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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9일 03시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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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연규]기본(基本)이 되는 삼위일체(三位一體) ②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셨다.(요 11:25,26)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부활(復活)이 되고, 또한 생명이 되는 것을 믿는다면 죽어도 살 것이라고 하셨고, 살아서 믿는다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과연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 있는가?

어떻게 2,00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현재 나와의 삶이 연관(聯關)이 있을까?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이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과 죽은 사람이 산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이 신앙의 기본이고 믿음의 기초인 교리(敎理)인데 아무 설명 없이 그냥 믿으라면 처음부터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광대(廣大)하시고, 위대(偉大)하시고, 영원(永遠)하시고, 불변(不變)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고, 온갖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그분을 표현할 수 없고 또한 우리의 생각과 식견(識見)으로는 도저히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생각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그 생각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생기(生氣)로 시작된 것을 감안한다면 깨끗한 영으로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오직 그 분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잠시 눈을 감아보자. 눈을 감고 생각하여 자신이 거하는 집이나 자신의 직장을 연상(聯想)하여 본다. 아니면 학교를 연상하여 본다. 아마도 기억하는 대로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때론 직장에서 생활하는 사무실, 혹은 일하던 현장, 아니면 학교에서 공부하던 교실, 그 안에 모든 집기와 친구들, 그리고 선생님, 어느 것이라도 생각하면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은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을 초월하여 수백 미터, 또는 수십, 수백,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눈 깜짝 할 사이에 갔다 올 수 있다.

생각은 이렇게 과거와 현재를 넘나 들 수 있다. 또한 과거의 모든 행적을 기억나는 대로 그릴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며, 그 기억으로 인해 눈물도 흘리고, 환희(歡喜)에 도달하기도 한다. 이것이 영의 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영의 세계는 과거, 현재, 미래로 가는 생각의 통로만 있을 뿐, 손으로 만져지는 형체(形體)가 있는 것이 아니요. 시간과 거리가 제약(制約)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영의 세계로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 해 본다면, 2,000여 년 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 죽음을 눈을 감고 생각하여 그려낼 수 있고, 그 자리에 마음과 생각으로 달려가 내 죄를 십자가에 함께 못 박을 수 있다. 또한 삼일 만에 부활(復活)하실 때에 나의 생명도 죄 가운데에서 해방(解放)되고 다시 살아나 그리스도로 인해 영생을 소유한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昇天)하시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이 내 마음에 그대로 느끼고 들리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

이렇게 영의 세계를 도식(圖式)으로 풀어내는 것처럼 꼭 이해하여야 한다는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버리고 이치적(理致的)으로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느껴야 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그 마음 그대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생각해 보라. 한 하나님으로 각각 완벽한 위(位)로 존재하는 세 분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하나님께 내 마음속에서 감각과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위해 의(義)의 길로 인도하심을 가슴과 마음으로 스스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느끼는 것은 반드시 믿음에서 만이 나올 수 있다. 만져지지 않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믿음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한다. 그 믿음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지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마음으로 느끼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무조건 적인 믿음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시초의 믿음은 곧 또 다른 믿음을 낳게 하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 받았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1,12)

정통 삼위일체 교리가 고백되어지기 까지는 참으로 많은 논쟁(論爭)과 투쟁(鬪爭)이 있었다. 주후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정통신조로 추인(追認)되기는 했으나, 오늘의 교회에 있어서도 아르미니우스(Jacob Arminius)파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신성만 인정하는 유니테리언(Unitarian)처럼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이 있다. 우리 주변에서 가장 가깝게 보는 이단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단종파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슐라이 에르마허(Friedrich Daniel Ernst Schleiermacher 1768.11.21-1834.2.12)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삼위일체를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계시로 즉 교의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신앙의 한 표현 행위로 생각하려했다. 이로 인해 많은 논란(論難)을 만들어 냈고,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교의가 없는 종파는 그들이 비록 우리와 같은 성경을 사용하고 같은 찬송을 부른다 하여도 기독교라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장로교 헌법에는 『하나님의 본체에 삼위가 계시니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다. 본체는 하나요, 권능과 영광이 동등이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교인의 정의에 대해 『교인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인데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말을 풀이하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체험과 느낌으로 얻은 은혜와 감격이 없고 무조건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교인이라 할 수 없다는 말이다.(발췌; 장로교 헌법 & 네이버블로그)

다른 신앙고백서에서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한 분이시나 삼위로 계신다. 삼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다. 삼위는 서로 혼돈되거나 혼합할 수 없고, 완전히 분리할 수도 없다.』고 하며 삼위는 그 신성과 능력과 존재와 서열과 영광에 있어서 완전히 동등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감리교의 신앙고백서에는 『만물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시며 온 인류의 아버지시요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 되시는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을 믿으며,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사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며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사 우리의 지도와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령을 믿으며』라고 고백하며 마지막으로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을 정리하면
①사람은 성자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성부하나님에게 절대로 갈 수 없고,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②사람은 성령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성자하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거나 말할 수도 없고,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③사람은 성부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성자하나님에게 다가갈 수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공동사역을 통해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고, 과거 현재 미래에 이르기까지 영원불변(永遠不變)하시다. 그렇다면 각각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어떠한 사역을 하실까? 성부하나님은 주로 계획(計劃)하시고,(마 24:36, 행1:7) 성자하나님은 계획된 것을 실현(實現)시키시며,(요 1:18, 19:30) 성령하나님은 받은 은혜를 소멸치 않도록 보존(保存)하시고 그 은혜를 더하게 하시며, 영원한 승리의 길로 인도하신다.(엡 1:13)

이렇게 각각의 사역을 하시지만 각각 완벽한 위(位)를 갖고 계시고 세 분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신 것이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완전한 모습인 것이다.

제자들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보았고, 들었으며, 느꼈다. 누가복음 3장 21절에 보면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절에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세례 받는 현장에서 성자하나님 즉, 예수그리스도를 보았고, 하늘이 열리며 성령하나님이 비둘기같이 강림(降臨)하시는 것을 보았으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말씀하시는 성부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고, 듣고, 느끼는 것 이것이 성삼위일체 하나님을 체험하고 믿는 방법인 것이다.

진정 성부하나님 외에는 하늘에서 말씀하실 분이 없으시고,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함께 계셨던 성자하나님 외에는 바람과 파도를 명하여 잔잔케 할 수 없으며, 성령하나님 외에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이 임하여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로 하여 하나님의 신기한 일들을 말하고, 느끼고 전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은 없으시다.

마태의 간절한 호소를 소멸(消滅)치 말고 우리는 아버지(성부하나님)와 아들(성자하나님)과 성령(성령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를 베풀어야 하며(마 28:19)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복음의 말씀을 전파해야 할 것이다.(딤후 4:2) 완전무결(完全無缺)한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진리(眞理)안에서 말이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 뉴욕비전교회 담임목사
http://TheVisionChurch.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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