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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9일 03시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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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참빛칼럼]우리의 자화상

아무 준비도 없이 결혼후 약 두 해가 지나서 부모님이 미리 오신 미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있던 남편은 나의 강청에 못이겨 도미를 결심하게 되었고 남편의 직장때문에 한 일년 남짓 살게된 구미의 교회에 출석하던중 남편은 낙동강 물속에서 인상깊고 은혜로운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아직까지  세월이 지난 사진속에서도 그때의 생동감과 감격이 그대로 묻어나오는듯 하다. 

결혼주례로 목사님을 모시자는 신부쪽의 제의에 남편은 강경히 반대하고 자신의 지도 교수님을 주례로 세웠었다.  신혼때부터 성격적으로 갈등이 많았던 우리 부부는 신앙에 매달릴수 밖에 없었는데 직장이나 이사등 환경의 변화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남편은 도미전에도 여러가지 고민으로 많은 생각을 하면서 한가지 제의를 해오길 미국에 가면 부부가 꼭 다시 한번 목사님을 주례로 결혼식을 거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또 새로운 사람들앞에서 처음의 결혼보다 더 자신감있고 복되게 신부드레스를 입고 웨딩마치를 할수 있을까 생각하니 몹시 쑥스럽고 긴장되어  사치스런 고민을 하기까지 하였다.

한국에서부터 해외출장이 잦았던 남편이었는데 대사관에서 인터뷰도 없이 손쉽게 유학비자를 받게되었다.  그 전날 구미에서 올라온 난 대사관 앞의 여관에서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올렸었다.  그러나 도미 후 예기치않은 경제사정의 변화로 우리는 오자마자 많은 돈을 잃게 되어 남편의 학비조달이 쉽지않게 되었다. 

그래서 가장 가난한 유학생이 되어서는 중도에 스톱하곤하는  400불 짜리 캐딜락을 끌면서 남편은 밤에는 UPS 일을 하며 학비를 벌어야했다.  나 또한 체크를 쓸지도 모르면서  북키퍼를 하는 일을 하였는데 당시 맨하탄에서 도매상을 하시는 장로님은 지폐를 아주 서툴게 제대로 셀줄 모르는 나를 보시고는 오히려 요새 세상에 보기드물게 귀하다고 칭찬하시며 돈을 맡기기에는 최 적임자라고 우대해 주셨던 기억이 새롭다.  

형편이 절박한 우리는 함께 새벽기도를 열심히 다니게 되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남편은 마스터를 마치자마자 좋은 직장에 영주권도 없이 유학생들중에 제일먼저 취직이 되었던 것이다. 직장에서 스폰서를 해서 영주권 신청이 들어갔는데 길어야 6개월 0순위로 제일 먼저 받을수 있다는 영주권이 그후 예기치 않은 이런저런 우여곡절로 십여년이 지나서야 받게될지 누가 짐작할수 있었으랴

나는 한국에서 두개의 전공 과목을 각각 3년을 수료하고는 겁쟁이 기질때문에 20대 초반에 미국에 홀로 유학을 올수있는 찬스를 포기하였었고 신학교에 지원을 하기도 했었는데 결국 결혼후 미국에 와서 나약 대학 바이블 전공에 편입을 하게되었다.  영주권의 지연은 다른 무엇보다도 공부하는데 제일 지장이 많았다. 

나약 대학에선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에서 열심히 사업을 하면서 신학교엘 들어오신 어떤 신실하신 집사님의 요청으로 그분을 위해 성문 종합영어 티칭을 아르바이트로 하면서 수업료에 큰 도움을 받기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주위에 돕는 손길을 붙여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또 만학의 나이에도 성실하게 기초를 다지며 공부하시려던 그 집사님의 성실함이 매우 존경스러웠고 인상깊었다.  아마 졸업후엔 훌륭하신 목사님이 되셨으리라 생각한다. 

나약은 커리큘럼이 탄실해서 바이블 전공의 남학생들은 졸업후 목사안수를 받을수 있었다.  나는 30대가 되어 신학공부를 하고 있었으니 아주 기쁜마음으로 알차고 깊이있게 공부에 빠질수 있었고 그래선지 교수님들로부터 졸업논문은 석박사 학위 수준이라는 평마저 들었다.  중도에 켄터키로 내려가게 되어 다시 올라와서야 졸업논문을 제출할수 있었으니 한국에서부터 대학과정만 거의 팔년을 이수한 셈이다. 

그러나 졸업 후 뉴브런스 윅을 들어갈때에도 영주권이 지체되어 스칼라쉽을 받기가 쉽지가 않았다.  그러던차에 당시 잠시 섬기던 교회의 K목사님의 권유로 프린스턴에 있는 한 교회를 들어가게 되었고  또 그 교회의 담임 목사님의 소개로 한인 장로교 신학교에 편입을 하게 되었다.  당시 난 한인 신학교의 사정에 대해 전혀 몰랐고 또 소개하는 담임 목사님의 설명이 오리지날 미주 장신대라니 한국의 장신대의 뉴욕 분교정도로 이해를 했던것이다. 

그런데 졸업후 안수를 받고는 3년전 인근 동네의 미국 장로교에 프린스턴 참빛교회를 개척하고 몇 개월이 지나고나서야 내가 마친신학교의 교단(UPCA)이 미장로교와 연결된 한인 장로교 교단(KPCA)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던  것이다.  오리지날 미주 장로교 신학교의 교단인데 말이다. 

그러니 미국 교회를 빌려쓰고 있는 여건이 애매하고 부담스러워졌다.  또 그 후 이러저런 피치못한 일이 생겨 그 교회를 나오고 인근 다른 교회를 빌리는 절차를 밟게 되었는데 일사천리로 잘 진행이 되다가 역시 최종적으로 교단이 걸리는 문제가 되었다.

개척교회를 위해서 이년 전 미국 목사님의 권유로 교단을 KPCA로 옮기는 절차를 밟아 보았는데 KPCA교단 측에서는 초창기 씨니어 목사님들간의 불화로 여러 창립멤버 분들이 교단을 탈퇴했고 기존 교단은 탈퇴한 분들이 설립한 교단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 미국 교회측에 미안하게 되었고 떳떳치 않은 입장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한인들이 미국에 와서 복음의 빚을 갚기위해 역선교를 해야하는 이 마당에 한인교단끼리 오랜 앙금의 감정문제로 반목질시를 함으로인해 미국교회가 필요한 동포 이민교회의 사역에 걸림돌이 되고있다면 이처럼 모순되고 손해되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난 젊은 미국 목사님이 시무하고 있는 교회를 빌려쓰면서 한국 교회의 전통적인 새벽기도와 금요예배의 열정을 적극 홍보하는등 미국 교인들이 한인 교회사회를 자랑스런 신앙의 모범으로 인식하게끔 많은 노력을 하였었는데 애석하게도 교단문제에 관한 대화에서는 그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그만 크게 덕이 되지 못하게 되고 말았던것이다

글로벌 처치를 이루어가는 것을 모토로 형제 사랑과 연합의 정신으로 아름다운 동거를 위하여 타민족의 교회에게도 기꺼이 문을 열고있는 미국 교회에 비춰지는 우리 한인이민 교회사회의 자화상을 한번 진지하게 성찰하고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모쪼록 이역만리 타국땅에 오셔서 각고의 수고로 먼저 복음의 길을 닦으신 선배 목사님들께서 화해와 화합의  본이 되어 주셔서, 후대에 부르심을 받은 후배 목사들이 순조롭고 떳떳하게 가슴을 펴고 이민 사회뿐만 아니라 다민족 사역에 힘껏 매진하고 진출할수 있도록, 지나간 날에 가로놓인 사역현장의 장애물을 넓은 아량으로 손수 거두어 주시길 충심으로 부탁드리고 싶다. 



박현숙 목사(프린스턴참빛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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