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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9일 03시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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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엘리야]요한의 네 가지 담대함
 

요한의 네 가지 담대함

 

임금님이 키우는 애완견이 있었다. 그런데 이 개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매일 똑같은 재롱만 보는 것이 지루하던 임금이 어느 날 개에게 도리도리를 시키는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상금을 타기 위해 몰려들었지만 아무도 도리질을 가르치지 못했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의 도전자만 남게 됐다. 임금이 그에게 물었다. “자네는 자신이 있는가?” “물론입니다, 폐하” “자, 그럼 어서 시작해 보게” 그러자 그 사람은 사정없이 주먹으로 개를 아주 세게 때렸다. 해머 같은 돌주먹에 얻어맞은 개는 깨갱거리면서 임금님 뒤에 숨었다. 그런 뒤에 그 사람이 개에게 물었다. “또 맞을래?” 개는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임금은 그에게 상금을 주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며칠 뒤 부작용이 일어났다. 그 개가 이제는 도리질만 할 줄 알지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금이 다시 명령을 내렸다. “이 개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자에게는 도리도리 때보다 더 후한 상금을 주겠다.” 이번에도 여러 사람이 도전했지만 아무도 성공하는 사람이 없었다. 마침내 개에게 도리질을 시켰던 그 남자가 임금에게 왔다. 그리고는 이 한마디를 내뱉고 상금을 챙겨갔다. “너 나 알지?”

 

우리들의 대적 마귀사탄과 귀신들이 먹이를 찾아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이 시대에 마귀 앞에 무릎 꿇는 나약하고 겁약한 성도가 아니라 담대하게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고 마귀귀신들을 정복해 다스리는 성도들이 되며 소가 백정을 보면 먼저 알아 두려워 떨고, 쓰리 꾼이 형사를 보면 먼저 꼬리를 내리듯 ‘너 나 알지?’ 한 마디로 마귀와 귀신들이 무릎 꿇고 복종하는 영권(靈權)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사도 요한의 네 가지 담대함

 

담력(膽力)이 큰 것을 담대하다고 한다. 사람은 마음이 담대하면 하기 어려운 일도 쉽게 할 수 있고 마음이 약하고 소심하면 할 수 있는 것도 자기 실력대로 못한다. 어떤 사람이 밤중에 길을 가다가 집채 만 한 호랑이를 만났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호랑이에게 활을 쐈다.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호랑이를 보고 집으로 돌아간 그는 날이 밝자 죽은 호랑이를 찾으러 갔는데 그곳엔 호랑이 대신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담대한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하면 바위에 화살이 박히듯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사석성호란 사자성어다.

 

골프를 칠 때에도 180야드 3파 홀 코스가 가까워 보이고 담대한 용기와 자신감이 생기면 버디나 파도 잡을 수 있지만 왠지 마음이 불안하고 거리가 멀어 보이면 보기나 더블 보기를 잡게 되며, 어떤 일을 할 때, 일이 잘 될 것이란 확신과 담대한 마음을 가지면 일이 잘 풀리고, 안 될 것이라 불안한 마음을 가지면 실제로 안 된다.

 

지난주에 있었던 2011 월드컵 여자축구에서 미국과 브라질의 준결승과 미국과 일본의 결승전에서 두 게임 모두 전후반과 연장전까지 끝내고 PK(Penalty Kick)로 승부를 가리게 됐을 때, 나는 Goal Keeper와 Kicker들의 태도를 보면서 직감적으로 준결승에서 미국이 브라질을 이기고 결승에서 일본이 미국을 이길 것이 느껴졌는데 정말로 그렇게 됐다.

 

준결승에서 미국이 브라질을 이길 때, 미국 선수들은 하나같이 확신에 찬 모습으로 담대하게 Goal Keeper는 공을 막고 Kicker들은 PK를 차 넣는데 브라질 선수들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하고 자신감 없이 공을 막고 차더니 결국 미국에게 졌고, 반대로 결승에서는 미국 선수들이 초조하고 불안하게 보이더니 어이없게 일본에게 월드컵 챔피언 트로피를 내 주었다.

 

이렇게 담대한 마음을 갖는 것과 소극적인 마음을 갖는 것은 운동경기에서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서 성공과 실패를 갈라놓는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확신과 담대한 마음으로 인생승리, 신앙승리, 삶의 승리가 있기를 축원한다. 초대교회 시대에 네 가지 담대함을 가지고 인생과 신앙을 승리했던 사도 요한은 오늘 우리에게도 네 가지 담대함을 가질 것을 권유한다.

 

1. 예수 재림의 날에 담대함(요일 2; 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And now, little children, abide in Him)

이는 주께서 나타나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When He appears; At His coming)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We may have confidence)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Not be ashamed before Him)

 

요한 일서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 ‘우리 속에 진리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다’ 등 성도들이 하나님과 진리의 말씀, 빛과 사랑, 예수님과 성령 “안에 있다, 안에 거한다”고 하는 말씀을 무려 설 흔 다섯(35)절이나 기록했다. 거한다(Abide)는 헬라어 메네인은 단순히 “존재한다”, “있다”는 의미보다는 “어떤 대상의 내부에 지속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 “그 안에 계속해서 남아 있다”는 유재(留在)의 원리를 가리킨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 ‘진리 안에 있다’, ‘사랑 안에 있다’는 말은 우리가 은혜가 충만할 때, 금식기도하고 철야 기도할 때 잠간 하나님 안에, 진리 안에, 사랑 안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하나님 안에 있고 진리 안에 있으며 사랑 안에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2장에서 요한은 “빛 가운데 사는 성도의 삶”을 가르치면서 ① 빛 가운데 사는 성도의 삶은 첫째로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고(2; 1-11) ② 둘째로 형제를 사랑하며 빛 가운데 사는 성도는 세상을 이긴다고 했으며(2: 12-17) ③ 셋째로 어떤 상황에서도 이웃을 미워하지 않고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성도, 빛 가운데 사는 성도는 정말로 믿음을 지키는 자로서 그런 성도는 예수님이 공중에 재림하실 때 부끄럼 없이 그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다고 했다. 부끄럼 없는 휴거 성도가 된다는 말씀이다.

 

본 구절의 “주께서 나타내신”에서 ‘나타내시는 것’(Appears, 파네로데)는 “육신을 입으신 예수께서 가시적으로 나타내시는 것”을 의미하고, ‘그의 강림’(His Coming, 파루시아)은 “숨겼던 것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으로 예수님의 나타내심과 그의 강림은 하나님과 하늘에 함께 계셨던 “예수께서 왕으로서 찬란한 광채를 입으시고 영광중에 눈에 보이게 공중으로 재림하시는 것”을 가리킨다. 주님의 날에 아무 부끄럼이나 거리낌 없이 담대하게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그렇다.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성도, 이웃을 미워하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고 예수께서 원수까지 사랑하므로 빛 가운데 행하셨던 같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빛의 성도가 될 때, 예수님의 공중 재림 나팔소리와 함께 저 하늘로 들림 받는 휴거의 축복 성도가 될 것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는다. 사랑은 허다한 죄, 모든 실수와 허물을 덮어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으며 무례히 행치 않는다. 사랑은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거나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딘다.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과 이웃과 원수까지 사랑하므로 주님이 저 공중에 천군천사와 함께 나타나 강림하시는 날 모두 들림 받는 담대함의 축복들이 있기를 축원한다.

 

2. 기도에 담대함(요일 3; 21-22절)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Beloved, if our heart does not condemn us,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Then we have confidence toward God)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Whatever we ask, we receive from Him!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본문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살므로 마음에 한 점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고 양심에 아무 가책도 없으며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기도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어떤 기도제목이라도 담대하게 요청할 수 있고 그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사실 지구상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죄 없으신 예수님 밖에는 없다. 따라서 본문은 우리가 지은 마음과 말과 행동으로 지은 죄 때문에 비록 양심에 가책과 거리낌이 있어서 자신을 책망할 것이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용서해 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면 성도는 자신을 책망할 것이 없다는 사실과 그 죄 사함의 확신 속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할 때에 모두 응답을 받는다는 담대함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렇다. 당신과 나는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용서받은 죄인’이다.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 그리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까지 용서를 받은 죄인이다. 이것이 십자가 보혈의 참 신기한 능력이다. 그래서 ‘부족한 죄인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죄가 그대로 있는 죄인이고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모든 죄를 용서 받은 죄인이다. 죄가 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기도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 기도응답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용서 받은 우리는 죄 없으신 예수님처럼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 우리의 소원들을 기도로 요청하고 그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다”(히 10: 19)고 했고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었다”(엡 3: 12)고 했다.

 

3년 반 공생애에서 예수님이 기도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그렇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My Father, if it is possible, let this cup pass from Me: yet not as I will, but as Thou will; 마 26: 39)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의 예수님 자신이 인류 구원을 위해 자원하신 십자가, 그리고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던 십자가 외엔 모든 기도에 응답을 받으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각자가 져야할 자신의 십자가 외에는 무엇을 구하든 모든 기도에 응답을 받아야 한다. 각종 질병 고침의 기도응답에서 야베스의 물질과 명예까지의 기도응답, 아브라함과 사라의 청춘회복의 기도응답, 요셉의 꿈의 응답, 솔로몬의 성전건축 응답, 이스라엘의 출애굽 응답까지 당신의 모든 기도들이 응답되기를 축원한다.

 

그런데 요한은 그러한 모든 기도응답의 조건을 죄 용서 받은 확신과 담대함이라고 했다.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기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형벌 받을 죄인처럼 주눅 들거나 벌벌 떨지 말고 담대하게 기도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기도는 Whatever, Whatsoever(무엇이든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이다. 시간적으로는 현재 일에서 미래의 일까지, 공간적으로는 가능한 일에서 불가능한 일까지와 보이는 일에서 보이지 않는 일까지 그리고 땅의 것에서 하늘의 것까지 무엇이든지 구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Whatever you ask in My name, that I will do)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If you ask Me anything in My name, I will do it; 요 14; 13-14)”고 말했다. 무엇이든지 기도해 응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다. 당신이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해 온갖 질병으로 고생하고 찢어지게 가난하여 고생하며 가정적으로 불행한 것이 영광이나 자랑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응답을 받아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의 영광이고 자랑이며 의무이다. 담대함으로 기도하여 모든 기도에 응답을 받으시기를 축원한다.

 

3. 심판 날에 담대함(요일 4: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That we amy have boldness in the day of judgement.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Because as He is, so are we in this world.

하나님께 대하여 성도들이 믿음과 사랑과 순종의 생활로 온전한 사랑을 바칠 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도 온전한 사랑으로 응답해주시며 성도들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 이 두 가지 사랑이 온전해 질 때, 마지막 심판 날에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갖게 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준엄하고 무서운 심판 앞에서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유혹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고 사랑 가운데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며 교제를 나누었던 것처럼 성도들이 세상유혹과 각종 시험과 어려운 고난들을 이기고 믿음과 사랑과 순종의 생활로 온전한 사랑을 하나님께 드릴 때이다. 이런 성도는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까지도 담대할 수 있다. 그러나 시험과 여러 가지 유혹에 져서 올바른 믿음 생활과 순종생활을 못한 교인들은 하나님 얼굴을 피해 숨으려고 쥐구멍이라도 찾으려고 할 것이다. 온전한 사랑을 드림으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얻을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하버드 대학 건립자며 남북 전쟁 당시 유명한 장군이었던 하버드 장군의 일화이다. 어느 날 그가 미국 서해안 지역을 방문하려할 때, 그의 절친한 친구들이 하버드를 놀래주고 즐겁게 해주기 위해 몰래 환영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미국 서해안 지역의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는 등 계획대로 파티 준비를 했다. 드디어 파티 날짜가 며칠 앞으로 다가오자 친구들은 하버드 장군에게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자신들의 계획을 이야기 했다. 그러나 하버드 장군은 자초지종을 듣더니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고맙네만 수요일에는 중요한 약속이 있으니 목요일로 연기해 줄 수 없겠나?” 그러자 친구들은 펄쩍 뛰며 “안 되오. 장군, 이번에는 미국의 유명 인사들을 대거 초청했고 또 대통령께서도 이 파티를 위해 이미 축전까지 보냈단 말이요. 장군께서 그 약속을 취소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하버드 장군이 말했다. “여러분이 알고 있다시피 나는 그리스도인이오. 나를 구속해주신 그분께 나는 굳게 약속했소. 주일과 수요일 기도회에는 반드시 참석해서 주님과 교제하겠다고 말이오. 미안하지만 난 주님과의 약속을 깨뜨릴 수가 없으니 다음 날로 연기해 주오” 그래서 결국 그 파티는 목요일 저녁으로 연기가 되었다. 미국 역사책에도 기록된 이 일화는 하버드 장군이 세운 대학이 지금까지 세계적인 대학으로 축복 받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한 실례(實例)이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과 사랑이 온전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도 온전할 것이다.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는 성도들이 주기도문 교회에서 많이 나오기를 축원한다.

 

4. 기도응답에 담대함(요일 5: 14-17)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This is the confidence that we have in Him, that,

if we ask anything according to His will, He hears us.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아느니라.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요한의 네 번째 담대함은 ‘1세기 말에 사는 나, 요한뿐 아니라 앞으로 오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기도한다면 무엇이든지 다 응답을 받는다’는 확신과 담대함이었다. 그렇다. 기도의 절대적인 응답조건은 우리 기도가 기도의 응답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한다. 기도응답을 주실 하나님 마음에 드는 기도,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응답 된다는 말씀이다. 아무리 훌륭한 기도, 사람들 마음을 흔들어 놓는 기도, 듣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기도, 사람 마음에 지진이 일어날 정도의 감동적인 기도라 할지라도 기도의 응답자이신 하나님 뜻에 맞는 기도라야 응답이 된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 지구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① 소명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소명, 자기 사명에 맞는 기도(고전 1; 1, 고후 1; 1, 엡 1: 1, 골 1; 1)이다. 사람 몸에 붙어있는 눈 코 입 귀 손발, 내장의 지체들이 자기 할 일이 있듯 하나님은 성도들 각자가 해야 할 고유사명을 주셨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 말씀 증거로 기도로 헌금으로 여러 가지 재능으로 봉사로 하나님을 섬길 사명을 주셨다.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 구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이든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말씀이다. ② 영혼을 구원하는 구령적인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고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고”(딤전 2: 4) “소자 중 하나라도 잃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마 18: 14)이며 “성도 중에 한 사람이라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 영생을 얻는 것”(요 6: 38-40)이니 이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응답하신다는 말씀이다. ③ 견신적인 하나님의 뜻(골 4: 12)으로 우리 믿음이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 위한 기도이다. ④ 성화와 성별적인 하나님의 뜻(요일 2: 16-17)으로 날마다 세상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기 위해 기도하는 기도이다.

 

고난적인 하나님의 뜻(벧전 3: 17, 4; 1-2)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당하고, 의를 위하여 당하는 핍박을 기쁨으로 감내하며 신앙 지키기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이다. ⑥ 거룩하고 존귀한 가정을 위한 하나님의 뜻(살전 4: 3-8)으로 성도들이 이방인처럼 색욕을 좇아 결혼하지 않고 분수를 넘어 남의 가정과 행복을 파괴치 않으며 자기 가정을 끝가지 지키기 위해 기도하는 기도를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이혼하기 위해 기도하지 말고 화목하고 행복하기 위해 기도할 것이다. ⑦ 범사에 감사하는 일상적인 하나님의 뜻(살전 5: 18)이다. 모든 일에 감사하기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뜻에 맞게 기도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든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모든 기도에 응답을 받는 축복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과 담대함이 있었고 그래서 그는 무엇을 기도할 때 이미 응답을 받은 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삶은 기도하는 삶과 기도의 응답받는 삶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요한은 우리에게 신앙생활을 함께 하던 형제나 자매가 용서 받을 수 없는 죄(Unforgivable sin), 회개의 기회가 없는 죄, 사망과 파멸에 이르는 죄인 ① 성령 훼방 죄(마 12; 31-32)나 ② 이단에 빠지는 죄(벧후 2; 1-3, 히 6; 4-8, 10: 26-31)가 아닌 다른 어떤 죄에 빠져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다. 도적질이나 부모를 거역하는 죄, 거짓말이나 간음죄, 심지어 사람을 죽인 살인죄라도 회개하면 용서받지만 성령의 역사를 마귀의 역사로 정죄하며 모욕하는 성령 훼방 죄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단 죄는 용서가 없다. 그래서 용서받을 수 있는 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짓는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 그런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기도라고 가르친 것이다.

 

기도응답에 확신과 담대함이 있는 성도는 기도하다가 낙심하여 포기하거나 기도를 중단하지 않는다. 당신이 몇 번 기도했다가 쉬고 있다면 기도를 다시 시작하라. 몇 달 기도하고, 몇 년 기도했다가 응답이 없다고 기도를 접었다면 다시 시작하라. 가능한 것은 기다리면 되지만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강력한 도전이다. 그래서 기도중단은 기적중단이다.

 

아브라함은 의인 50명에서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기도하다가 ‘Yet but this once’(이번 만, Only this once) 기도하겠다고 선포하고 여섯 번 기도에서 포기하므로 소돔 고모라 구원의 기적을 보지 못했다(창 18: 32). 그러나 엘리야는 3년 6개월이나 비가 오지 않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보고도 포기하거나 낙심치 않고 비 오기를 일곱 번이나 기도하므로 닫혔던 하늘 문을 열고 단비가 이스라엘 땅을 적시는 기적을 가져오게 했다. 타락생활로 십대에 사생아까지 낳고 이방종교 마니교에 심취했던 희대의 탕아, 소망이 없던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 30년을 기도하여 기독교 역사의 위대한 성자를 만든 칼타고의 성녀 모니카를 보라.

 

코스타리카의 우화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 총각 비둘기가 좋아하는 처녀 비둘기에게 실연을 당해 슬프게 앉아있는데 이를 본 참새 한 마리가 다가와 한 가지 질문을 했다. “비둘기야, 눈송이 하나가 얼마나 무거운지 아니?” 그러자 비둘기는 관심 없다는 듯 “몰라. 그게 돼봐야 얼마나 무거울까?” 참새는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둘기야, 내 말 좀 들어봐. 어느 날 내가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고 있는데 그때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어. 눈들은 아주 먼 곳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와 나뭇가지에 사뿐사뿐 앉았는데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눈송이들을 하나 둘 세기 시작했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3백 64만 1,950 송이가 그 가지에 내려앉을 때까지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 다음 한 송이가 내려앉자 그 나뭇가지는 그만 뚝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잠자코 참새의 말을 듣고 있던 비둘기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결국 눈송이 하나가 더 내리자 그 단단하던 나뭇가지가 부러졌다 이 말이군. 나도 다시 그녀에게 가보자!” 그래서 여덟 번이나 계속 거절당했던 그 처녀 비둘기에게 가서 아홉 번째로 청혼을 했는데 그녀가 마음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당신이 다시 시작하는 기도가 응답 받기를 축원한다.

 

사도 요한이 가졌던 네 가지 담대함, 그래서 그의 삶과 신앙에 성공을 가져온 네 가지 담대함인 ① 그리스도 재림의 날에 대한 확신과 담대함 ② 기도에 담대함 ③ 최후 심판의 날에 담대함 ④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과 담대함이 오늘 김 목사와 여러분의 담대함이 되기를 축원한다. 이러한 담대함이 있는 한 여러분의 인생에 실패는 없다. 담대(膽大)하자! 담대(膽大)하자! 담대(膽大)하자!

 

요한의 네 가지 담대함에서 담대함을 2: 28, 3: 21, 5; 14에서는 자신, 신뢰, 확신, 대담성이라는 Confidence로 번역했고 4; 17에서만 뻔뻔스러울 정도로 담대함, 주제넘을 정도로 용감하고 대담함이란 Boldness로 번역했는데 헬라어는 네 번 모두 “자기 의견을 공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시민의 권리”란 뜻의 파르레시안으로 기록됐다. 그렇다. 담대함은 나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시민의 권리이다.

 

나의 37년 미국생활 중에서 많은 성도들과 목사님들의 영주권을 도와주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에 세 번은 내가 한국에 나가 주한미대사관 이민영사를 만나 영주권을 받게 해준 특별한 경험이었다. 세 사람 모두 5년 이상을 기다렸으나 Green Card를 받지 못해 불안하여 내게 도움을 요청하므로 영사를 만났었는데(그 중에 한 사람은 비자취득 불가능 상태였다) 세 번 모두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영사가 직접 대기실로 나와 나를 자기사무실로 안내하고 친절하게 영주권 도움을 모두 주었는데 그때 나는 로마시민권자 권리를 담대하게 주장하던 바울처럼 미국시민의 자부심을 맘껏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도 “내 의견을 공적으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미국시민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주께서 공중으로 재림하시는 날에 그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무엇이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담대함이 주어졌다.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는 축복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한 무슨 기도든 응답받을 것이 약속된 확신과 담대함이 주어졌다. 이 네 가지 담대함으로 축복과 은혜와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목사(워싱턴주기도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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