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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9일 06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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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참빛칼럼]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참 세상살이는 역시 쉽지않다. 신자와 불신자의 관계 못지않게 신자와 신자들과의 관계도 역시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들쑥날쑥한 언덕과 골짜기들을 평평하게 하시는 방법으로 고난의 묘약을 사용하시는 것이리라

신앙도 각기 이해도에 있어서 정도가 다르기에 상대적으로 서로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피차 긍휼겸손이 있으면 관심이 가게되고 또 이해의 방향으로 서로 노력을 경주하게 되는 것이라 믿는다.  여담으로 크리스찬으로 살려고 발버둥치면서 느껴온 것인데,  깔끔하고 산뜻하고 세련되게 사는 방향에서 주님의 마음을 닮으려 할수록 나도모르게 이상하게 자꾸 구질구질하고 끈적하고 촌스럽게 살게되는 것 같다. ..그런데 싫지않다

사고방식과 행동에 있어서 아무리 서로들 차이를 느끼고 지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오신 차이에 비할수 있으랴고통은 역시 신앙인격 연마에 필요한 도구이다.  품위있고 산뜻하게 믿음생활을 했던 욥은 정말 밑바닥까지 떨어지도록 극심하게 추한 고난을 통과하고 나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고 엑기스적인 신앙고백을 하였다. 

고난 후에 욥의 신앙은 비로서 지식에서 발전하여 체험이 되고 생명이 된것이다.  우리도 인생의 불 도가니를 통과할때에야  요한의 기록처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듣는데서 보는것으로 실재적이고 경험적인 수준으로까지 오를수 있다고 믿어진다.  이때 신앙은 체험이되고 살아있는 생명이 된다.  

 나의 경우를 보더라도 옛날엔 머리로만 짐작했지만 요새 더욱 가슴속으로부터 새록새록 깨닫게 되어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수그리고 들수밖에 없는 부득이한 동의는, 자신의 삶이 깔끔한 일사천리의 탄탄대로로 진행 되어오지 않고 너무도 나의 기대와 본성과는 맞지않게 거북하기 이를데없는 울퉁불퉁한 고된 체험으로 점철되어 온것이 결국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의 경륜이요 은혜라는 각성이다. 

그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필자에게  주신 귀한 선물은 늘 성령의 사람들을 존경하고 성령을 사모하게 되는 마음이다.  예수님을 본받아 40 금식기도를 시행한 분들을 참 깊이 존경한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자신이 늘 하나님께 죄송하고 부끄럽게 느껴진다.

또 이러한 분들이 체험하는 여러가지 신비로운 성령의 역사에 대해 늘 감동하고 부럽게 느낀다. 이런 분들에게는 남다른 투철한 사명감과 통찰력이 있고 역동적인 성령의 충만한 에너지가 삶을 생기있게 이끌어가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분들중에는 때로 개성이 너무 강하게 튀고 남녀구분 없이 평균이상으로 강인하고 꿋꿋한 성격의 소유자들도 많은데 이 분들의 은혜의 간증을 듣노라면 하나님께서 선히 쓰시는 이 분들의 장점이 느껴져  어느 새 품었던 선입관이나 개인적 기호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도리어 친근감이 들고 존경스러워진다.

또 한편으로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 못하는 영적세계에 눈이 뜨여서 많은 반목과 난관이 있겠거니 헤아려져서 주제넘은 연민도 생긴다.  그래서 때로는 석연치 않은 표현이나 어휘구사에도 그 표현자체 보다는 이면의 뜨거운 마음의 중심이 읽어지니 감동이되고 어떤 훈계도 아멘으로 달게 받게된다. 

이러한 나를 가상히 보셨는지 영적 세계에 대한 체험이 매우 일천한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셨다.  너무도 소중한 주님의 임재의 신비의 체험을 하게하셨던 것이다.  주님께서 날 찾아와 주셨다.  높으신 주님께서 몸소 친히 낮고 천한 이 몸을 방문해 주신것이다.  할렐루야!  지금도 그 체험을 떠올릴때마다  얼마나 감사가 되고 위안이되고 기쁨이 되고 활력이 되는지 모른다.

혹자는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는데 어떻게 외부에서 별도로 우리를 방문할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답변은 이렇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다.  하나님의 속성에 초월성과 내재성이 들어있음을 이해한다면 주님의 영의 방문이 그리 문제가 될리가 없을것이다. 예수의 영은 우리 속에도 우리 사이에도 우리 밖에도 우리를 넘어서도 계시니까 말이다. 

영안이 열리고 비전이 열릴때 성령님이 찾아오셨다는 표현을 하게되는데 이를 3차원적인 물리적인 현상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럴때 오컬트(Occult)’라는 세상적인(심령과학적) 표현을 합당치않게 쓰게되는 것이다.  오컬트는 초자연적인 영의 역사(役事)를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코드로 연구하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라 할지라도 일반적으로 인본주의적인 불신자의 관점에서 보면 오컬트가 되는 것이고 이방 종교들에게도 역시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다빈치 코드는 인본주의적 상상력으로 예수를 풀어낸 소설이며, ‘리차드 도킨스‘The God Delusion’ 역시 인본주의적 코드로 하나님의 존재를 비판한 무신론적 비판서이다.    

그러나 성경속에 일어난 성령의 역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영의 역사이므로 전심으로 구하고 찾는 자에게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통하여 오늘날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의 빛인 성령의 역사를 영지주의나 불교의 각성으로 표현하는 것 역시 무신론적인 인본주의의 관점이므로 크리스찬으로서는 상식밖의 일이다. 

하늘로부터 비추이는 하나님의 광명의 역사의 언급은 예루살렘 구원을 위한 다니엘의 중보기도에도 (“…우리 하나님이여 지금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취시옵소(9:17)”), 시편에도 (67:1), 미가서에도 (7), 다메섹선상의 사도 바울부터 시작해(9:3) 2차 대각성운동의 주역인 찰스피니’,  낮은 곳에 임하소서의 주인공 안 요한목사님등 크리스찬이라면 누구에게나 열려져있는 성경적인 성령의 역사이다.  하나님은 빛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이다(1:17)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18)”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자(16:18)  또 다른 제자들에게도 하신 말씀으로 크리스찬들이 가진 기도의 열쇠로 이해할수 있다. 기도의 능력에 의해 하늘의 영역과 땅의 영역의 교통과 통일이 이루어지는 영적원리를 함축하고있다.

한편, 크리스찬들이 열방을 깨우는 주의 종이 될지어다 (혹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지극히 사명감 고취를 기원하는 축복의 기도가된다. 말씀을 전하는 여종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와  염원의 표현으로 열방을 먹인다라든가  열방의 어미라는 표현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의 이름의 뜻이 열국의 어미이기도하다.

크리스찬의 자랑스런 신분은 다름아닌 개인이라도 얼마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대표성을 띌수 있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자 천국 복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대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도 제자들에게 주님보다 더 큰일도 하리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14:12). 

그러므로 한 개인의 눈물의 간절한 기도로 불신의 땅과 불신의 백성에게 어둠의 세력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담대히 말할수 있으며 이에 준한 여러표현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표현을 두고 참람하다거나  영적 환자라던가 과대망상증이라 표현하는 것은 매우 몰이해적인 유감스런 망발이라 아니할수 없다.

사실 참람하다라는 표현은 신성모욕(blasphemy)을 뜻하는 것으로 예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때에 중풍병자를 향하여 죄 사함을 선포하시자 서기관들이 사람인 예수가 하나님의 신성에 도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한 개탄의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하는 일을 그들도 하고 그보다 더한 일도 하리라는 예언에 대해서도 그 시대의 서기관처럼 참람하도다라고 탄식을 해야 옳겠는가?

여기에 바로 문제해결의 열쇠가 들어있다. 이에 관한 내용은 필자의 이전칼럼인 사도와 예언의 본질성에 자세히 설명을 하였으므로 여기선 생략하고자 한다.  요컨데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주님이 가지신 권세를 위임받은 그리스도의 대사(Ambassador)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도를 깊이있게 많이 하는 분들에게 성령께서는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시는 것을 얼마든지 목격할수 있다.  비단 미국의 금융위기 뿐만이 아니라 전쟁이나 천재지변, 또 나라나 개인 신상에 관한 메시지도 얼마든지 받을수 있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고 사명감이 충만한 리더에 대하여 자신을 선지자로 이해한다거나 선지자로 믿고있다거나 선지자적 정체성을 가졌다거나 망상에 빠졌다고 비난하는 안목은 신앙의 핵심적이고 본론적인 주된 가치보다는 선지자 라는 전통적인 고정관념에 매여서 비본질적이고 지엽적인 것에 온통 관심을 소모하는 우를 범하는것이다.

초보단계에서 벗어난 크리스찬이라면,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심경에 비례해서 시간이 갈수록 점점 요한계시록에 관심이 기울어지고 좋아하게 된다.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종말과 우리의 본향과 구원받은 자들이 누릴 천국의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 하신 주님은 이를 이상히 여기는 제자들에게 의심하지 않는 믿음만 있으면 산더러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그대로 된다고 말씀하셨다( 21:21). 믿음으로 가득찰때 우리는 환경을 지배할수 있고 환경을 변화시킬수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환경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요셉이 그러했고 다니엘이 그러했으며 베드로가 그러했고 바울이 그러했다.     

필자는 과거 미국으로 오게된 몇가지의 이유가 있었는데 가장 지배적인 이유중 하나는 불교적인 색채가 너무 강한 모국의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예를 들면 테레비를 켤때마다 사찰의 경내가 화면 가득히 나오는 것이 너무도 괴롭고 거부감이 일었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 집을 구하러 다니다보니 집안에 힌두교의 이상한 그림이 걸려있거나  우상숭배적인 향 냄새가 날때마다 보통 고역스런 것이 아니어서 구토증마저 일어났다.  그래서 그런 집은 아예 들어가는 것 조차 피하게 되었다.

그러다 얼마 전 영분별의 은사가 뛰어나신 어떤 선교사님이 중보기도 모임을 인도하면서 개인 안수기도시 구토를 많이 하시는 것을 보고는 반가운 생각이 들어서, 구토의 이유를 묻자 설명하시길 기도받는 사람 안에 대물림하는 우상 숭배의 영이 들어있을때 그 더러운 영이 나가면서 선교사님을 거쳐가기에 구토증이 일어난다고 설명하셨다. 그러니 의문이 풀렸다.

요사이 비판의 목적으로 성령충만한 강의내용을 부스러기로 떼어다 버젓이 공개핍박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것이 매우 안타깝고 우려스럽다. 그러다보니 기독신앙의 내용에 난데없는 영지주의니 오컬트니 뉴에이지니 하는 꼬리표들이 따라 붙게되었다(그러므로 비판용으로 올린 사이트를 링크해서 꼭 강의를 들어보아야 한다).

그러나 오컬트를 비롯해서 영지주의나 뉴 에이지는 전혀 기독신앙과는 근본 번지수가 다른 사상이다.  영지주의나 뉴에이지는 이원론적인 사상이므로 기독교 신앙과는 신론과 창조론부터 근원부터가 다른것이다(이전 칼럼 뉴 에이지와 성령참조).  다른 복음이니 다른 영이니 다른 예수는 그러기에 이를 두고 바울이 경계한 것이다. 

그러나 오컬트에 관해 전술한 것처럼 뉴에이지나 영지주의에도 신성적인 요소가 포함되므로 다분히 얼마든지 기독교 영성과 유사한 표현이 들어있을수 있다.  환언하면 성령 체험의 묘사에도 얼마든지 영지주의나 뉴에이지에서 보이는 표현이 들어있을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기독신앙의 신학체계가 이들 사상과는 전혀 근본적으로 다른것임을 전제하고 이해를 해야하는데 억지로 누명을 씌우듯 오해를 하게되는 것은 비판자의 성령역사의 이해와 체험의 부족에 결정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이단의 경계를 촉구한 사도 바울과 같은 영성이 일말이라도 구비되었다면 모르겠는데 그러한 심오한 영적체험과 능력이 결여된 상태에서 뉴턴식 기계적 결정론적인 3차원적인 신학의 코드로  4차원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해 분별을 하고 비판을 가하려니 많은 부작용이 따를수밖에 없다.      

그런데다 이들이 비판하는 대상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세째하늘인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표현될수 없는 지극히 큰 계시와 환상을 받았던 사도바울에 버금갈만한 영성체험적인 리더들이 대부분이니 말이다. 정말 비판하고 싶으면 차제에 40일 금식기도 실시 후 하여도 손해가 되지 않을것이다.

판단자료의 실질적 내용이 부족하다보니 자연 판단기준에 학벌등의 외형적 조건을 따지기도 하는데 실제 그렇게 따지는 이면에는 학벌에 대한 관심보다는 학벌의 미비등을 조건으로 이용해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삼는것이다.

그러니 어떤 이에게는 졸업장을 문제삼고 통찰력을 구비하여 자신들이  새겨들어야하는 혹자에게는 박사학위까지 받았는데도 하는 식으로 전혀 조리에 맞지않는 아전인수격인 비아냥이 나오는 것이다. 

반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영적 체험이 풍부한 이들에겐 상대적으로 그런 모습을 찾기가 힘들다.  주로 외부에서 시비를 당하는 경우는 있지만 구태여 변명하거나 같이 맞대응하길 꺼린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성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그분들을 위해 기도를 해야지요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탄식할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체험의 입문에 들어가 늘 사모하는 마음만을 간직하고 있는 필자와 같은 뉴멤버를 통해 중간 전달자의 역할을 하게 하시는지 모른다. 감사한 일이다.   

설교나 강의 내용을 인터넷에 띄워 비난과 자칭 경계용이든 어쨌든 알리려고 하는 부정적인 관심사도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마련이어서 암암리에 성령역사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키기도 하니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그 누가 헤아릴수 있겠는가?

우리는 주님의 눈을 가질수 있기를 기도하여야한다.  주님과 제자들이 여리고 성을 떠나실때 많은 사람들이 따랐는데 길가에 앉은 소경둘이 예수께서 자기들 앞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는 소리를 지르며 외쳤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이때 주위 사람들이 이들을 꾸짖고 조용하라고 하였지만 이 소경 둘은 더욱 더 소리를 질러 주님께 부르짖었던 것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마침내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저희에게 물으셨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들은 대답하길

주여 우리 눈뜨기를 원하나이다

이에  예수께서 연민이 가득차셔서 저희 눈을 만지시니 시력을 찾게되어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20:29-34)

이 말씀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우리는 진정 세리와 같은 기도를 드려야한다.  체면이나 남들의 이목을 생각지 말고 방해가 있어도 한결같이 주님을 향하여 성령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전심으로 부르짖어야한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영의 눈을 뜨게 하소서!!!”

 더 이상 주님을 우리의 주변에만 머무르시게 하거나  스쳐 지나가시게만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부르짖음으로 주님의 이목을 집중시켜 주님의 임재함 속에서 주님과의 일대일의 교제로 바짝 들어가야한다.

그래서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영의 눈이 열려져서  주님의 눈으로 비전을 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열방을 품고 주님을 따르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될수 있어야한다. 



박현숙 목사(프린스톤참빛교회 담임)
http://blog.naver.com/kishijy/90069769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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