자가 에베소에서 서머나로 바뀐 것을 교회사적인 예언으로 적용한다면 에베소교회처럼 첫사랑을 버린 채 처음 사랑으로 돌아오지 않는 교회와 성도는 서머나 교회처럼 하나님의 채찍을 당할 것이란 경고메시지다. 그렇다. 당신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첫사랑 회복경고는 무작정 언제까지 기다리는 경고가 아니다. 예수님은 기다리는 작정 시간이 끝나면 채찍을 드신다. 슬금슬금 꽁무니 빼고, 요리조리 핑계 대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기다림에 지치신 주님의 분노의 채찍을 당하지 않기를 축원한다. 

서머나, 스뮐네는 “부숴진 몰약, 으깨어진 몰약”이란 뜻이다. 서머나 교회시대는 250년간 무참하게 짓밟히고 부서지며 으깨진 시대였다. 첫사랑을 회복치 않는 자들이 당한 시련이고 첫사랑 회복을 외면한 자들이 당할 시련과 채찍이다. 채찍에 맞아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부숴지고 으깨진 다음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지망고 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때 돌아와 그분과의 첫사랑을 회복하라. 첫사랑, 첫 믿음, 처음 열심, 처음 은혜, 처음 열심을 회복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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