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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9일 05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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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참빛칼럼]패러다임 전환(후편)

필자가 목도한 기독교 사회안에서의 가장 큰 병폐를 말하라면, 주저없이 집단 이기주의세력주의를 들것이다.  굳이 라인홀드 니버의 통찰을 빌리지 않아도 개인적인 양심은 집단으로 옮겨갈수록 둔화되고 이기적으로 변해가게 되는것 같다.

그런데 기독신앙의 불변의 핵심적인 가치는 개인이다.  개인이 구원받고 개인이 예수님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16:31)”의 말씀은 개인이 영향을 주어 가정과 사회를 변화시켜 구원받게 할수있는 구원의 연쇄적 가능성을 선포한 것이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개인이 타자나 집단을 대표해  타자나 집단을 대변하거나 개인의 이름으로 타자나 집단을 자동 구원시킬 수 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회안에서 개인과 집단의 관계는 잘 구분되고 정돈이 될 필요가있다.  한편, 기업이나 정당같이 이익을 추구하는 사회 집단이 아니라 학교나 의료, 법조계, 종교같이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 집단의 경우엔 개인이 집단의 이미지에 끼치는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매우 크게 보인다. 왜냐하면 개인에 대한 이미지가 그 집단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에 대한 이미지에 바로 직접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퇴색되지 않고 가장 고유한 가치를 고수하고 있고 또 그래야만 하는 부문은 당연 신앙집단이므로 신앙인이 신앙집단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상대적으로 지대한 것을 부인할수는 없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위험한 함정이 놓여있다. 

왜냐하면 기독신앙의 핵심적 가치인 개인에 대해 부정적인 가치평가가 발생할 경우 그 개인이 집단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해 개인적 가치평가 자료가 은폐되거나 조작될 우려가 상대적으로 농후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핵심적인 가치인 개인성이 유실되고 집단세력이 개인성을 대체하게 되면 신앙의 핵심적인 가치도 함께 실종되고 마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 비리가 축적되어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집단의 가치는 자연 알맹이 없는 껍데기 - 환영에 불과하게 될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곳곳에 자기만 먹이는 목자들이나 삯군 목자로 표현하며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다.  

필자는 과거 교회생활을 통하여 부정적인 가치평가를 산출한 신앙리더가 미리 자발적으로 허물을 벗듯이 자신의 개인적 가치성을 자진 파산하고는 계획적으로 소속 집단속에  뛰어들어가 집단의 세력을 업고 한 연약한 개인을 향하여 집중다발 사격을 가하는 것을 목도한적이 있다.

이런 예는 매우 극단적인 경우겠지만, 마치 암 세포가 오랜 잠재기간을 거쳐 어느날 갑자기 활성화되어 세포증식을 하는 것처럼, 신앙 사회안에 오랜세월 잠재되어 왔던 가치전도의 기류가 어떤 한 개인을 통해 일시에 표출되었던 병리현상이라 진단이 된다.   

에리히 프롬은 정치같은 이익집단에서는 강한 자가 열세한 자에게 선제공격을 가하는 것이 승리를 쟁취하는 방법이라 했는데, 교회사회라는 가치 집단에서 이런 일이 자행되는 것을 경험하고는 크게 충격을 받았었다.  그 후 신앙인 그리고 신앙사회의 가치와 허구성에 대해 진지하게 사색하고 고민하지 않을수 없었다.

교회사회는 정치사회나 경제사회의 속성을 답습할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 그렇게 느껴지는 기류가 형성이 되고있다면 뭔가 중요한 본질이 타격을 입고 있기 때문인것이다.  개인적인 이기심에 대해서는 한껏 경종을 울리지만 집단적인 이기심에 대해서는 교회적 특성에 의해 무감각해온 이유에서 일까?  

 어느 덧 니버가 지적한 문제가 신앙사회 일각에서도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분위기가 되어가고 있는듯 하다.  그러고보면 현대 교회사회의 문제점은 가치 집단이 이익 집단화 되어 가는 현상이라고 볼수있는 바, 한마디로 가치의 전도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는 어느 때 보다 신앙의 가치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그러러면 신앙집단이 우선 집단적 가치성에 우위를 두기 전에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적 가치성을 면밀히 점검해 보아야 할것이다.  개인적인 가치성에의 점검은 곧 신앙의 핵심적 본질로의 회복을 의미하는데 이는 말씀에 입각한 아가페적 사랑의 회복을 말한다.

요사이 연일 교계뉴스를 물들이고 있는 이단시비 논쟁 기사를 대할때에도 필자는 과거 불행한 경험때문인지 몰라도 우선 집단 이익에 관한 싸움이 아닌가를 의심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사실 이민 교회가 처해있는 특수하게 예민한 상황에서 어떤 독립된 신앙단체가 기성 교회들과 연관해서 사역을 벌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문제를 제기하고 진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상대에 대한 인격적인 존중이나 예의를 갖추고 시간을 두고 주시하기 보다는 섣부른 인신공격이나 선입관적 매도같은 집중포격적 성향이 짙게 배어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개인 가치가 집단가치로 급속히 전환되어 가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즉 든든한 후원그룹이 있다는 것이다.

이단에 대한 경계는 성경에 나온것이데 요즘의 풍토를 보면, 이것이 세월이 가면서 조직을 형성해 압력단체로 위상을 굳히고 자리를 잡아가게 된것같다.  그 과정에서 자연 집단 이기주의적 요소가 한몫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선교단체와 관련한 이슈에 대해 최근의 추이를 보면 문제가 일단락되고 해결단계로 들어가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간듯 강도를 높여 여기저기 문제제기를 하는 움직임을 보면 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세속 정치인의 모습에 오히려 가까워보인다.

하물며 겸손히 정정의사를 밝힌 선교 단체장을 도와 교회사회에 덕과 귀감이되는 방향으로 협력사역을 피려는 목회자들을 음으로 양으로 돕기보다는 편을 가르고 이간하고 비난하는 여론을 조장하는 행위는 보기에 매우 딱하고 유감스럽다.

시간을 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고 기다리거나 도우려는 자세보다는 성급히 감시하고 단속하고 압박하려는 자세는 지양되어야하며, 또 다소 부족한 면이 있는 상대라 할지라도 전반적인 신앙적 역량에서 인정할만한 것은 인정해야 한다.     

또 요사이의 이단시비 내용을 보면, 과거 영지주의 이단과 같이 신론이나 기독론, 구원론등에 있어서 정통교단과 명확한 차이가 나는 내용이 아니라 대부분 주해나 성령론, 혹은 선교론적으로 이해가 엇갈리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또 간과할수 없는 문제점으로, 개인가치가 집단가치로 전도되는 역리 현상이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신학적 이론에도 등장되었다는 점이다.  즉 공유될수 있는 영성적인 요소가 무슨 무슨 파로 명명되어 낙인이 찍히게 된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베레아파신사도파아이합 파니 하는 카테고리화 붐이다. 

이런 현상은 신앙을 유기적 생명이 아닌 죽은 교리로만 이해하기에 나온 부작용이다.  한 마디로 인격적인 성령님께서 이런 곳에도 계시다면 이런 name tag을 붙이실수 밖에 없게 된것이다.  너무도 조심이 없다!  알곡을 위해 가라지를 뽑지 말라시는 예수님의 지혜를 입체적이고 넓은 안목에서 묵상할 필요가 있다.

정말 우리에게 겸손과 사랑이  있다면 우리도 예수님의 지혜를 배울수 있을 것이다.  디모데 전서에서 사도 바울은 당시 영지주의적 거짓 교훈을 경계시키는 목적이 사랑이라고 피력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출처는 청결한 마음선한 양심거짓없는 믿음이라고 설명한다(1:5). 

이익을 방편으로 생각지 않는 순수한 동기의 믿음이 거짓없는 믿음인데, 이 믿음은 착한 양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한다(:19).  그러기에 신앙사회의 가치회복을 위해서는 양심의 영역에 개인적 양심만이 아니라 신앙 사회적 양심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개인 가치가 집단 가치에 편승하여 개인 양심의 실종이 생기는 이유는 양심을 개인적 영역에만 국한시켜온 탓이다.  이에, 개인 양심을 신앙 사회적 양심으로 연결지어 확대해 나가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신앙사회의 상대적으로 낙후된 윤리성은 개인 양심과 집단 양심과의 분리 혹은 합병현상으로 인해 가속화 되온 셈인것이다.

이것은 세력주의를 만들어 음성적이고 퇴폐적인 가십거리의 온상이 생겨나게 하고, 이런 문화는 자연, 소수에 대한 다수의 폭력과 약자에대한 인격모독, 그리고 과거 성차별의 흐름으로도 이어져왔다.  가장 가치기준이 높아야 할 신앙 사회 안에서의 이런 현상은 자연 집단가치의 존폐위기를 맞을만큼 심각한 문제가 되고도 남는다. 

신앙에서의 궁극적 가치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개인가치가 집단적 가치에 의해 소실되지 않고 또 그런 은폐와 모함의 방편으로 오용되지 않고 건강하게 공존하여 나가는 길은 바로 책임적 연대의식의 회복으로 열릴수 있다고 본다. 연대의식은 형제를 사랑하고 연민하므로 형제의 죄를 대신하여 아파하며 회개하는 중보기도의 영성이기도 하다. 

이것의 회복이 바로 오늘 날 교회사회가 이루어야 할 패러다임의 전환인 것이다 .  이미 통시대적인 절대 진리에 입각하여 가장 완벽한 패러다임 전환을 주도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신앙을 도와야 할 신학이 본분을 잃으면 한갓 외식적 이데올로기가 될것이다.  건강한 신학의 부재현상이 가속화 되어가는 한인 교회사회에 신학이 죽지않고 살아있으려면, 정말 예수의 생명으로 신학이 거듭나야한다. 


박현숙 목사(프린스톤참빛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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