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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9일 03시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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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엘리야]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이냐? (민 21: 4-9절)

 

글공부가 힘들어 삼년 만에 중도포기하고 집에 돌아온 아들과 불을 끈 캄캄한 방에서 떡 썰고 글 쓰는 내기를 통해 아들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므로 인내심이 부족한 아들을 다시 산으로 보내 서예를 익히게 해서 마침내 조선 중기시대에 대서예가를 만들어 김정희와 쌍벽을 이루게 했던 한석봉(1543-1605년) 어머니 이야기는 잘 아는 이야기다. 16세기의 개성 사람 한석봉과 어머니를 패러디하여 풍자한 ‘21세기 한석봉과 엄니’ 해학유머를 소개한다.

 

① 한석봉: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자 그렇다면 어서 불을 꺼 보아라”. 한석봉: “글을 써 보일까요?” 어머니: “무슨 글을...잠이나 자자꾸나” 피곤한 어머니이다. ② 한석봉: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언제 나갔었냐?” 무관심한 어머니이다. ③ 바람둥이 어머니,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석봉아, 미안하다. 이제 너의 이름은 이석봉이다” ④ 사오정 어머니,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그래, 시험을 해 보자꾸나. 불을 끄고 떡을 썰어라. 난 글을 쓸 테니” “어머니, 시험문제가 바뀌었습니다” ⑤ 겁 많은 어머니,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자 그렇다면 난 떡을 썰 테니 넌 글을 써 보도록 하여라” “어머니 불을 꺼야하지 않을까요?” “손 베면 네가 책임질래?” ⑥ 배고픈 어머니,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자 그렇다면 난 썩을 썰 테니 넌 물을 올려라” ⑦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아니 벌써 돌아오다니...그렇다면 시험을 해 보자꾸나. 불을 끄거라. 난 떡을 썰 테니 넌 글을 쓰도록 하여라” 잠시 후, “어머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우핫핫, 당연하지” 미리 썰어 놓은 떡과 바꿔치기 한 어머니 ⑧ 한석봉: “어머니, 제가 돌아왔습니다” 어머니: “그렇다면 불을 끄거라.” 한석봉: “어머니는 떡을 써시고 저는 글을 쓰라 이거죠?” 어머니: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한석봉: “이미 책에서 읽었사옵니다” 어머니: “그렇다면 알아서 나가거라” 잘난 척하다 글도 못 써보고 쫓겨난 한석봉 이야기다. 16세기와 21세기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이렇게 다양하고 21세기도 작년과 금년, 지난달과 이번 달, 어제와 오늘, 오늘 중에도 아침과 낮과 저녁이 다르게 초고속으로 변하는 시대이다.

 

나폴레옹이 정복한 지역에 사는 어떤 사람이 예사롭지 않은 부탁을 하려고 그를 찾아왔다. 그는 나폴레옹이 정복한 영토 중 상당한 부분과 많은 사람들을 자기 관할에 붙여달라고 그에게 요청했다. 나폴레옹의 참모장은 그의 요청이 하도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장군이 일언지하에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기어이 나폴레옹을 만났다. 그와 대화를 나눈 나폴레옹은 막사에서 나오더니, 참모장에게 그 사람이 요청한 것을 다 들어주라고 명령했다. 깜짝 놀란 참모장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요청을 들어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며 물었다. 나폴레옹은 “그는 엄청나게 큰 것을 요청하므로 나를 찬양했다”고 말하며 “나를 그렇게 위대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모른 체할 수가 없다”고 했다고 한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크고 위대하게 생각하고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고 주시는 하나님,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께 큰 것을 믿고 구한다면 나와 당신을 모른 체하지 않으시고 응답해 주실 줄 믿는다. 하나님을 크게 생각하고 크게 구하므로 기도하고 구하는 모든 것을 응답받기를 축원한다.

 

 

이것이 무엇이냐?(What is this?)

 

히브리어로 만 후(Man hu), “이것이 무엇이냐?”(What is this?)란 뜻의 만나(Manna)란 단어가 성경엔 19번 밖에 나오지 않지만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만큼 위대한 양식은 없었다. 출애굽 한 달 만인 2월 15일,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람세스를 떠나면서 급하게 싸가지고 나온 식량을 광야에서 다 먹어갈 무렵인 르비딤에 도착한 때부터(출 16장) 출애굽 41년 1월 15일,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음식을 먹기 시작한 날까지의 39년 열한 달(11개월) 동안, 안식일을 위해서 이틀 양식을 한 번에 내려준 2,080번의 만나와 매일 새벽이슬과 함께 내려준 12,530번의 만나, 총 14,610번의 만나 내려주심은 하루 음식 값 조차 돈으로 계산할 수도 없는 엄청난 축복이었고 그릇이나 창고에 저장해 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매일 매일의 큰 역사였으며 만나, 그 자체가 하늘에서 내려온 무기농무공해의 최상최고 well-being(웰빙) 음식으로서 초자연적인 기적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견자요 다윗의 찬양대장 이었던 아삽은 시 78: 23-25에서 노래하기를 “그러나 저가 오히려 위에 궁창을 명하시며 하늘 문을 여시고 저희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으로 주셨나니(He rained down manna upon them to eat. And gave them food from heaven)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Man did eat angel's food; Man did eat the bread of angels: "사람이 천사들의 음식을 먹었다”)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도다”고 찬양함으로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에서 14, 610번이나 하나님께 양식으로 받아먹은 만나가 저 하늘에서 천사들이 먹는 음식이었다고 했으며, 성경시대에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은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었다”(요 6: 31)고 했으며, 바울은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었다”(All our fathers ate the same spiritual food: 고전 10; 2-3)고 하므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를 성도들의 영적인 신령한 음식으로 비유했다. 이제 “이것이 무엇이냐?”란 만 후, 만나의 비밀을 알아보자.

 

1. 일용할 양식

 

1.4후퇴 때, 앞뒤 생각 없이 무작정 이북을 떠난 피난민들보다 더 급하게 이집트를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따리에 싸들고 나온 곡식과 식량은 조잔하기 짝이 없었고 계속해서 먹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래서 아끼고 아꼈어도 한 달이 지나 그들이 신 광야 르비딤에 도착했을 때, 양식은 거덜이 났고 300만 백성들은 굶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약속대로 매일 새벽마다 이슬과 함께 만나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침에 일어나보니 거짓말처럼 그들이 진을 친 천막 주위에는 눈처럼 희고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만나가 내려 쌓여 있었다. 그것은 과자처럼 날로 먹을 수 있었고 국을 끓여 먹거나 불에 굽거나 볶아서 먹을 수도 있었는데 고소하고 달며 소금도 필요 없게 양념까지 잘된 만나의 맛이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으로 주신 만나를 보고 먹어보자마자 너무나 신기하고 감격스러워 “이것이 무엇이냐?”(What is this?, 만 후)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매일아침마다 거둔 만나는 부지런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은 많이 거두고 어떤 이는 적게 거뒀는데 놀라운 것은 마른 곡식의 양을 측정하는 오멜(Omer) 그릇, 2.3리터(또는 한 되 두 홉 들이) 토기 그릇으로 되어 보니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었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이며 만나를 아침에 요리하지 않고 낮에까지 내버려두면 뜨거운 햇볕에 눈 녹듯 녹아버려 먹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만나는 그날하루의 양식이었다. 더 신기한 것은 여섯째 날엔 안식일 만나까지 이틀 치 만나인 두 오멜을 거뒀는데 그날은 만나를 굽고 삶거나 볶은 후 나머지는 남겨두어도 다른 날처럼 햇볕에 녹거나 스러지거나 벌레가 생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나는 300만 이스라엘에게 하루하루의 양식인 참 신기한 Daily bread(일용할 양식)이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마 6: 11)라고 기도하라 가르쳤는데 ‘일용할’(Daily: 매일, 날마다)이란 헬라어 에페메로스는 다른 문헌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단어로 해석이 어려운 단어이지만 약 2: 15의 에페메로스인 ‘일용할 양식’(Daily food)과 히브리인들의 하루란 개념을 비교해볼 때 ‘일용할’(Daily)은 그날 하루하루란 의미보다는 “내일까지를 포함한 미래”란 의미가 더 가깝다. 히브리인들의 오늘 하루는 저녁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오늘의 일용할 양식’은 오늘 저녁과 내일 양식이란 의미이다.

 

성경이 말하는 빵(Bread)과 먹을 것(Food)의 양식은 네 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은 ① 자신에게 맞는 명예이다(창 40: 16-22, 시 127: 2, 눅 15: 7) 이집트의 떡 굽는 병관은 바로에게 바치려는 떡을 새들이 먹어버리는 꿈대로 자기 명예를 회복치 못하고 처형당했고, 솔로몬은 사람들이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하며 수고의 떡(The bread of sorrow)을 먹는 것은 성공의 집을 세우며 그 집을 지키려는 명예 때문이라고 했으며, 예수님은 배고픔으로 굶주린 아들이 ‘먹을 것이 넉넉한 아버지 집, 많은 품꾼의 하나로 고용해 달라’며 돌아온 탕자를 머슴꾼이 아니라 아들로 영접하고 양식을 주므로 ‘일용할 양식’을 ‘아들의 권세’, ‘아들의 명예’로 말씀했다.

 

② 계속 공급되는 영의 양식이다. 이스라엘이 광야 40년에 계속적으로 만나를 공급받았듯 성도들은 영의 양식을 공급받아야 한다(출 16; 4, 시 78: 24, 105; 40, 신 8: 3, 마 4: 3, 눅 4; 4) ③ 육체의 건강과 질병의 치료이다. 예수님은 귀신들린 딸의 병 고침을 간청하는 가나안 여자에게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져줌이 마땅치 않다”고 하심으로 병 고침을 자녀의 일용할 양식으로 말씀했다(막 7: 27) ④ 올바른 교육과 바른 지도자를 만나는 것이다(마 16: 5-12) 전도여행에 먹을 음식을 챙기지 못해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경계하시며 ‘일용할 양식의 빵’을 바른 교리의 가르침과 교훈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만나는 매일 매일의 일용할 양식이고,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이면서 내일과 미래를 위한 양식이다. 그래서 현실적 의미로서 만나는 오늘과 내일의 우리 행복을 위한 아내고 남편이며 가정이고 건강이며 우리가 경영하는 사업이고 가게며 성도들에게 영적인 양식을 주는 주의 종이기도 하다. 40년 광야생활의 이스라엘이 날마다의 풍족한 만나를 통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하여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신 8: 2-3, 16)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영적 만나로 인생을 승리하고 가정과 사업과 신앙을 성공하며 마침내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2. 이스라엘과 만나

 

민수기에는 염병이나 페스트 같은 악성 돌림병 또는 하나님의 징벌로 재앙당한 기록이 열 번(10 plagues in Numbers)이 나온다. 그 열 가지 재앙은 ① 이스라엘 진에 원인 모를 불이 붙어 천막과 사람들을 태워 죽인 재앙(Fire: 민 11: 1-3) ② 탐 욕 때문에 급성질병으로 죽임당한 기브롯 핫다아와 재앙(Sickness: 민 11: 4-35) ③ 구스 여자를 취한 모세를 대적했다가 문둥병에 걸린 미리암의 재앙(Leprosy: 민 12: 1-16) ④ 백성을 낙심시키므로 즉사당한 정탐꾼 열 명의 재앙(Death: 민 14: 28-35) ⑤ 가나안 땅을 악평했다가 심장마비로 급살 맞은 재앙(Sickness: 민 13; 31-33, 14: 37) ⑥ 지진으로 땅이 갈라져 250명을 삼켜버린 재앙(Earthquake: 민 16: 1-3, 29-33) ⑦ 불로 반역자들을 태워 죽인 재앙(Fire: 민 16: 1-3, 34-35) ⑧ 14,700명이 염병으로 죽임당한 재앙(Sickness: 민 16: 41-50) ⑨ 많은 사람이 독사, 불 뱀에 물려 죽은 재앙(Serpents: 민 21: 5-9) ⑩ 간음과 우상숭배 죄로 24,000명이 염병으로 급사당한 재앙(Sickness: 민 25: 1-9) 등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당한 열 번의 재앙원인이 하나같이 세치 혀를 잘못 사용한(Misuse of tongue) 원망 때문이었다. 그렇다. 솔로몬의 잠언대로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배가 부를 수도 있고 굶을 수도 있다. 죽고 사는 것이 사람의 혀의 권세에 달려있다”(잠 18: 20-21) 누에가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로 자기가 살 집을 짓듯 당신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당신의 운명의 집을 짓는다. 그래서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 3)를 기도했던 다윗처럼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고 입술을 지켜 입으로 죄를 짓지 않으며 부정적인 언어, 파괴적이며 비판적인 언어, ‘힘들다 못 살겠다’는 찌증과 비관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말고 긍정적인 언어, 생산적이며 낙관적인 언어, 축복의 언어를 사용하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창조하는 삶이되기를 축원한다.

 

이스라엘은 르비딤에서 처음 만나(Manna)를 보았을 때, 만 후(What is this?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외쳤다. ‘이것이 웬 은혜냐? 이것이 웬 축복이냐? 아무 자격도 없는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축복을 주시다니!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를 감격하며 외쳤다. 그러다가 신앙이 퇴보하고 믿음이 떨어지면서 원망을 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신앙인의 원망은 그 내용이 어떤 종류의 원망이든 신앙이 떨어진 증거이고 믿음이 퇴보한 증거이며 마귀에게 미혹돼 시험에 빠진 증거이다. 이스라엘의 원망은 저급한 불만에서 점차적으로 원망의 수준이 심각해져 갔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민 11: 4하-6)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땅에서 죽게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민 21; 5)

 

처음에는 ‘만나 외엔 보이는 것이 없다’고 원망 불평하더니 나중에는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한다’고 노골적으로 원망하고 불평했다. 처음 원망이 하늘의 순수하고 담백한 만나의 은근한 맛보다는 혀를 톡 쏘고 시큼한 맛이 뒤섞인 자극적인 음식을 요구하는 원망이라면 나중 원망은 하나님께서 제공해 주신 하늘의 음식, 만나를 공개적으로 업신여기고 멸시하며 대적하는 완악한 원망불평이다.

 

이 박한 음식”(This light bread; 이 천박한 빵, 이 찰기가 없는 음식, 이 바슬바슬하고 푸석푸석한 빵)에서 ‘박한’, 켈로켈은 “악한”, “무시할 만한”이란 뜻이다. 하나님이 주셔서 40년을 공짜로 먹게 해준 만나, 최고의 건강식품으로 만나 때문에 한 사람도 병에 걸리지 않게 하신 ‘하늘 권세자의 음식’, ‘천사들의 양식’인 만나를 “악한 음식”, “무시할만한 양식”이라고 폄하하며 원망했던 것이다.

 

그리고 “싫어하노라”(We loathe: “우리가 (구역질 날만큼) 몹시 싫어한다.”, “지긋지긋하게, 메스껍도록, 징그럽게 싫어한다”)의 카차는 “몹시 지겨워하고 질색하여 끊어버린다”는 뜻이다. 만나를 감사하기는커녕 원수처럼 증오하고 미워한다는 말이다. 현대적 표현으로 “만나고 뭐고 다 귀찮다. 만나가 아니라 지긋지긋한 웬수덩어리”란 폭언이요 극단적인 언어폭력의 원망이다.

 

참으로 말도 안 되고 어처구니가 없는 원망이다. 올챙이 시절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개구리의 오만방자한 원성이다. 이스라엘은 그런 원망을 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원망을 비판하는 오늘 당신은 그들보다 나은가? 이런 원망을 안 하는가? 당신 입술엔 아직도 처음 은혜 받을 때에 감격과 처음 영주권 받을 때에 감사, 힘들게 직장을 구했을 때와 작지만 어렵게 내 가게를 갖게 됐을 때에 그 환희와 감격과 감사가 있는가? 당신이 미국 비자를 받고 비행기에 몸을 싣고 태평양 상공을 날아올 때에 감격, 당신이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를 인생의 동반자로 만났을 때와 아들과 딸을 났을 때에 ‘만나의 감격’이 지금도 있는가? ‘영주권이고 뭐고 다 귀찮다, 가게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 내가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의 원망은 없는가?

 

만나를 박한 음식으로 평가절하하며 원망 불평했던 이스라엘은 하늘 문을 열고 저 하늘 궁창에 저장했던 권세 있는 자의 떡, 천사들의 음식(The bread of angels; Angels food)을 40년간이나 먹고도 광야에서 모두 저주받아 죽고 가나안에 한 사람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렇다. 하나님이 주신 가정의 만나, 직장과 사업의 만나, 은혜의 만나, 부부행복의 만나를 원망하는 자들은 축복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원망하는 사람들은 축복에서 제외됨을 명심하여 감사로 승리하기를 축원한다.

 

1987년, 살던 집을 팔아 건축헌금을 드린 것이 Seed money가 되고 성도들이 바친 건축헌금으로 힘들게 1년 동안을 찾다가 마침내 4에이커가 넘는 교회 땅을 구입했을 때, 다 쓰러져가는 집에 저녁에 심방을 하고 돌아오면 현관 바닥과 냉장고 주위로 시꺼먼 뱀들이 우굴 거리고, 하늘이 안 보이는 울울창창한 나무 정글과 밤이면 여우와 사나운 짐승들이 나오는 곳이지만 나무들을 자르고 600대 트럭의 흙으로 골짜기를 메워 평지를 만들어 잔디밭을 만든 후, 2년 동안 매일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허리가 휘어지도록 힘들게 정지작업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축복에 감격해 2년을 하루같이 보냈다.

 

그러나 교회 땅 구입하면서 집사 일곱이 계약서류에 싸인하기로 약속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몇 사람은 법적 책임자가 되기 싫다고 취소하고 몇 사람은 자신들의 세금보고를 정직하게 하지 않아 융자 자격이 안 돼 할 수 없이 우리 부부 이름으로 융자를 얻어 구입하면서 ‘교회 소유주 Deed’에 일곱 집사 이름을 다 넣어 교회를 공동소유로 만들어주었는데도 ‘목사가 교회를 자기 재산 만들었다’는 소문을 내고 건축헌금문제로 시험이 든 많은 성도들을 데리고 교회를 떠나 교회 운영이 힘들어지고, 교회 일을 하면서 일 년에 한 두 차례 덩굴나무 옻(Poison Ivy)으로 3-4개월씩 고생(욥이 가려움을 견디지 못해 기왓장으로 몸을 긁었듯 나는 한 번 옻에 걸리면 3-4개월 동안 견디기 힘든 가려움증으로-살에서 피가 나와도 계속 긁어야하는 고생-으로 고생했다)하고, 거의 나 혼자 끝이 안 보이는 그 많은 힘든 일을 해야 하고, 설상가상으로 수입에 비해 헌금을 너무 많이 했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Tex Audit(세금조사)을 받을 땐 정말 미국이 싫어지면서 한국에 나가 목회의 꿈을 펼치고 싶은 마음으로 ‘이렇게 나를 내버려 두시고 외면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들었다. ‘시시하게 내가 이런 일이나 하고 있어야 하는가? 여기가 아니면 일할 데가 없는가? 왜 나만 이렇게 고생을 해야 하는가?...’라는 원망이 점점 많아진다.

 

결국 감사를 잊고 원망을 품다가 93년 말에 워싱턴을 떠나 4년 반 만에 다시 워싱턴으로 돌아올 때까지 캘리포니아와 한국에서 내가 당한 일들은 화려한 성공이 아니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지옥의 고난’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고난은 사울이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에게 정신적 고통을 당한 것같이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에게 2년 동안 당한 고난(사울의 고난이 하나님께 버림당하는 고난이었다면 나의 고난은 빨리 미국으로 돌아가라는 경고성 고난이었다)에서 가까운 혈육친척들과 믿었던 친구들에게 당한 배신의 아픔과 쓰라림들, 그래서 하루하루가 지옥 같은 절망의 진흙탕 속에서 방황했던 고통은 내 인생의 모든 꿈을 접어야 했던 최악의 고난이었다. 그 한국생활 2년 동안에 40일 연속금식을 일곱 번이나 할 수 밖에 없도록 내 일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고난의 계절은 감사 대신 원망이 가져온 삶의 결과다.

 

오늘 당신이 하는 가게에 대한 원망, 아내나 남편에 대한 원망, 직장이나 동료에 대한 원망, 그리고 교회나 주의 종에 대한 원망은 당신의 영혼을 피폐하게 하고 파괴시키며 죽이는 암 같은 DNA이다. “이것이 무엇이냐?”의 감격과 감사로 사는 것만이 당신을 인생과 가정과 사업과 신앙에서 성공적인 사람으로 만든다. 처음의 감사와 감격을 회복하여 축복을 계속해서 받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3. 썩는 양식과 영생하는 양식

 

오병이어로 수만 명에게 떡과 생선을 먹게 해준 기적으로 예수님은 하루아침에 민족을 구원할 Super Star로 떠올랐고, 사람들은 저 정도의 능력을 가진 예수를 왕으로 세우면 이스라엘을 로마의 억압에서 독립시켜 자유를 얻게 해줄 수 있을 것이며 조상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배고픔을 해결했듯이 배고픈 민생문제도 해결해 줄 것이라 생각하면서 발 빠르게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한다. 그 것을 아신 예수님은 그곳을 떠나 혼자 조용히 산으로 피하셨고 예수께서 자리를 피한 것을 안 제자들은 저녁에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선교본부가 있는 가버나움으로 출발했는데 산기도 중에 제자들이 거센 풍랑과 파도로 고생하는 것을 아신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과 합류하여 무사히 가버나움에 도착했다.

 

오병이어 기적으로 떡과 생선고기를 먹은 자들과 그 소문을 들은 무리들이 이튿날 기적의 현장 디베랴에 도착했으나 예수도 안 계시고 어제 저녁에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떠난 것을 알고는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몰려가 예수를 만나자 ‘언제 여기에 오셨느냐’ 묻는다. 대단한 열심들이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印)치신 자니라”고 하셨다.

 

‘너희가 이렇게 바다를 건너고 산을 넘으면서 열심을 다해 나를 찾아온 것은 내가 베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믿으려는 소원 때문이 아니라 떡과 생선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다. 빵과 생선을 먹고 배부른 것은 광야의 조상들이 40년 동안이나 만나를 먹었으나 죽었듯 일시적으로 너희 육신의 배만 채우고 끝날 뿐 영혼의 양식, 영생하는 양식이 아니다. 그러한 노력과 열성으로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을 하라’는 말씀이다.

 

성경시대에 빵과 생선을 먹고 다시 예수를 찾아온 무리들처럼 오늘 교회도 썩는 양식을 위해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영생을 위한 교회생활과 믿음생활보다는 잠시 잠간이면 썩어져 없어질 세상적인 성공과 출세를 위해 대통령과 장관들, 사장과 상사들이 나가는 교회 앞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구약시대 만나처럼 설교말씀을 육신의 성공 양식으로 삼는 사람에겐 생명이 없다.

 

미 컬럼비아 법학대학원 부학장 마이클 헬러 박사는 ‘소유의 역습, Grid-lock’이란 책에서 현대사회의 성장을 막는 병적인 문제점을 이렇게 지적했다. Grid-lock이란 ‘교차로에서 발생한 교통체증으로 차들이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상황’을 가리키는데 그는 오늘날 사람들이 소유권을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경제활동을 오히려 방해하고 새로운 부의 창출을 막고 있다고 했다.

 

독일 라인 강변에 흉물스럽게 서있는 수백 채의 성채는 Grid-lock, 규제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중세 때 이 강으로 수많은 무역선이 다니자 봉건귀족들이 통행료를 받으려고 너도나도 강가에 요금소와 함께 성채를 지었다. 그러자 너무 많은 곳에서 통행료를 뜯겨 수지가 맞지 않게 된 뱃사공들이 운항을 포기했는데 그것 때문에 유럽 경제가 입은 타격은 실로 상상을 불허한다. 미국 메릴랜드나 버지니아의 Suburban(교외) 도로들이 똑바로 곧질 못하고 꼬불꼬불해서 교통사고가 많이 생기고 운전하기가 불편한 것은 땅 주인들이 자기 소유권을 주장해 길을 만들 땅을 팔지 않아서이다. 94년 지진으로 파괴됐던 일본 고베도 유지구간의 고속도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일사천리로 다시 건설했지만 개인 소유관계가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얼긴 주택지역은 몇 년 동안 잡석만 굴러다녔다. 미국에선 공항을 하나 세우려고 해도 수많은 땅 주인들을 모두 설득해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1975년 이후 새로 생긴 공항이 덴버 공항 하나 밖에 없다고 한다. 한국에서 수많은 관청의 결정이 필요해 길을 막는 전봇대 하나 뽑는 데 몇 년씩 걸려 사람들이 많은 불편을 겪고 막대한 국가적 손해를 당했던 것이 얼마 전 일이다.

 

미국 건설업계에서는 이렇게 불만을 품은 세입자 하나가 도시 개발을 방해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한 소유 시스템 상황을 Build Absolutely Nothing Anywhere Near Anyone)“어디서든 아무 것도 지을 수 없는”)이란 머리글자를 따서 BANANA(바나나)라고 부른다. 그렇다. 주일마다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과 신앙생활을 경건하게 하려는 성도들이 썩는 양식과 영생하는 양식 사이에서 방황하고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는 답보상태나 퇴보상태에 있는 것은 Grid-lock과 BANANA 때문이다.

 

당신 속에서 영적성장의 장애물인 세상적소유욕들을 뛰어넘어야 하나님말씀이 영생하는 양식이 된다. 그럴 라면 말씀을 읽고 들을 때 깨닫도록 영적으로 인도하는 주의 종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말씀 때문에 받는 환난과 핍박을 이겨야 하며(마 13: 19-22, 눅 8: 12-15) 세속에 속한 이생의 염려와 재리(Worries of the world and the deceitfulness of riches)와 일락(Pleasures of this life)의 유혹들을 넘어서야 하고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켜 인내로 결실해야 한다. 썩는 양식과 영생하는 양식을 분별하여 하늘에서 내린 참 떡,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만나 예수님으로 채우는 은혜와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4. 감추었던 만나

 

구약시대 광야의 일용양식이 만나였고 신약시대와 교회시대에 하늘에서 내려온 예수님이 만나이다. 광야의 만나는 육신만을 위한 썩는 양식이었지만 하늘 만나, 예수님은 사람의 육신과 영혼을 살리는 영생의 양식이다. 광야 40년 이스라엘에게 만나가 필요했듯 오늘 우리에게는 일용할 영의 양식인 만나가 필요하다.

 

모세와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레마의 말씀으로 산다”(신 8: 3, 마 4; 4)고 했다.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진정한 만나는 성경에 문자로 기록된 로고스의 말씀이 아니라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하나님의 레마의 말씀(히 4: 12)”이란 말이다.

그런데 문자적인 경전(經典) 말씀, 로고스가 살아 있는 말씀 레마가 되기 위해서는 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며 우리에게 예수를 증거하고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보혜사 성령, 진리의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요 14: 26, 15: 26, 16:13-14) 성경을 기록한 저자(著者), 성령(사 34: 16, 딤후 3; 16, 벧후 1: 21)의 역사가 없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깨달을 수가 없다.(요일 2; 27) 유한한 세상지식과 인간의 자로는 무한한 하나님의 지식과 무궁한 하나님의 비밀을 알 수도 측량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님께 그분의 인도하심을 간구하고 의지해야 한다.

 

② 요한을 통해 성령께서는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 당 이단을 이기는 자에게 “감추었던 만나”(The hidden Manna)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1세기 버가모 교회에 침투했던 우상숭배와 음행죄인 발람의 교훈과 “육신은 악이요 영만이 선하기 때문에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은 육신이 무슨 죄를 짓거나 방탕하고 타락해도 구원받는다”는 니골라 당의 영지주의 이단의 유혹처럼 오늘날 21세기 각종 쓴 뿌리와 독버섯처럼 교회로 숨어 들어오는 모든 이단을 이겨야 한다(계 2: 17)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적그리스도 이단(요일 4: 1-6) 예수의 성육신과 완전한 사람과 완전한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하늘 승천과 세상에 다시 오실 재림을 부인하는 이단들, 예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을 말하는 적그리스도 이단을 물리치는 사람들에게 숨겨 놓은 만나를 주신다.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생명의 말씀인 영의 만나를 읽고 듣고 깨달을 때마다 “이것이 무엇이냐”(What is this?) 만 후의 감격이 날마다 새로운 성도, 하나님이 주신 남편과 아내의 고마움과 가정의 고마움을 느끼고 감사를 고백하는 성도,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일거리와 일터를 주신 것을 감사하는 성도, 주일마다 생명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 있는 교회와 주의 종을 주심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일 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목사(워싱턴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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