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우선처사’ 십계 - 기독뉴스
모바일보기
기독뉴스 개편사이트 안...
2024년 05월 06일
 
뉴스 오피니언 방송사진 커뮤니티 2세뉴스
기사등록 I 독자마당 I 광고후원 로그인 회원가입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김엘리야칼럼
2012년01월03일 20시33분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성도의 ‘우선처사’ 십계

2004년,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난 서울대명예교수요 수필가며 농촌운동가였던 고 류달영 박사는 ‘슬픔에 관하여’란 책에서 의사를 통해 셋째 아들의 사형선고를 들은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으로 천붕(天崩)이라고 한다. 나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이 표현이 옳음을 알았다. 그러나 오늘, 의사의 선고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으니 이는 천붕보다 더한 것이다. 나는 6.25때 두 아이를 잃은 일이 있다. 자식이 어버이 생각하는 마음이 아버지의 자식 생각하는 마음에 까마득히 못 미침을 이제 세 번째 체험한다”고 말해 자녀를 먼저 보내는 일이 부모 잃는 슬픔보다 큼을 고백했다.

자녀나 손자손녀를 먼저 잃는 일을 참척(慘慽)이라고 하는데 당해본 사람만이 그 참담한 슬픔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몇 년 동안 함께 교회를 섬겼던 고강태천 권사는 건강하던 둘째 딸이 갑자기 급사했을 때, 열 달 동안 정신 나간 미친 사람처럼 다 찢어진 옷에 머리를 산발한 채 전국각지를 헤매 다니다가 마지막으로 깊은 산속사찰까지 가게 됐는데 그곳 명승(名僧)이 ‘당신 딸은 좋은 곳에 갔으니 더 이상 방황하지 말라. 그리고 당신은 예수 믿어야 할 사람이니 하산해 교회를 가라“는 말을 듣고 정신을 차리고 교회로 돌아왔다고 간증한 적이 있는데, 지난 1월 22일 작고한 여류소설가 박완서는 남편을 잃은 지 석 달 만에 예비의사 아들을 떠나보낸 후 “자식을 앞세우고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처넣는 에미를 생각하니 징그러워 토할 것만 같았다”고 하면서 스스로 미치지 않는 것이 저주스러웠던 그녀는 수녀원에 들어가 20여 일 동안 “하나님과 대결하며” 살았다고 고백했고, 자기보다 먼저 간 자식과 생사를 맞바꾸지 못함을 한탄한 충무공 이순신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하거늘 이 어찌 하늘의 이치에 어긋난 일이 있는가”라며 통분했으며, 자기에게 칼 뿌리를 겨누고 반역했던 셋째 아들 압살롬의 전사소식을 들은 성군 다윗은 미친 사람처럼 온 마음과 몸을 떨며 전율하고 통곡하면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O my son Absalom, my son, my son Absalom! Would I had died instead of you. O Absalom, my son, my son"(삼하 18: 33)라 부르짖었고, 네 살 난 늦둥이를 사고로 잃었던 록 가수 에릭 클렙턴은 환각의 힘이라도 빌려서 슬픔을 잊으려고 술과 마약에 탐닉했었으며, 둘째 아들을 잃는 고산 윤선도는 “가을바람 불고 달 밝은 밤이면 내 어찌 누각에 오를 수 있겠느냐”며 창작의 원천이던 음풍농월(吟風弄月)까지 끊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그런데 동방의 의인 욥(Job)은 하루 밤에 일곱 아들과 세 딸을 잃는 인생최대 참척의 고통에서 비통과 비분의 표시로 입었던 겉옷을 갈기갈기 찢은 후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은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갈지라. 주신 자도 야훼시오 취하신 자도 야훼시니 야훼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것입니다”(욥 1; 20-21)를 고백했으니 과연 그는 신앙으로 삶과 죽음의 벽을 뛰어넘은 동방최대 의인이요, 하나님 앞에서 노아 다니엘과 함께 구약의 삼대의인(三大義人; 겔 14; 12- 20) 중 한 사람이 될 만한 위대하고 큰 그릇이었으며, 지구촌의 대인이었다.

죽음에 무슨 순서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이별 슬픔에 무슨 가볍고 무거움이 있겠는가?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같은 이별과 죽음이라도 나를 낳아준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는 것이 내가 낳은 아들이 먼저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부모 죽음의 천붕과 차라리 내 죽음과 바꿀 수 있다면 바꿀 수도 있는 참담하고 비통한 자식 죽음의 참척이 모두 괴롭고 슬픈 일이지만 본능적으로 참척이 더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래서 병들어 죽거나 사고로 죽거나 전사, 객사의 죽음이 맘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녀 된 성도들은 휴거사건 외엔 부모보다 먼저 죽어서는 안 되고 특히 세상을 비관하고 자살로서 목숨을 끊는 참척은 부모 가슴에 못을 박는 천추불효요 지옥직행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 먼저 할 일이 있고 나중 할 일이 많지만 죽음만은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참척보다는 천붕의 순서를 따를 수 있길 축원한다.


                         성도의 ‘우선처사’ 십계

성도의 우선처사(優先處事) 십계, “성도들이 먼저 해야 할 열 가지 일”에서 “먼저”(First of all, 무엇보다 먼저, 우선적으로)란 히브리어 테칠라(“구멍을 내다”, “풀다”, “피리를 불다”)로 큰 벽을 뚫으려면 먼저 작은 구멍을 내는 것부터 해야 하고 어떤 일을 시작하려면 묶여 있는 것을 먼저 풀어야 하며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나팔을 불어야 하듯 먼저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고, 콰담은 선봉대가 “선행하거나 앞서가다”, 선발 돌격대가 “먼저 돌진하거나 쇄도해 가는 것”을 가리킨다. 그다음 갈대아어 리숀은 “처음, 첫째, 맨 먼저”란 뜻이며, 희랍어 프로톤, 프로이고, 프로디도미는 “앞에,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앞서가다, 자발적으로 주다”라는 뜻이다. 이제 하나님 말씀 성경이 가르친 ‘성도들이 먼저 해야 할 열 가지 일’을 알아본다. 

   1. 예배에서의 ‘먼저’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루셨음이니라”(히 7: 27)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 23-24)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 용서를 위한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기 죄 용서받을 속죄제를 드려야 했듯, 신약성도들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전에 먼저 자기의 죄를 회개하여 용서를 받아야 하고 사람과의 막힌 담이 있는 것을 풀어서 화목한 후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 용서를 받고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며,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 성령의 감동과 성령의 말씀 인도를 받을 수 있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다. 그러므로 예배 전에 그 동안 마음과 생각으로, 말과 행동으로, 물질과 시간을 잘못 사용한 죄와 이웃 간에 막힌 잘못된 관계로 지은 모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먼저 갖고 예배에 임하자. 그런 예배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 32)는 진리를 통한 자유함의 역사가 있고, 그런 예배에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 17)하신 성령을 통한 치료와 구원과 해방케 하는 자유함이 있다. 예배를 드리기 전, 모든 죄를 회개해 용서받고 하나님 만남의 예배를 드림으로 그 예배를 통해 병 고침과 저주의 쇠사슬이 끊어지는 역사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2. 영적전쟁 승리비결의 ‘먼저’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마 12: 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치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막 3: 27)

먼저 강한 자, 사탄과 마귀와 귀신들을 결박(結縛)하라. 그렇다. Satan would not permit a weaker one to defeat him(사탄은 결코 약한 자에게는 자기를 패배시킬 일을 허락지 않는다) 놀랍게도 마귀는 약한 자에겐 강하고 강한 자에겐 약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해야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할 수 있듯 성도들이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려면 먼저 강한 자인 사탄과 마귀를 결박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다. 내가 강할 때 마귀가 꼬리를 내린다. 내가 약함을 보이거나 나의 약점을 노출시키면 마귀는 귀신처럼 알고 떠나지 않으려고 버틴다.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요일 3: 8)은 삼년 반 공생애에서 한 번도 마귀와 타협하거나 마귀에게 양보한 적이 없었으며 언제 어디서든 마귀와 귀신들을 만났을 때 담대하게 마귀들을 꾸짖고 명령해서 사람들 속에서 쫓아내셨다. 그래서 그 방법을 배운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Resist him, firm in your faith; 벧전 5: 8-9)라고 했고, 야고보도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Resist the devil and he will flee from you; 약 4: 7)이라고 했다.

우리가 마귀와 귀신들을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이름으로 쫓아낼 수 있는 것은 1)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고 그 십자가로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마귀의 정체를 밝히 드러내시고 마귀의 무장을 해제시켰기 때문이다(골 2: 13-14) 그러므로 지금 마귀와 그 졸개들인 정사와 권세와 어둠의 세상주관자들과 귀신들은 한때 계엄군에 잡혀 네 개의 별이 떨어지고 이등병으로 강등됐던 정승화 장군과 같은 힘없는 존재요, 동물원철장 안에 갇혀서 포효(咆哮)하는 힘없는 사자와 호랑이에 불과할 뿐이다. 2) 믿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 때문이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In My name they will cast out demons)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막 16: 17-18)

당신의 영적전투 승리비결은 먼저 강한 자 마귀사탄을 결박하는 것이다. 응급환자가 생기면 먼저 Emergency Room으로 데려가 조치하듯, 가정이나 사업체 남편이나 자녀 그리고 육체와 정신에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생길 때, 상식을 벗어난 병이나 돌발사건이 생길 때, 그 사건의 영적배후가 사탄의 역사로 영분별이 되거든, 먼저 강한 자 마귀를 예수 이름으로 결박하라는 것이다. “이 문제를 나에게 가져온 사탄아, 예수 이름으로 묶임을 받을 지어다! 이 사건을 우리 사업체에 가져온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묶일 지어다!”

내 아들 에녹이가 어렸을 때, 뛰어 놀다가 코너 테이블에 부딪혀 입술이 찢어져 피가 쏟아지는 사고를 당했을 때, 손을 얹고 “예수이름으로 나음 받을지어다” 기도하므로 고침 받은 적이 있었는데 강한 자를 결박하는 이러한 영적전술은 장차 칠년 대환난에서 전 삼년 반이 끝나고 후 삼년 반이 시작될 때, 저 하늘에서 천사장 미가엘과 마귀와의 우주전쟁으로 마귀와 귀신들이 하늘별에서 땅으로 쫓겨 내려오는 대사건과 예수께서 천군천사와 휴거성도를 데리고 지상에 강림하실 때, 힘센 천사를 보내 마귀사탄을 쇠사슬로 결박해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가두는 세대종말적인 대사건 때만 있을 사건이 아니라 은혜시대인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날마다의 신앙생활 영적전투에서 예수 이름으로 강한 자, 마귀를 결박하고 정복해서 그들의 세간인 마귀사탄, 귀신들에게 고통과 피해를 입고 있는 존재들을 그 손에서 탈취하고 빼앗아 하나님의 소유로 만들어 드리는 신나는 기적의 역사들이 날마다 나타나기를 축원한다.            
   3. 일을 결정할 때의 ‘먼저’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보소서”(왕상 22: 5, 대하 18: 4)

북이스라엘 왕 아합의 청탁으로 유다 왕 여호사밧이 남북연합군을 만들어 아람과 전쟁을 시작하기 전,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무엇보다 먼저’ (First of all) ‘전쟁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지 물어보자’고 제안한다. 그때 아합은 미리 준비했던 어용선지자 400명에게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고 전쟁은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예언하게 했다. 그러나 마음이 불안했던 여호사밧이 재차 요청하자 선지자 미가야를 데려오게 했는데, 사마리아 성문 광장으로 끌려온 미가야는 ‘400명 선지자의 예언은 거짓말이라’ 지적하며 신랄(辛辣)하게 폭로하고 아합의 전사를 예언했는데 미가야의 예언대로 변장하고 전쟁에 나갔던 아합은 우연히 쏜 적군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선봉에 섰던 여호사밧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결혼이나 사업이나 학교진학이나 선교사역 같은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먼저 부부와 가족의 합심기도, 날과 시간을 정해 기도하는 작정기도와 철야기도, 새벽을 깨우는 새벽기도, 식음을 전폐하고 부르짖는 금식기도로 하나님께 물으라. 다윗은 문제 있을 때마다 야훼하나님께 묻고 진퇴를 결정하므로 야훼께서 어디를 가든지 이기게 하는 축복을 받았고, 사울은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달린 불레셋과의 전쟁에 하나님께 묻지 않고 신접한 무당에게 물었다가 저주로 세 아들과 함께 전사당했으며,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의 거짓 항복을 하나님께 묻지 않고 축복으로 받아드렸다가 지중해 연안 전쟁에 휩싸였었으며(수 9장)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는 왕궁 난간에서 떨어져 골정상을 앓게 되자 생사문제를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바알세불 우상에게 물었다가 죽음을 맞았다(왕하 1장)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중대한 문제를 결정할 때, 먼저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아 결정하므로 하나님의 축복으로 해결 받는 역사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4. 이웃 판단과 정죄 상황 때에 ‘먼저’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First, cast out the beam out of you own eye.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 4-5)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You hypocrite, first take the beam out of your own eye.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눅 6: 42)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 7)

들보(The beam, 도코스: “대들보, 통나무, 널빤지”)는 건물의 서까래로 쓰기에 적절한 무거운 목재로 “전체적인 진리를 거슬릴 만큼의 큰 허물이나 실수나 잘못”과 “고의성이 없는 잘못”을 상징하고, 티(The mote, 카르포스)는 “조그마한 나무 조각, 나무 부스러기, 지푸라기, 가시, 작은 알맹이”란 뜻으로 “전체적이고 대의적인 진리를 크게 손상시키지 않는 조그만 잘못이나 작은 실수”를 상징한다. 그래서 본문은 자신이 저지른 큰 잘못과 범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생활 속에 나타난 조그만 실수나 잘못을 비판하는 외식을 경계한 말씀이다.

대개의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약점과 실수보다는 다른 사람의 실수와 약점에 관심이 많고 그것을 비난하고 흉봄으로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예수를 통해 자신의 큰 죄를 사함 받고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내 죄 용서받은 은혜와 나를 용서하신 예수 사랑 때문에, 그리고 지금은 그런 죄를 짓지 않았지만 앞으로 나도 그런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고 내 자녀들이 그런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 때문에, 나와 자녀들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웃의 실수와 약점을 들추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미운 사람을 향해 손가락 욕을 해보라.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남을 욕할 때 세 손가락은 자신을 가리켜 욕을 하고, 엄지와 중지가 욕을 할 때도 세 손가락은 자기 자신을 지적해 욕을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 남을 판단하면 나도 판단을 받고 남을 정죄하면 나도 남들에게 정죄 받는다고 하셨고, 죄 없는 자가 먼저 그녀를 돌로 치라(Let him be the first to throw a stone at her; 요 8: 7)고 하셨다. 그렇다. 오늘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Who is without sin among you), 아나마르테토스(“범죄 할 가능성이 없을 뿐 아니라 실제로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 “죄의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무흠(無欠) 무죄의 온전한 사람”)만 간음한 자, 도적질한 자, 살인자, 흉악 범, 실패자를 향해 돌을 들어 칠 수 있다고 한다면 아직도 당신은 손에 돌을 쥐고 있겠는가? 이웃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비판하려는 유혹이 올 때, 먼저 자신의 부족함을 보고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는 지혜 있는 은혜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5. 전도와 대인관계에서의 ‘먼저’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마 10: 11-12)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Whatever house you enter, first say, 'Peace be to this house'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눅 10: 5-6)

몇 년 전, 내가 파키스탄에서 온 부흥사와 함께 인도(India)목사 가정을 방문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방안에 들어가 의자에 앉자마자 기도를 했더니 내가 기도를 마치자 인도목사가 “왜 목사님은 집에 들어와 먼저 기도를 하느냐, 무슨 기도냐?” 물어서 성경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평안과 축복을 비는 기도”이고, 한국 성도들은 누구나 그렇게 한다고 했더니 좋은 인사법이라며 자기도 인도 성도들에게 ‘평안기도’를 가르치겠다고 해서 은혜를 나눈 적이 있다.

예수님은 12제자와 70문도를 전도여행에 파송할 때,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발달한 큰 도시 아무 성이나 자연발생적으로 군집을 이루고 있는 조그만 촌에 들어가든지 천국 메시지에 영적으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자로서 복음전파자들을 친절히 맞아드릴 마음의 여유가 있고 복음을 받아드릴 순결한 마음을 갖춘 사람을 찾아서 그 집에 유하되 이집 저집 다니지 말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 머물고 전도하되, 그 집에 들어갈 때, 먼저 Peace be to this house!(이 집에 평안이 있을지어다)를 축복하라고 했다. 그리고 너희가 빌어주는 평안을 받을 사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가 축복한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그 평안이 돌아올 것이라고 했다. 제자들의 축복이 수용자의 태도에 따라 머물기도 하고 되돌아오기도 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이웃을 전도할 때나 일반적인 대인관계에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조건 없이 주님의 명령대로 이웃을 축복하고 평안을 빌어주는 축복의 사람이 되라.  

세상에서 둘도 없는 착하고 예쁜 며느리를 구한 축복과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내는 그 가정과의 은혜로운 교제도 내가 빈 평안축복에서 시작됐는데 나의 짧고 미천한 설교전도사 3년과 목회 44년 동안에 10개의 개척교회 목회와 700여회 부흥회에서 루디아처럼 성도가 원해서 머물렀던 집도 많이 있고 내가 그 가정의 축복을 원해서 의도적으로 성도의 집에서 머문 적도 많았는데, 부족한 김목사를 주의 종으로 기쁨으로 영접한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의 복을 받아 오랫동안 앓던 고질병이 고침 받은 사람도 있고, 불임의 자녀가 자녀생산의 축복을 받은 사람도 있으며, 사업의 문제해결과 여러 가지로 불리했던 법적문제가 해결 받은 성도도 있고, 농사가 잘된 사람, 가게가 잘된 사람, 결혼문제가 해결된 가정 등 축복을 받은 성도가 많이 있음은 지금도 감사하는 일들이다. 주의 종들을 집에 모시는 기회가 있을 때, 기생 라합이 정탐군을 평안히 모시므로(히 11: 31) 여리고 성에서 유일한 구원의 사람이 되고 정탐군 살몬의 부인이 되고 다윗의 고조모가 되는 축복까지 받은 것처럼 주의 종을 평안하게 모시므로, 주의 종이 빌어주는 평안 축복을 잘 받게 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6. 사명의 길을 선택할 때의 ‘먼저’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눅 14: 28)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눅 14: 31) 
      
본문은 사명자로써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자세를 교훈하신 말씀이다.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며 신학자, 부흥사, 기도원 원장이 되려면 망대를 세우는 자가 철저한 계획과 준비가 있은 다음 망대건축을 시작하듯 제자의 길이 안락한 신분이나 물질이 보장된 평탄한 길이 아님을 인식하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고, 전쟁터를 나가는 임금이 사전에 아무 각오나 준비도 없이 싸움에 임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수의 군사로 영적싸움을 나가는 사명의 군사는 사탄과의 영적전쟁을 치루기 위해 먼저 자신을 철저하게 중무장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아무 실력도 없이 뱃사람 깡만 믿고 태권도 9단에게 달려들었다가 불속을 날아든 불나방처럼 주먹 한번 휘둘러보지 못하고 허수아비처럼 무너져 깨진 후 도움을 요청해서 두 사람을 화해시킨 적이 있다. 아무 준비도 없이, 각오도 없이, 실력도 없이 덤비지 말라. 목사나 선교사 사명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아무나 되서도 안 된다. 김목사가 지나간 반세기 동안 보고 느낀 사실은 놀랍게도 영적전투에서 물질이나 지식만 준비한 사람은 철저히 망가졌고 패배했지만 영적인 준비로 말씀과 기도를 준비했던 사람은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사명의 사람은 먼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와 자기 목숨까지 미워할 각오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각오, 소금이 녹아야 맛을 내듯 자기 소유를 모두 내려놓고 포기할 각오가 서 있어야 하고, 부족한 예산으로 망대를 세우는 사람처럼, 적은 숫자로 많은 적군을 대항할 장군처럼 강한 영적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이런 준비로 은혜시대와 환난시대의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사역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축원한다.
   7. 교회 일군 세울 때의 ‘먼저’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Let these also first be proved)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딤전 3: 10)

딤전 3: 1-13은 어떤 사람을 장로와 남녀집사로 세우라는 목회지침 교훈이다. 바울은 젊은 목회자 디모데에게 장로와 남녀집사의 자격을 가르치므로 교회에서 일군을 잘 세워서 성육신하셨던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승천하시면서 당신의 피 값으로 지상에 세우신 경건의 비밀이요, 세상을 빛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진리의 기둥과 터인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져 가야할 것을 가르쳤다. 바울은 목사 전도사가 교회에서 장로와 남녀집사를 장립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들을 시험해보라(Let these also first be tested)고 가르쳤다. 그들의 신앙과 인격에서 건전한 가정생활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사회인지도까지 시험해보고 책망할 것이 없을 때 직분을 맡기라는 것이다.

목회 끝자락의 지금은 모든 욕심을 내려놓아 실수하는 일이 적지만 내가 교회성장과 목회성공 꿈에 부풀었던 젊었을 때, 일군 잘못 세우는 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군을 세우면 교회가 안정되고 빨리 부흥될 것 같아 서둘러 세웠지만 검증되지 않고 세운 직분자들 때문에 교회는 어려웠고 목회가 힘들어서 탈진해 교회를 포기하고픈 상황까지 가는 아픈 경험들이 있다. 서리 집사였을 땐 양처럼 겸손하고 헌신하며 순종 잘하던 사람이 안수집사, 장로가 되고 나자 하루 밤 사이에 목에 기부스하고 목소리까지 변해 한 옥타브 깔고 거만하게 말하며 불순종하고 자기들끼리 작당하여 문제를 일으킨다. 그래서 바울은 장로 안수집사 될 사람들을 먼저 시험해보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먼저 시험해보라”는 바울의 초대교회 목회칙서요 철칙이면서 21세기 교회일군세우기 지팡막대(지팡이 삼아 짚는 막대기)와 철칙이다.

   8. 대인관계에서의 ‘먼저’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 10)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와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는 물과 기름의 견원지간 원수였다. 그런데도 다나카는 명절만 되면 후쿠다의 최측근 참모 시오자와에게 500만 엔씩 떡값을 보냈다. 어느 날 시오자와가 물었다. “내가 당신을 죽이려 하는 것은 세상이 다 안다. 그런데 왜 내게 떡값을 보내는가?” 그러자 다나카는 “지금 떡값이라도 줘야 나중에 당신이 나를 칼로 열 번 찌를 때 아홉 번만 찌르지 않겠는가?”라고 대답했다. 물론 정치적 계산이 있었겠지만 아사히신문은 이렇게 배포 있고 통 크게 살았던 다나카를 ‘지난 1000년간 일본 정치영웅 조사’에서 4위에 올려놓았다.
링컨이 대통령 선거인단 1차 투표에서 102표를 얻을 때 상대후보인 정적 시워드는 173표를 얻었다. 2차 투표에서 극적으로 링컨이 전세를 뒤집었지만 선거에 패배한 시워드는 사사건건 링컨을 적대했다. 그런데도 링컨은 정적인 시워드를 국무장관에 앉혔다. 그리고 어느 날 밤 11시, 시워드 집을 찾아간 링컨이 고민을 털어놓고 대화를 했는데 그날 두 사람이 밤새 머리를 맞댄 끝에 나온 작품이 저 유명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게티스버그 연설이다. 링컨이 정적을 먼저 찾아가 사랑하고 먼저 관심을 보여 우애를 다지며 먼저 존경했기에 나온 위대한 작품이다.

국무장관 시워드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릎 쓰고 러시아로부터 159만 3,400평방km (4820억 350만평)의 거대한 땅 알래스카, 지구촌 천연자원의 최대보고를 1000평에 1.5센트를 지불해 당시가격 720만 달러의 헐값으로 사들여 미국 땅을 만든 미국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도 링컨이 그를 먼저 존경한 작은 사건에서 얻은 최대의 국가적 유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훗날 링컨이 암살당하자 “그처럼 탁월한 정치가는 없었다”며 링컨의 죽음을 가장 오래 슬퍼했던 사람이 시워드였으니 내가 먼저 사랑하고 우애하며 먼저 존경했던 인간관계가 이렇게 큰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내가 먼저 사랑하여 친절을 베풀고, 내가 먼저 손 내밀어 우애하며, 내가 먼저 대접하고 존경하므로 주기도문 교회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존경과 축복을 받는 교회가 되기를 축원한다.

   9. 하나님 사람의 관계에서의 ‘먼저’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해 만들라”(왕상 17: 13)

도저히 납득도 이해도 안 되는 상식에서 벗어난 Situation이다. 밀가루 한 움큼과 가지고 있는 몇 방울 기름으로 마지막 빵을 만들어 어미와 아들이 먹고 죽음을 기다릴 것이란 과부에게 ‘그것으로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해 떡을 만들라’니 이런 철면피 같은 억지가 어디 있는가? 낮선 이방인 엘리야에게 부침개를 만들어 주고나면 밀가루와 기름이 없는데 무엇으로 떡을 만드는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인정사정도 없는 언어폭력이 어디 있는가? 차라리 벼룩의 간을 빼서 먹겠다는 말보다 더 잔인한 언어폭력이고 살인폭언이다. 그러나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해 작은 떡을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After that, Afterward) 너와 네 아들을 위해 떡을 만들라”는 엘리야의 말을 되새겨 보면 거기에 축복과 기적의 비밀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엘리야는 사렙다 과부가 밀가루 한 움큼과 마지막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먼저, 하나님의 종인 자기를 대접하면 하나님께서 밀가루와 기름을 주어 과부와 아들이 먹을 수 있게 하심을 이미 응답을 받고 알고 있었다. 그렇다. 이것이 기독교 물질축복 비결 중 하나이다. 먼저, 하나님의 종을 대접하라. 이것은 결코 내가 목사여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44년 나의 목회에서 수많은 임상경험을 통해 100% 확인되고 증명된 말씀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얼굴에 철판 깔지 않은 맨 정신으로는 염치와 체면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주의 종 목사 잘 섬겨서 자녀들이 잘 되고 물질의 복을 받은 사례는 예수 믿어 병 고침 받은 기적만큼이나 많은 간증들이 있기에 주의 종들은 이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다. 

1977년 어느 날, 30대 중반의 부부가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기도하면 불면증도 고침 받나요?” 그들이 첫 번째로 내게 물은 질문이었다. 그날 신앙상담과 안수기도를 받고 돌아간 후 주일에 교회를 찾아온 부부는 “부인이 불면증으로 칠 년 동안 잠을 못 잤는데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고 그날부터 단잠을 자기 시작했다”며 이렇게 능력이 많으신 목사님께 기도를 받으면 부자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드는데 부자 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남편은 7-8년 전에 차력사범으로 미국에 들어와 2-3년 동안 도장운영을 하다가 그만두고 조그만 Grocery 가게를 하다가 Cash대에서 손님으로 들어온 흑인에게 다섯 방의 총을 맞았는데 창고에서 물건 정리를 하다가 피범벅이 돼 쓰러지는 남편의 모습을 본 부인이 심한 충격을 받고 불면증에 걸려 5년 동안이나 고생하다가 한 번의 안수기도(당시 신앙이 없던 그는 ‘부인이 기도 한방’에 낫다고 했다)로 씻은 듯이 고침 받는 것을 보고 부자 되기를 부탁한 것이다.

작은 체구에 차력사는 200kg의 역기를 이빨로 물어서 들어올리고, 냉장고를 빈 종이박스 옮기듯 사뿐히 들어 옮기며, 두 손으로 캔 콜라 박스 10상자도 거뜬히 들어 옮기고, 한 손으로 대형트럭을 끌기도 하는 역발산의 차력시범을 NBC, ABC TV 방송에서 보이므로 한때 그의 차력도장은 관원들로 가득 찼었고 소화불량, 두통, 신경쇠약, 척추 병이나 불면증의 웬만한 병은 차력으로 다 고쳐주었는데 자기 부인 불면증은 고치지 못하다가 안수기도로 치료를 받았기에 나를 믿고 부자 되기를 부탁한 것이다.

나는 그에게 부자는 사람이 만드는 부자와 하나님이 만들어 주는 부자가 있는데 하나님이 만드는 부자가 되려면(본인은 하나님이 만드는 부자가 되겠다고 해서) ① 반드시 주일을 성수할 것(주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예배에 참석하라) ② 십일조를 드릴 것(신앙생활을 처음 하므로 십일조를 몰라 ‘수입의 10%를 드리는 것’이라 가르쳤다) ③ 주의 종을 잘 섬길 것(목사가 가게나 가정을 심방하면 예배 후, 제일 좋은 식당으로 모시고 가 최고의 음식을 대접하고, 반드시 심방 감사헌금을 드리라) ④ 구제와 선교에 힘써야 한다고 했는데 부부는 ‘순종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들은 4만 7천불짜리 세탁소 하나로 시작해 5년여 만에 27만 불, 35만 불짜리 세탁소 두 개와 50만 불짜리 식당, 100만 불짜리 집을 구입하는 말 그대로 하나님이 만든 백만장자거부가 됐다. 그날부터 그들 신앙은 미련스러울 정도로 주일성수와 십일조 성수, 주의 종 섬김에 최선을 다했는데 어려운 가게매출에 십일조성수와 일주일에 한두 번 심방 때마다 최선을 다하는 심방감사와 목사 대접은 분에 넘칠 정도였다. 그러는 중에 교회생활 6개월 만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형편이 나쁜 아파트로 이사할 때, 목사인 나는 주일날 그들 얼굴 보기가 민망스러웠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으며 심방하는 내 심정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고 식당에서 대접을 받는 음식 맛은 모래알을 씹는 괴로움이었다.

처음에 4만 7천불짜리 세탁소의 하루매상이 270불이었다. 하루 5-600불이 돼야 현상유지인데 270불이니 다섯 식구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주일성수와 십일조성수를 한 후부터 매상이 오르기 시작해 심방 6개월 때 하루 매상 500불이 됐지만 수지계산이 모자라 열악한 아파트로 옮긴 것이다. 그 시험을 이긴 다음부터 매상이 수직상승하면서 신앙생활 1년 때엔 하루매상 1400-1500불이 됐는데 놀라운 것은 하루 종일 손님이 없다가 내가 심방을 가 예배를 드리고 나면 손님들이 옷을 자루로 메고 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목사님, 하루 한 번씩만 가게에 심방해 달라’(심방예배가 안 되면 차로 가게 마당만 지나가 달라)고 농담할 정도였다. 더 놀라운 것은 당시 다른 가게들은 손님이 없어 고생하는데 집사 가게는 잘된다는 소문이 퍼져 복덕방마다 ‘세탁소 팔라’고 졸라 교회 생활 1년 2개월 만에 세탁소를 17만 5천불에 팔고 25만 불짜리 세탁소를 구입했고 6개월 후엔 35만 불짜리 세탁소도 구입했다. 그 후 신앙생활 5년이 될 때까지 식당과 집까지 구입하는 백만장자가 되는 축복이 계속됐다.

먼저, 그것으로 주의 종, 목사를 섬겨라! 먼저, 마지막 종자돈으로 주의 종을 섬겨라! 먼저, 마지막 남겨 둔 물질로 주의 종을 섬겨라! 오늘도 어려움 중에서 주의 종을 섬기는 성도들에게 마지막 밀가루와 기름으로 엘리야를 섬긴 사렙다 과부처럼 자신과 자녀들이 축복을 받는 기작들이 일어나길 축원한다.    

   10. 일반적인 신앙생활에서의 ‘먼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 33)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내 일을 해 주신다” 그렇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 가정의 의식주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 이미 시작된 메시야 나라에 대한 복음을 듣고 순종하며 그 복음을 말과 행동으로 전파하기에 힘쓰라는 말이며,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하나님과의 내적관계를 돈독히 하고 외식을 피하며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항상 하나님을 염두에 두고 의식하여 선을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면 세상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는 말씀이다.
 
정치 9단, 야구 9단, 태권도 합기도 9단처럼 바둑의 최고수를 신의 경지라는 입신(入神) 9단이라고 부르는데 한국엔 프로기사 전체 254명 중 무려 22%나 되는 55명이 입신 9단이다. 바둑 초단을 수졸(守拙)이라 부르고 2단은 약우(若愚) 3단은 투력(鬪力), 그다음을 소교(小巧), 용지(用智), 통유(通幽), 구체(具體), 좌조(坐照)를 거쳐 마지막으로 신의 경지인 입신(入神) 9단이 된다.

일본 막부시대엔 입신 9단을 명인(名人)이라 불렸고 당대 한 명만 존재할 수 있어서 명인자리를 놓고 가문과 생명을 걸고 싸울 정도로 명예와 권위가 있었는데 한국은 프로기사 5명중 한 명이 9단이어서 명성과 권위가 약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실력이 약한 것은 아니다. 그 중 루이 나이웨이 9단, 박지은 9단과 함께 ‘여자 바둑의 트로이카’로 군림해 온 조혜연 9단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반상의 집 한 칸 질줄 모르는 바둑의 문외한이지만 나는 한국 여자프로기사 조혜연 9단을 좋아하고 아낀다. 여자로서는 사상 최연소, 남자까지 합해도 조훈현, 이창호 다음으로 세 번째인 조혜연 양이 18세 때, 여자바둑 사상 최강으로 꼽히는 루이 9단을 연파하고 여류국수와 명인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신앙을 철저히 지키는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무서운 속도로 실력이 늘어 전국대회를 석권하여 천재기사로 이름을 날리고 마침내 한국여자 바둑최강자로 떠오른 뒤 그에게 찾아온 신앙 갈등은 ‘주일성수’문제였다.

세계적인 큰 대회들이 주일에 열리자 조양은 스스로 세운 신앙법칙에 따라 일요일 대국을 줄줄이 거부했고, 마스터스 결승전까지 기권하고 마침내 국가대표까지 포기하자 사람들의 날카로운 비난과 핍박은 쓰나미처럼 그를 덮쳤고 그래서 그의 바둑 인생은 크게 요동친다. 조양이 국가대표를 포기하자 “이스라엘의 신을 위해 조국을 버릴 거냐?”, “너는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이단이다”, “한국기원은 배반자 조혜연을 제명하라”, “개 같은 년, 혜연”, “미친 년, 나쁜 년...”이라는 비난이 쇄도했다.

가족도 교회도 어느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세례도 받지 않은 교인으로 ‘엿새는 일하고 주일은 예배를 드린다’는 신앙법칙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해 오다가 믿음 때문에 마침내 많은 바둑기사들이 흠모하는 국가대표까지 반납할 정도로 모든 명예와Benefit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위한 박해와 능욕을 견디고 있는 천재여류기사, 오늘도 ‘승부사냐 작가냐’의 길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27살 조혜연 양의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그녀 신앙’이 하나님 앞에 존귀하고 아름답기에 한 번도 만나보진 못했지만 나는 그가 대견스럽고 사랑스러워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터에서 신앙을 지키는 그의 모습이 대견스럽다. 하나님께서 어떤 축복의 결론을 내려주실지 기다려지는데 신앙 때문에 받은 아픔의 흔적, 모든 명예를 포기한 신앙흔적은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이다.

바울은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From now on, Let no man trouble me, for I bear in my body ‘the marks of the Lord Jesus’-‘the brand-marks of Jesus’; 갈 6: 17)고 했다. 소나 양에게 불도장 낙인(烙印)을 찍어 소유주를 나타내는 흔적의 소인처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한 수많은 고난과 핍박, 수많은 위험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란 낙인이 찍혀 있음을 자랑했던 바울처럼 오늘 당신은 예수를 위한 자랑스런 불 낙인자국이 당신 몸에 있는가? 주일성수를 위해 핍박을 당해본 적이 있는가? 십일조성수와 선교와 교회 충성을 때문에 고난을 겪어본 낙인자국이 있는가? 예수 때문에 매 맞고, 예수 때문에 욕먹으며, 신앙 때문에 죽음의 위기를 당하고, 주일성수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난 예수의 흔적(The brand mark of Jesus)이 당신 몸에 있는가? 

이제 오늘 우리도 먼저 할 것을 먼저하고 나중 할 일을 나중에 하는 지혜로운 신앙의 사람, 신실하고 충성된 축복의 신앙인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 목사(워싱톤주기도문교회)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뉴스스크랩하기
김엘리야칼럼섹션 목록으로
 

이름 비밀번호
 96706873  입력
댓글콘선택 : 댓글 작성시 댓글콘을 클릭하시면 내용에 추가됩니다.
[1]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김엘리야칼럼
다음기사 : 주의 날과 성령의 감동 (2012-01-05 18:22:33)
이전기사 : 후반전의 인생승리 비결 (2012-01-02 19:31:33)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회사소개 보도지침 저작권 규약 이용약관 사업제휴 직원채용 광고후원 기사제보 연락처 don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