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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01월05일 18시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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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날과 성령의 감동
1959년 5월 12일, 교회에 첫발을 들여놓은 때부터 지금까지 53년 신앙생활에서 내 믿음의 버팀목이 돼 준 양대 기둥은 ‘다시 오실 예수 재림신앙’과 ‘신앙 때문에 죽임 당한 선진들의 순교신앙 간증’이라고 할 수 있다. 말씀의 은혜를 깨닫고 세례 받은 1960년부터 우연하게 읽기 시작한 기독교 순교사화 책들과 성자들과 신앙위인들이 당했던 박해와 고난의 역사들은 당시 신앙 때문에 핍박을 많이 받았던 감수성 예민한 어린 소년인 내 신앙의 뼈와 살이 됐고, 개척교회 목사님들께 듣고 배운 예수 재림 메시지는 내 신앙의 풍부한 영양분이 됐다. 특히 김응조박사의 예언연구서인 ‘말세와 예수의 재림’으로 새벽마다 종말론을 강해하시던 목사님의 성경공부는 어린 내게 충격적인 은혜가 돼, 하늘에 이상한 구름이 뜨고 날씨가 특이한 징조가 보이면 의미도 잘 모르면서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내 주님 오시는가 기다립니다’를 눈물 흘리며 부르던 반세기 전의 기억이 지금도 새로운데 그런 것들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세계의 옛 문명들이 나일 강, 유프라테스 강, 양자강, 아마존 강 유역에서 시작됐듯 기독교문명 교회는 성도들이 흘린 순교 피의 강변에서 시작됐고 순교의 피를 마시면서 성장했다. 그래서 기독교 성장 동력은 순교의 피다. 지금까지 2천년 기독교사에서 신앙 때문에 죽임 당한 성도는 대략 1억 정도가 된다. 그 중에 주후 64년 네로 황제부터 312년 콘스탄틴 대제의 기독교 공인까지 250년에 걸쳐 열 명의 로마황제들에게 500만 이상이 죽임 당한 초기역사는 기독교가 전 세계와 인류구원을 책임진 종교, 지구촌 구원을 위해 기쁘게 희생한 종교임을 대변해 주고, 오늘 우리에게 올바른 진리와 참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을 충고해 준다. 선조들의 순교 피의 바통을 받은 우리도 다음 세대에게 바통을 부끄럼 없이 전달할 수 있길 축원한다. 

주후 54년, 17세 어린 나이로 황제가 된 네로 클라우디아 씨저는 정권을 잡자마자 닥치는 대로 정적들을 살해하고 죽였다. 이복동생 브리탄니쿠스를 독살했고 자기 아내 옥타비아도 살해했으며 심지어 자기의 친어머니 아그립바를 아내로 삼아 살다가 독살할 정도로 천인공노할 불효자요 악랄한 미치광이였다.

주후 64년 7월 18일과 19일, 정신병자 네로는 로마시를 불태워 버리고 더 웅장하고 거대한 도시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불을 질러 로마 시 14구 중 10구를 태웠는데 그때 네로는 산 위에서 화염에 싸여 불에 타죽는 시민들을 구경하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얼마 후 네로는 시민들의 폭동과 거센 반발에 부딪치자 겁을 먹고 ‘로마시 방화자는 기독교인이라’는 소문을 퍼트린 후 기독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처형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독교 박해의 시작이다. 네로 박해에서 주후 67년에 베드로가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고, 68년에 바울이 원형극장에서 칼에 맞아 순교 당하므로 기독교의 두 기둥이 사라졌다.

네로 다음으로 기독교를 박해한 자는 자신을 ‘주피터의 신’이라 주장하고 주피터 신과 함께 자신 숭배를 강요한 도미티안 황제(AD. 81-96)이다. 주후 81년 9월 13일, 자기 형 베스파시안(Vespasian)의 뒤를 이어 30세에 황제가 된 도미티안은 재위 17년 동안 자기를 신으로 숭배하기를 거절하는 4만 명의 기독교인을 무신론자로 몰아 죽인 잔인한 황제로, 자기 아내와 사촌형제를 기독교인이라고 박해했고, 예수 믿는 질녀 훌라비아 도미티아(Flavia Domitia)를 폰티아 섬으로, 기아라(Gyara)와 세리퍼스(Seriphus)를 다도해로 유배를 보냈으며 예수님의 친 동생인 유다의 두 손자도 다윗의 혈통이라고 잡아다가 모반자로 몰아 고문을 했고 사도 요한을 밧모 섬으로 유배 보내는 등 악랄하기로 유명했다.

주후 96년 반역자에게 살해당하기까지 17년 동안 4만 명의 기독교인을 죽인 도미티안은 황제숭배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사도 요한을 펄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 넣었는데 하나님의 특별보호로 털끝만치도 상하지 않고 살아남자 기름 가마에서 꺼내 극심한 고문을 했다. 그런데 모진 고문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자 도미티안은 요한을 밧모 섬으로 유배를 보낸다. 그리고 요한이 밧모 섬에서 혼자 주일 예배를 드리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계시를 받아서 책을 쓴 것이 밧모 섬 묵시, 요한 계시록인 것이다. 요한이 밧모 섬에서 계시록을 기록하고 있을 동안, 권력에 미쳐서 기독교를 박해하던 도미티안이 살해당한 것 같이 당신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록을 깨닫고 은혜를 받고 있을 때, 세상은 돈과 권력, 음란과 도적질, 오락과 거짓에 미쳐 돌아가고 있음을 기억하고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붙잡는 지혜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주의 날과 성령의 감동

   1. 주의 날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네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9-10절)

오늘날의 터키와 그리스를 가르는 수역인 에게 해(海) 북쪽에서 남쪽으로 영어의 C자처럼 뻗어있는 연중 쉴 새 없이 사나운 바람이 몰아치는 섬, 정치범들과 극악한 죄인들을 유배시키는 고도(孤島) 밧모 섬은 소아시아 서편에서 35마일 에베소에선 약 60마일 떨어진 길이가 80-90마일, 넓이가 8마일쯤 되는 섬으로, 나무는 거의 없고 식물은 있으나 대단히 귀하고 거친 바위와 돌멩이 언덕으로 된 무인도 같은 외롭고 황량한 섬이다.

정든 교회가 있고 성도들이 있는 에베소를 떠나서 생면부지의 고도 밧모 섬에 유배된 요한, 90세가 넘은 백발노옹 요한은 파란 하늘에 솜처럼 피어올랐다가 바람 따라 사라져가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그리고 멀리 해변 바위들에 부딪쳐 은빛가루를 만들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파도들과 기암절벽 위를 날아다니며 고도의 낭만을 즐기는 수백 마리 갈매기와 이름 모를 바다 새들의 지저귐 소리들을 들으며, 가장 어린 나이로 예수 제자가 되어 특별사랑을 받던 지난날들의 생활과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눈으로 봐야했던 악몽 같은 사건들과 부활의 대역사, 예수 승천 후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놀라운 성령의 역사와 교회의 부흥 그리고 에베소 교회감독으로 소아시아 여러 지방과 지중해 변방 여러 도시들을 순방하며 복음을 전하던 감격스러웠던 기억들, 그러다가 네로 때부터 시작된 기독교 박해로 이곳저곳을 피신해 다니던 일들과 황제숭배 거절로 도미티안에게 붙잡혀 말할 수 없는 고문과 박해를 당하며 죽을 고비를 넘기고 밧모 섬까지 오게 된 자신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그의 생각을 지나간다. 바닷바람에 백발을 나부끼며 먼 하늘을 응시하면서 지나간 한 세기를 회고하는 당시 요한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러던 어느 주일, 요한은 동굴에서 혼자 주일예배를 드리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는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Write in a book what you see)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And send it to the seven churches)

“써라”(Write it; 그랖손)는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하는 표현으로 “지금 바로 쓰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계시록에 12번이나 반복해 사용한 말로 계시록이 하나님의 권위로 됐음을 시사하는 말이다. 주일예배를 드리던 요한은 나팔소리 같은 거대한 음성에 위압당해 계시를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계시를 기록하기 전 요한은 먼저 자신을 소개한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큰 나팔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① 나는 너희의 형제다(I, John who also am your brother) 요한은 자신과 계시록의 편지를 받을 수신자, 아시아의 일곱 교회와의 관계를 너희의 형제(Your brother)라고 했다. 그렇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국가나 문화, 언어나 색깔, 빈부귀천, 남녀노소, 부자빈자, 있는 자 없는 자 구별 없이 예수 안에서 한 형제요 한 자매이다(마 12: 46-50, 막 3; 31-35, 눅 8: 19-21) ②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자다(Companion in tribulation) 환난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온전히 충성할 때, 경건하게 살려고 할 때 당연하게 나타나는 고난이다(요 16: 33, 행 14: 22, 딤후 3: 12) 나는 주님 명령에 충성하는 자요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란 말이다. ③ 예수의 나라에 동참하는 자다(Companion in the kingdom) 나도 너희처럼 메시야 통치의 축복을 누리고 있는 천국백성이라는 말이다. ④ 예수의 참음에 동참하는 자다(Companion in patience) 나도 다른 성도들처럼 천국의 영생복락을 위해서 환난에서 적극적으로 인내하고 참는 자란 말이다. 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 섬에 있던 자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예수 증거하는 것 때문에 밧모 섬에 유배됐다는 말이다. ⑥ 주의 날에 성령에 감동에 감동했던 자다. ‘성령에 감동하여’(I was in the Spirit, 에게노멘 엔 프뉴마티)는 문자적인 의미는 “내가 성령 안에 있었다”란 뜻으로 “성령께 완전히 사로잡힌 황홀상태, 성령께 붙잡힌 입신상태에 있었다”는 말이다. 이 같은 표현은 계 4; 2, 17: 3, 21: 10에서도 반복됐는데 이 말은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 한 번의 입신상태에서 계시록 전체를 본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입신상태에서 계시를 보고 기록했다는 말이다. ⑦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은 자다(I heard behind me a great voice like the sound of trumpet)

성경에서 사람들이 나팔소리를 듣는 경우는 1) 백성들을 불러 모을 때(민 10: 2, 왕하 11: 14), 2) 파수꾼이 중대한 일을 경고할 때(겔 33: 3, 6, 욜 2; 1, 습 1: 16), 3) 전쟁을 알리거나 출전할 때(수 6: 4, 삿 6: 34, 겔 7: 14), 4) 민족의 절기 때(레 23: 24, 시 81: 3), 5)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출 19: 13, 16, 20: 18, 히 12: 19), 6)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마 24; 31, 고전 15: 51, 살전 4: 16) 등 중요한 때에 나팔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 요한이 나팔소리 같은 큰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요한에게 기록하게 하시는 계시가 중대한 계시였다는 뜻이다.

요한은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A great voice as of a trumpet; A loud voice like the sound of trumpet)을 들었다. 계시록에 큰 음성이란 말이 20여 번이나 언급됐고 ‘크다’(Great; 메가스)는 말이 81번이나 기록됐는데 이것은 계시록에 기록된 사건은 모두 큰 사건들이고, 앞으로 계시록의 예언대로 지구촌에 나타날 사건들은 하나같이 전무후무하리만치 크고 중요한 사건들이 될 것이란 말이다. 요한은 나팔소리 같은 엄청나게 크고 우렁찬 음성을 들었으니 계시록은 그만큼 중요한 메시지란 말이고 계시록에 기록된 큰 환난(2; 22), 큰 칼(6: 4) 큰 표적(6: 12), 큰 날(6: 17), 큰 풀무(9: 2), 큰 두려움(11; 11), 큰 권능(13; 5), 큰 우박(11; 19, 16: 21), 큰 지진(16: 18) 큰 음녀(17: 1), 큰 쇠사슬(20: 1), 큰 보좌(20: 11) 큰 성곽(21; 12)들은 앞으로 종말시대에 지구촌에 일어날 사건들은 초대형의 메가톤급 대형 사건들이 될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 예수님의 공중 재림으로 수억의 사람들이 동시에 지구촌에서 증발할 휴거사건에서부터 장차 있게 될 ‘칠년 대환난’과 예수님의 지상 재림과 세상심판은 하나같이 경천동지할 메가톤급 사건들이다. 이 모든 사건들을 심판저주와 재앙으로 맞지 않고 축복과 기쁨으로 맞을 수 있기를 축원한다.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큰 나팔소리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날이 주의 날(The Lord's day, 테 퀴리아스 헤메라: “주님의 날, 주님께 속한 날”)이었다. 밧모 섬의 여러 날 중 요한은 주님의 날인 주일날에 성령의 감동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그렇다. 주의 날은 문자 그대로 “예수께 속한 주님의 날”이다. 김목사의 날이나 서장로의 날도 아니며, 이집사가 맘대로 할 수 있는 이집사에게 속한 날도 아니다. 주일은 주님께 속한 주님의 날이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의 날’로 기념해 모여 예배드린 “안식 후 첫날”(막 16: 2, 눅 23: 56, 요 20: 19, 행 20: 7), “매주일 첫날”(고전 16: 2)의 그 주일날이다. 요한은 토요일 안식일 대신 주의 날에 밧모 섬 동굴에서 혼자 예배를 드리다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렇다. 오늘 우리도 주일 예배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성령의 감동과 하나님의 음성이 없는 주일은 일요일은 될 수 있어도 테 퀴리아스 헤메라의 The Lord's Day, 주의 날은 아니다. 일 년 쉰 두 번(52번)의 주일예배들이 성령의 감동이 있는 주일예배, 하나님의 음성이 큰 나팔소리처럼 우리 가슴을 뒤흔들고 영혼이 뜨거운 감동을 받는 주일예배, 하늘이 열리는 주일예배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2. 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1: 11)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무슨 말인지 알지요? 50여 년 전, 역사시간에 외우던 27명의 이조왕조 이름 첫 글자모음이다. 같은 방법으로 아시아의 일곱 교회도 순서대로 외우려면 ‘에서버 두사빌라’로 외우면 암기하기가 쉬어서 소개했다. 하나님은 요한에게 이제부터 네가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서버 두사빌라’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했다. 실제로 요한 당시 소아시아엔 예순 세(63)개 교회가 있었는데 어째서 일곱 교회만 선택해 그들에게 계시록을 보내라고 했을까? 그것은 예순 세 개 교회를 그들의 영적상태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서로 같은 아홉 교회들을 한 묶음으로 해서 일곱 종류의 교회로 나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아시아 예순 세 개 교회들 중, 아홉 교회가 에베소 교회와 같은 영적상태였고, 아홉 교회는 서머나 교회, 다른 아홉 교회는 사데 교회, 또 다른 아홉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았기 때문에 63(예순 세)개 교회 모두에게 계시록을 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순 세 개 교회를 대표해 일곱 교회에게만 계시록을 보낸 또 다른 영적교훈은 ① 일곱 교회는 사도 요한시대에 실존했던 교회였다. ‘에서버 두사빌라’ 일곱교회는 상징적인 교회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했던 교회였다는 말이다. ② 2000년 교회사를 일곱 교회시대로 나눌 수가 있다. ⒜ 에베소 교회는 주후 30년부터 100년까지의 초대교회 시대를 예표하고 ⒝ 서머나 교회는 100년부터 312년까지의 핍박받는 교회의 상징하며 ⒞ 버가모 교회는 312년부터 590년까지의 방종과 타락의 교회시대를 표상하고 ⒟ 두아디라 교회는 590년에서 1520년까지의 중세기독교 암흑시대, 이방교회시대를 예표하며 ⒠ 사데 교회는 1520년부터 1820년까지의 죽은 교회시대의 표상이고 ⒡ 빌라델비아 교회는 1821년에서 예수 재림까지의 교회부흥에서 선교시대와 종말교회시대를 상징하며 ⒢ 라오디게아 교회는 1900년대 이후 예수 재림까지의 말세의 미지근한 교회를 표상한다.

③ 일곱 종류로 나눌 수 있는 각 시대 세계교회의 예표다. 2000년 역사에 시대마다 존재했던 모든 교회를 ‘에서버 두사빌라’의 일곱 교회로 나눌 수 있고 현존하는 지구촌 수십만 교회와 주일마다 교회를 찾는 20억 교인들도 개개인의 신앙을 일곱 교회 신앙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이다. ④ 가장 중요한 것은 21세기 지구촌에 존재하는 종말시대 교회와 종말성도를 일곱 교회 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에서버 두사빌라’,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서 에베소 버가모 두아디아 세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과 책망을 함께 들었고, 사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들었으며, 서머나 빌리델비아 두 교회는 칭찬만 들었던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도 칭찬과 책망을 함께 듣는 교회와 성도가 있고, 책망만 들을 교회와 교인도 있으며, 칭찬만 들을 교회와 성도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교회와 당신 신앙은 어디에 속하는가? 칭찬과 책망을 동시에 듣는 신앙에서 칭찬만 듣는 신앙이 돼 주의 날에 들림 받아 휴거에 동참하는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3. 교회에 계신 예수님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계셨더라”(12-13상)

“네 본 것은 내 오른 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20절)

오늘 많은 성도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교회 안에 예수님이 계심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저 하늘 구만리장천에만 계신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러나 무소부재 영원하신 하나님과 예수님은 지금 우리 성전, 주기도문 교회 안에 계신다. 그래서 우리 예배에서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거룩하고 경건해야 한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에서 옆 사람과 잡담하거나 졸거나 잡념을 갖거나 딴 짓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불경스런 일이다. 우리 예배에 천사들까지 동원해 임재 하셔서 영광을 받으시는 성부 성자 성령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건하고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나팔소리 같이 큰 음성으로 “네가 보는 계시를 즉시 기록해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우렁찬 음성을 알아보려고 뒤를 돌이켜 보자 요한의 눈앞에 일곱 금 촛대가 보였고 그 촛대 사이로 예수님이 걸어 다니시는 모습이 보였는데 예수님은 요한에게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하시므로 “나는 별과 같은 내 종들을 내 오른손으로 붙잡고 있고, 내가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걸어 다니는 것처럼 나는 교회 안에 임재해 있다”고 하셨다. 그렇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은 별과 같은 주의 종들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계신 분이고,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교회 안을 걸어 다니시는 분이며 교회와 교회, 지구촌 모든 교회를 왕래하며 돌보시는 분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고(시 11: 4, 합 2; 20) 살아계신 예수님도 지금 교회 안에 계신다(계 1: 13) 그래서 다윗은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셨다(He heard my voice out of His temple)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다”(시 18: 6)고 고백했으며 찬양대장 아삽은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다”(시 73: 17) 고백하므로 성전에 들어갈 때에 ‘악인의 운명을 깨달음으로’ 자기의 신앙적 고민이 해결됐다고 했다. 성전에 계신 주님을 만나 부르짖는 모든 기도제목들이 응답되기를 축원한다.

사도 요한이 보았던 촛대 사이에 걸어 다니시는 예수, 성전 안에 계신 예수님은 ①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으셨다. 긴 옷은 제사장과 왕과 재판관이 입는 옷이다(출 28:4, 레위 16: 4). 예수님이 성전에서 긴 옷을 입고 계신 것은 제사장으로 교회를 찾아온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주고 축복해주며, 왕으로 성도들을 다스리시고 원수들에게서 보호해주며, 재판관으로써 성도들에게 공의를 행하시는 분임을 가리킨다. ②가슴에 금띠를 띠신 분이다. 고대사회에서 가슴에 금띠를 띠는 것은 권위와 능력과 위엄을 상징하고 권세와 정의의 표식이었다(욥 12; 18, 사 22: 21) 지금 예수께서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 사이에 계신 것은 대제사장과 왕으로써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으로 성전에 계신다는 뜻이다. ③ 머리와 털의 희기가 횐 양 털 같고 눈 같은 분이다. 흰색의 ‘희다’(white, 류카이)는 “아름다움, 존엄, 성숙, 순결 그리고 지혜의 상징”이다. 백발은 인생의 춘풍추우, 산전수전을 다 겪고 많은 경험을 쌓아 지혜의 극치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지혜가 뛰어난 인류의 스승 예수께서 하나님의 지혜로 우리 신앙과 삶을 윤택하게 해주실 맨토로 성전에서 지금 당신 곁에 계신다. ④ 불 꽃 같은 눈을 가지신 분이다(His eyes were like a flame of fire; 14하) 불 꽃(Flame, 플록스)은 “인간영혼의 가장 깊은 밑바닥까지 뚫고 나가는 불 꽃 같은 광채”을 가리킨다. 지금 성전에서 당신 곁을 걷고 계신 예수님은 마음을 꿰뚫고 통찰하며 투시하는 분이니 그 앞에서 무엇을 숨길 수 있겠는가? ⑤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발을 가지신 분이다(15상) 빛난 주석(Fine brass, 칼콜리바노)은 “금 같은 청동, 양질의 합금이나 놋쇠”를 의미하지만 영적으로는 원수들을 짓밟아 심판하심을 가리킨다. 지금 성전에 계신 예수님, 장차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님의 발은 초림 때 십자가에 못 박힌 발이 아니라 영광과 권능으로 오셔서 더러운 무리와 반대자들 특별히 바른 신앙을 떠나 이단에 빠진 자들을 짓밟아 심판할 발을 가지신 분이란 뜻이다. ⑥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을 가진 분이다(His voice as the sound of many waters; 15하) '많은 물소리‘(포네 휘다톤)는 큰 파도소리나 이과수폭포와 나이아가라폭포처럼 거대하고 웅장한 소리로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권위와 위엄의 소리”를 가리킨다. 주님의 음성은 작은 소리라도 인생을 바꿔놓는 위력이 있고 작은 천둥소리도 천하를 소동케 한다. 하물며 천지를 진동하는 주의 심판의 음성 앞에 설 자가 누구겠는가? ⑦ 오른 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있는 분이다(In His right hand, He held seven stars; 16상) 그렇다. 지구촌 모든 성전에 계신 예수님은 비록 죄 많고 더럽고 냄새나는 세상에 몸담고 살지만 마음과 영혼은 티끌이 날며 소란한 세상에서 물욕, 정욕, 탐욕과 모든 명예욕을 초월해 저 하늘의 별처럼 숭고하게 사는 주의 종, 칠흑의 밤하늘에 높이 떠서 사람들의 길을 인도해주며 시간과 때와 방향을 알려주는 하늘의 별처럼 사는 종들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계시는 분이다. ⑧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분(Out of His mouth came a sharp two-edged sword; 16중)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왔다”는 표현은 신구약에서 30여회나 인용된 말씀으로, 예수님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 수술하고 치료하며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해 모든 것을 드러내는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분이란 말씀이다. ⑨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은 얼굴을 가진 분이다(His face was like the sun shining in His strength; 16하) 엄동설한이 지나고 양춘가절이 돌아와 해가 힘 있게 비추면 모든 만물이 살아나듯 예수님의 얼굴은 모든 사람에게 넘치는 생명력을 공급한다는 말이다. 우리 성전에 계신 예수님의 얼굴빛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기를 축원한다.

   4. 예수님의 말씀

요한은 어두컴컴한 동굴 속에서 혼자 주일예배를 드리다가 갑자기 천둥소리보다 더 크고 우렁찬 나팔소리를 들었는데 그 나팔소리 가운데 예수님의 음성이 들렸고 이어서 예수의 영광스럽고 찬란한 모습이 그 앞에 나타났다. 자나 깨나 오매불망 뵙고 싶었고 그리워했던 예수께서 나타났을 때 요한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에게 나타난 예수는 60여 년 전 자기들과 함께 계시다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 음성을 듣고 자기가 상상했던 것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혀 다른 예수, 너무도 찬란하고 아름답고 위엄스런 예수의 모습을 보았을 때, 요한은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사람같이 돼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과거에 초라했던 초림 예수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부활 예수 그리고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는 같을 수가 없다.

예수의 영광스럽고 찬란한 모습에 압도되고 너무나 감격한 요한은 죽은 사람처럼 그 앞에서 쓰러져 버렸다. 그러자 예수께서 오셔서 요한에게 오른손을 얹고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17-20절)

고 말씀하셨다. 황홀경에 빠져 입신상태가 된 요한에게 하신 예수 말씀을 알아본다.

   ⑴ “두려워 말라”이다.
 
성경엔 하나님과 예수께서 두려운 상황에서 무서워하며 불안해하던 자들에게 “두려워 말라”(Don't be afraid! Fear not!)고 하신 말씀이 무려 80회나 된다. 당신과 내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성경적 이유는 ① 예수께서 ‘처음과 나중’(17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처음이고 나중이다. 세상 사람의 정치, 사업, 결혼들은 처음은 거창하고 요란하게 있지만 나중은 초라하고 보잘 것이 없다. 그러나 일의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나중이신 예수께서 함께하는 당신은 처음도 나중도 당당하고 두려워할 것이 없다. 유명한 성자 빅터(Victor)는 예수를 가리켜 “나는 처음과 나중이라. 창조를 통해 처음이요 심판을 통해 나중이라. 내 앞에 신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이요 내 후에도 신이 없기 때문에 나중이라. 만물이 내게서 나갔기 때문에 처음이요 만물이 내게로 돌아오기 때문에 나중이라. 나는 시작의 원인이기 때문에 처음이요 나는 심판자며 종말이기 때문에 나중이라”고 했다. 모든 것의 처음과 나중,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신 예수를 사랑하는 성도는 큰 소리로 ‘아멘’하여 살아계신 주님께 영광을 돌리자. ② 예수는 “산 자”이기 때문이다(I am He that lives; The Living One, 카이 호 존: “항상 살아있는 영원한 존재”) 그렇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는 지구촌 유일의 죽었다가 산 자요, 세세토록 항상 살아계신 분이시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③ 나를 위해 죽으셨던 분이다(He was dead) 무엇보다도 예수는 십자가 죽음으로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 값을 모두 지불했고 나의 질병과 저주와 지옥에 갈 것까지 속전해 주셨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 ④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분이다(I have the keys of hell and of death; 18하) 예수는 인류의 마지막 원수인 사망의 열쇠를 가져 사람의 살고 죽는 일을 주관하시고, 음부 열쇠를 가져 사람이 죽은 후 천국과 지옥에 가는 일까지 주관하시는 분이다. 나의 구주이신 예수께서 살고 죽는 일과 천국과 지옥까지를 주관하시니 우리가 누구를 무서워하며 두려워하겠는가? 어머니 태속에서부터 영원천국까지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주님께 세세토록 영광을 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⑵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9절)

Write the things which you have seen, and the things which are, and the things which shall take place after these things. 계시록을 푸는 열쇠요 계시록의 전체내용을 요약한 말씀으로 ‘네가 본 것’(The things which you have seen)은 지금까지 요한이 보았던 계시록 1장의 모든 묵시를 가리키고, ‘이제 있는 일’(The things which are)은 2장과 3장에서 있게 될 일곱 교회에 관한 묵시 말씀을 가리키며, ‘장차 될 일’(The things which shall take place; The things which shall be) 은 계시록 4장에서 22장까지 전개될 사건으로, 성도들의 공중 휴거와 칠년 대환난, 적그리스도의 등장과 지구촌 대재앙 그리고 예수의 지상 재림으로 세워질 천년왕국과 하나님의 백보좌 심판, 새 하늘 새 땅의 신천신지와 영원지옥에 대한 계시이다.

특별히 예수님은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요한에게 말했다. 네가 보고 기록하는 이 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할 수신자는 지구촌의 교회들과 주의 사자들이라는 말씀이다. 칠흑같이 캄캄한 지성소를 금 촛대만이 환하게 밝힐 수 있었듯 지구촌 모든 교회가 이 계시를 전달해 어둠의 세상,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힐 사명을 주셨다는 메시지며, 계시록을 받아드려 그것을 읽고 듣고 지키는 주의 종들만이 내 오른손에 붙잡힌 나의 종들이란 비밀메시지 말씀이다. 그래서 ‘내 오른손에 일곱별의 비밀’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계시록을 사랑하고 받아드리는 교회가 몇이나 되며 계시록을 읽고 듣고 배우고 지키는 예수님 오른손에 붙잡힌 별과 같은 목사, 부흥사, 신학자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가?

그리고 장차 될 일(The things to come), 묵시록 4장에서 22장까지 장차 일어날 일들은 요한이 지금까지 본 1장의 계시처럼 지구촌에 반드시 일어날 사건이고, 당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실제 있었던 일과 2천년 교회사에서 나타났고 지금도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반드시 실제로 있게 될 사건, 반드시 속히 될 일들이다.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계시록은 상징이나 영적으로 해석할 말씀만이 아니다. 앞으로 지구촌에 반드시 일어날, 실제로 나타날 사건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지금은 요한이 보고 듣고 기록한 계시록이 이뤄지고 성취될 절체절명의 시기이다. 초초(草草)하다. 시간이 많지 않다.

현재 미국과 세계 여론 70% 이상이 동조했고 오바마까지 손을 들어준 대로 몇 달 안에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기지를 공격한다면 반미동맹을 맺은 소련과 중국을 위시해, 시리아와 터키와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의 이슬람 국가들이 이란을 편들어 성전(聖戰)을 선포하고 벌떼처럼 일어날 것이고 중동의 화약고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터질 것이다.

성경은 세계의 지붕, 마곡 땅 러시아의 로스(Rosh), 모스크바의 메섹(Meshech), 토볼스크의 두발(Tubal) 왕인 곡(Gog)의 소련이 바사의 이란과 구스의 에티오피아와 붓의 리비아과 고멜의 게르만 족과 북방의 도갈마인 터키와 알메니아 족속을 거느리고 이스라엘을 침공하는 때가 세상 종말징조 중 하나라고 했다(겔 38, 39) 셈 자손의 바사(대하 36: 20-23, 에 1; 3, 14, 18)와 야벳 자손의 고멜과 도갈마(창 10: 2-3)와 함 자손의 구스와 붓(창 10: 6)이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는 것이다. 인종과 민족과 종교의 경계를 초월한 세계적 전쟁, 전 지구적 전쟁이다.

이 전쟁을 전후하여 성도의 휴거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쟁에 하나님이 개입하여 ‘모든 산이 무너지며 절벽이 떨어지며 모든 성벽들이 무너질 것이며’(겔 38: 20) 하나님께서 온역과 피, 쏟아지는 폭우와 큰 우박덩어리와 불과 유황으로 소련과 동맹군들에게 비를 내리듯 하므로 파멸할 것인데(겔 38: 22) 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이 적군의 시체를 치우는데 7개월이 걸리고 무기를 불태우는데 7년이 걸릴 것(겔 39: 9, 12)이라고 했으니 무기를 불태우는데 7년이 걸린다면 7년 대환난 전에 성도의 휴거가 있어야 그 일이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무기 태우는 7년보다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할 것이란 사실이다. 그 일로 소련이 개입한다면 주님의 공중 재림과 성도의 휴거는 눈앞에 와 있다. 그날이 언제일지, 소련이 이 전쟁에 주전국이 될지, 성도의 휴거가 언제일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요한 계시록의  성취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여 그날에 들림 받으므로 후회 없는 믿음 생활, 교회생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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