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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9일 05시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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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참빛칼럼]패러다임 전환

허리케인의 중남부 뉴저지 상륙예정일 하루 전 아침나절에 남편이 책상앞에서 일을하다가 느닷없이 가라앉은 음성으로 신속히 어떤 말을 하였다.  대개 중요한 말을 그는 알아듣기 어려울정도로 조용히 빨리 말하는 습관이 있는데 난 가는 귀를 먹은사람처럼 평상시 사람들의 작은 음성을 잘 못 알아듣기에 직감적으로 황급히 되묻지 않을 수없었다. 

내용인즉, 남편은 1999년도인가 십여년전에 에디슨 근처의 직장에서 집으로 오는도중에 큰 물난리를 만나 곤혹을 치루었던 일을 상기시켰다. 나는 당시 어린 아이들과 집안에 있어서 바깥사정을 몰랐는데 그는 퇴근 후 귀가중 도로가 폭우로 홍수가나 없어진 바람에 차를 가까스로 천신만고끝에 언덕 꼭대기에 세워놓고는 구사일생의 심정으로 겨우 귀가했던 악몽의 경험을 하였던 것이다. 

그때 일을 언급하면서 하는말이 우리의 아파트가 커낼(canal)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홍수의 위험성이 농후하니 허리케인의 경로를 피해 내륙쪽으로 차를 몰고 떠나는것이 어떠한가 하는 의견이었다.    

듣고보니 걱정이 되어서 나는 도리어 빨리 떠나자고 독촉까지 하게되었지만 아이들은 우리의 염려와는 아랑곳없이 너무 느긋한데다 내심 허리케인을 잔뜩 호기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눈치들마저 보였다.

그래서 난 정색을 하고 큰 아이에게 이럴때일수록 가족이 모여 기도를 하는것이 필요하다고 하자 아들은 아무일도 없을거라고 장담을 하면서 느닷없이 옆에앉은 여동생을 쳐다보더니 나는 널 사랑한다. 너는 나 사랑하니?”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을 본후 하는 말이, “부모님은 절 물론 사랑하시고 저 또한  부모님을 사랑하니 허리케인이 와서 죽는다해도 전 아무 염려가 없어요라고 초탈한듯이 태평히 미소까지 띄며 말하는 것이아닌가?

순간 이런 천재지변의 기회를 아이들을위한 신앙체험의 기회로 활용할겸 특별예배를 보도록 유도하기위해 잔뜩 힘을주고 벼르고있었던 엄마인 나는 별안간 의식의 허가 찔린듯 말문이 막혀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엉뚱한 녀석이다그런데 듣고보니 깊이있고 핵심적인 진리처럼 느껴지는 말이 아닌가녀석의 표정 또한 너무 천연덕스럽게 편안하고

저녁이되어 집안에 네 식구가 모여있는데 양초도 하나밖에 없었고 TV도 없고 인터넷도 없는지라  오래된 라디오 하나를 거실에 내놓고 의지할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몸이 들썩한것처럼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좁은 거실과 현관사이를 맴도는 수상쩍은 두 아이들에게 우리는 나가지말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남편과  떠날지말지하는 문제로 잠깐 대화를 하는 사이에 두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듯 재빨리 집안을 빠져나가버렸다. 

내게는 부지불식간 아이들의 지각없는 의외의 행동이 너무도 실망과 충격이되었다. 그런데 남편은 알고도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너무도 잠잠히 책상앞에만 앉아있었다.  순간 남편에대한 원망이 솟아났다.  좀전에 남편은 아이들에게 나가지말라는 말을할때도 평소처럼 전혀 심각하지 않은 태도로 얼굴에 웃음끼까지 머금지않았던가? 가장의 권위와 부모의 권위가 이렇게까지 땅에 떨어져서야 되는가…?  그리고 이 아이들은 도대체 위험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마저도 없단말인가? 

아이들은 조금 후 이십분 만에 돌아왔지만 그 동안이 내게는 지옥처럼 고통스러웠다. 또 예의 어지러움증이 몰려오고 최근 진맥을 받고는 스트레스 문제에대해 경고를 들은일도 있는지라 자신을 추스리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이런 내게 과연 믿음이 있는가 하는 의문마저 생겨날 정도였다.

아이들은 들어오자마자 들리지도 않게 변명처럼 신발을 벗으며 몇마디를 중얼거리고는 바람처럼  조용히 신속하게 제방으로 사라졌는데 그 일련의 과정이 전개되는 동안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내게 전해지는 것이었다. 어딘가 내 속에 진한 후회의 감정이 진솔히 파고들면서 말이다. 

그것은 남편과 아이들을 원망한 것에대한 미안함과 자책감이었으며 자신의 고정관념에 대한 부끄러운 자각이기도했다.  뒤늦게나마 아이들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는 남편의 인내와 아량이 가치있게 생각되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제 의지를 통해 산교훈을 얻었을 값진 체험에 대한 소득이 비로서 이해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강도높은 영상과 소음으로 단련된 세대라지만 여느때랑 달리 인적없이 위기가 감도는적막하고 캄캄한 동네에서 곳곳에 물이 불기시작하는 거리를 보았을때 저들은 분명 재난의 위험에 대한 두려움내지 불안한 무언의 무엇을 피부로 절감했으리라

다른날보다 더 신경을 써서그런지 그날 밤따라 유독 일찌기 쿨쿨 깊은 잠에 빠진 가족들가운데 나 혼자 거실에서 지역방송의 허리케인 예보에 귀를 기울이며 밤을 지샜다. 인근 바로 옆 동네들은 새벽 두어시에 벌써 전원이 나갔다고 하는데 내가 있는 곳은 밤새동안 전력의 이상이 없었고 커넬에 인접한 일층 베렌다의 뒷뜰은 물이 고여들지도 않았으며 관목들의 흔들림 또한 밤새도록 잔잔할뿐이었다.

다음 날 가정예배를 드리며 우리 가족은 “This is my Father’s world”의 찬송가에 맞추어 함께 손을잡고 볼을 비비며 감사와 기쁨의 댄스를 하였다. 물론 아들은 내게 그것보세요, 아무 일 없을거라고 했쟎아요…”하였지만 그 날의 설교는 바로 녀석의 그와같은 내용을 소재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요번 허리케인 예보의 경험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신앙을 다질수있는 유익한 기회가 되기도했지만 한편 나는 소위 모범생 신드롬이란것이 내게 있는것이 아닌가 제법 반성하며 돌아보게 되었다.

너무도 규범에 꼭 들어맞게 보낸 대부분의 내 학창시절새 학년 새 반에 들어온 첫날 첫 시간에 양가집 규수같이 반듯하고 매력적인 신혼의 담임 선생님은 별안간 내 이름을 부르시며 일어나라고 하셨었다.  그리고는 전체 반 아이들에게 여러분도 이 학생처럼 용모단정하게 모범적으로 생활하기 바래요하셨었다.     

성적대로 반장과 부반장을 뽑았기에 나는 항상 학기초 반에서 내 이름이 제일먼저 호명될때마다 끝까지 기권의사를 밝히며 반장을 맡는것을 극구사양했다.  미덕처럼 보였을지라도 실제로는 반장이되어 담임선생님 곁에 늘 가까이 머물고또 앞에나서서 아이들에게 리더십을 발휘할 숙기와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독서시간을 빼앗기고 싶지않았고 그런일에 대한 가치도 몰랐다. 

내 안에 있어서 날 옭아매는 기질 -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 모르지만 무엇이든지 규격에 맞아야 편안하고 직성이풀리는 성격이 기독신앙의 본질과 잘 부합된다는 자부심과 자신을 예전엔 가진적도 많았다.  하여 그런생각으로 살아온 지난 나날들은 무혈의 투쟁과 갈등으로 얼룩진 힘든 개인사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런 정형성을 추구하는 기질이 성인이 된 후 나의 인생을 무척이나 고달프게 살아오도록 만들었는지모른다.  요새 철이 들어가려는지 이런 나로인해 함께 살아오면서 고생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새삼 미안하고 겸손해진다. 그러할땐 심령이 잔잔한 이슬같은 은혜에 젖어든다

요즘들어 절실히 깨달아가는것은 진리의 기치아래서 펼쳐지는 사람의 고정관념이나 자기주관, 자기 의가 얼마나 집요하고도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잔인성을 품고있는가 하는 점이다.  중세를 어둡게 물들인 기독교인들의 피의 역사도 바로 이런 옳음의로움이라는 명분아래서 가책없이 자행된 만행이었던 것을  새삼 상기하게된다.

말씀큐티를 통해서 다시 확신케된 것이지만 신앙의 의로움화해’, 용서관용겸손’ -인애가 함께해야하는 의로움이어야한다는 교훈이다(7:9).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는 어떤 사람과 사물에 대한 분별과 판단에 앞서 늘 이런 자세를 먼저 가다듬을때에 가장 최선의 안전한 방법적 접근과 해결책을 모색할수 있다고 본다.   

요사이 교회사회 일각에서 일어나는 이론적 논쟁은 사실 신학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부끄러울만치 기계적이고 평면적인 사고의 편린들이 많은것같다.  기실 신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기본적인 철학적 사고력의 토대가 어느정도 형성되어져야 하는 이유는 신학적 사고의 틀(frame)이 물론 기본 전제와 방법론적인 차이는 있지만  서양철학의 사고의 틀에서 나온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새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가 이단규정에 있어서 미국보다 엄격하다고 자부하는 이면에는 상대적인 인식력의 부족도 한몫 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든다.  에세이 쓰기보다는 흑백논리로 정답하나만를 골라내는데 너무 익숙해왔던 우리가 아니던가?

또 발견한것은 올인 예배/선교정신을 추구하는 신앙단체를 그토록 꺼리고 혐오하는 이유는 자녀들이 대학진학보다는 그런 신앙활동에 우선적으로 뛰어들려하는 경향때문인 것이다.  나도 한때는 그런 우려를 한적도 있었지만 아이가 대학 진학할 때가 가까워오자 점점 생각이 바뀌어갔다.

얼마전 큰 아이가 하는 말이 유펜을 나오고 프린스턴 신학원을 다니는 형벌되는 갈색피부의 학생이 대학입학을 하자마자 이년간 휴학을 하고 자기 부모의 나라에 가서 말과 문화를 익히고 돌아왔다며 자기도 그렇게 하고싶다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찬성했다. 

그렇지않아도 인본주의와 세상 영이 판을 치는 대학환경에 아이를 바로 보내는 것보다는 이 아이의 미래 인생 전반에 걸쳐 두고두고 보람있는 영향을 미칠수 있는 가치있는 산 경험을 시키고 싶었던 차였기에 말이다.  귀중하고 감수성이 강한 시기에 와이엠 훈련이나 여타의 선교활동을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체험을 할수있다면 긴 안목으로 보아 미래를 지탱할 든든한 인생자산을 축적하는 셈이 되지않겠는가 말이다. 

우리는 백인들에게 배울점인 바, ‘빨리주의앞서주의를 벗어나 장기적이고 전체적인 안목에서 여유있게 조감할수 있는 안목을 키워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럴때 민족성도 순화되고 격상되어 갈것이다.  좁은 안목이나 이기적 생각으로 어떤 신앙/선교단체를 비난하는것은 결코 바른 동기가 될수없을 것이다.  정말 우리 속에 예수님 중심신앙이 들어있는지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어야한다. 

신앙의 깊고 넓은 진리의 세계는 소정의 신학교 과정의 이수로써 맛볼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말 신학을 아는 사람은 그 차이를 인정하고 그 한계를 겸허히 수용할수 밖에 없을것이다.  복음적인 신학교와 자유주의적 신학교의 강의실의 분위기는 현격히 차이가난다. 

복음적인 신학교수는 학생들의 집요한 질문에 신비스런 명상적인 눈길을 보내며경건한 자세로 나도 잘 모른다는 말로 겸손히 답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유주의 물이든 교수는 매우 비판적이고 논리적이고 주입식이며 아마도 모르는게 없는것이다. 그런 태도가 몹시 거부스럽고 불안했었다.  

신학은 물속에 들어가지 않고도 물의 온도와 수질을 측정할수 있지만 신앙은 물속에 들어가 헤엄을 치면서 피부로 물을 체험하는 것이다.  물 바깥에 서 있는 사람은 물속에 들어간 사람이 한참을 안나오면 불안한것이다. 

신학은 신앙을 안전하게도 하지만 고갈되게도하는 장본인이다.  반면 신앙은 신학을 불안하게도 하지만 또 윤택하게도 하는 생명력을 지니고있다.  이 둘의 사이에는 피할수없는 숙명적인 긴장이 있을수밖에 없는데 긴장해소를 위해서는 서로 우위를 점령하려는 공격적인 자세보다는 늘 오픈되어 대화를 시도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신학과는 달리 신앙의 본질속엔 초월적이고 내재적인 신성의 특성이 말씀을 통해 주시는 지혜의 세계안에 생명력과 역동성을 품고 들어있기에 때로는 좀 낯설은 의외의 발상도 생겨날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 이런 부류의 리더들은 평신도도 다 아는 기초적인 신학지식의 부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개인적인 특성과 자질에 의해 영적세계를 깊이 사고하고 경험하는데서 연유한다. 

바로 이런점에 입각해서 영분별의 전반적인 가이드라인이 제시되는 것인데 기독론등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한 관용으로 접근하고 또 일말의 위험 소지로 발전할수 있는 부분은 대화를 통해 교정해 나가는 것이 신학연구계의 전반적인 질적인 차원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방안이라 본다.    

소위 정통보수적인 신학을 표방하는 지도자들이 사고의 패러다임 변환을 꾸준히 도모하지 않는다면 날이갈수록 기독교 신학은 세상 학문의 밥이되고 말것이다.  용감하게 외칠 부분과 사려깊게 조심해야할 부분을 구분 못하면 그 간극은 결국 세상적인 것이 대신할수 밖에 없을것이다. 

진리의 핵심은 - 마지막까지 붙잡아야 할 최고유일한 가치는 십대의 소년도 말하듯이 요동하지 않는 사랑의 주고 받음일것이기 때문이다. 

왜 서로 한 자리에 앉아 대화하고 나누고 돕고 배우기 보다는, 문제성이 그토록 심각하게 느껴져 괴로우면 직접 당사자에게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하기보다는, 남들이 땀흘려 목숨을 걸고 복음의 수고로 뛰어다니는 시간에 골방에서 틈틈이 대부분 다 소화하지도 못하는 단편적인 귀동냥들을 자료로 모아서는 너무도 손쉽게 단번에 거창한 미디어 거사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일까???  

이제는 신학계의 풍토도 구태의연한 관행에서 벗어나서 세상을 향해서뿐만이 아니라 신학계 자체를 향한 신학계 자체를 위한 신학계 자체안의 실천신학을 적용하여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자가 실천신학의 장을 열어가야 할 때가 된것이다.  목적이 가치있고 정당하려면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도 그에 맞게 가치있고 정당해야 하기때문에 이런 필요가 생기는것이다. 


박현숙 목사(프린스톤참빛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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