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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9일 00시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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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엘리야]성전을 향해 기도한 요나
 

성전을 향해 기도한 요나 (욘 2: 1-10)

매일 TV에 얼굴이 나오는 유명 정치인이 어느 날 지역구에 있는 유치원을 방문했다. 유치원에서 새싹들의 밝고 명랑한 모습을 본 그는 흡족해서 물었다. “여러분, 내가 누구인지 알아요?” 아이들은 한 음성으로 “국회의원이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유치원생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믿은 그가 다시 물었다. “그럼, 내 이름이 뭔지 알아요?” 그러자 아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하나같이 큰 소리로 “저자식이요”

 

어느 할머니가 다리 통증이 심해 늘 고통스러워했다. 장마철이 되자 통증이 더 심해진 할머니는 도저히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병원을 찾았다. 의사를 만난 할머니는 “이봐요, 의사 양반, 평소에도 왼쪽 다리가 많이 쑤시는데 혹시 몹쓸 병은 아니지?” 그러자 의사는 건성건성 대답했다. “할머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나이 들면 다 그래요” 그러자 할머니는 화를 버럭 내며 “에끼, 이보슈! 아프지 않은 오른쪽 다리도 왼쪽 다리와 나이는 동갑이여!”

 

날마다 부부 싸움을 하며 사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있었다. 어느 때는 한 번 시작한 싸움이 밤이 새도록 계속될 때도 있었다. 어느 날 화가 머리끝까지 난 할아버지가 “내가 죽으면 관 뚜껑을 열고 흙을 파고 나와서 당신을 괴롭힐꺼야, 각오해!”라고 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장사를 지내고 돌아온 할머니는 동네사람들을 모두 불러 잔치를 하고 신나게 놀았다. 걱정이 된 옆집 아줌마가 “할아버지가 관 뚜껑을 열고 나와서 할머니를 괴롭힌다고 하셨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가소롭다는 듯이 “걱정 마, 내 그럴 줄 알고 남편 관을 뒤집어서 묻었어. 아마 지금쯤 땅 밑으로 계속 파고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구약에 176개, 신약에 45개, 신구약성경에 총 221개가 기록된 기도(祈禱, Prayer) 중에서 ‘일곱 가지 상황에서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모든 기도를 응답해 달라’는 솔로몬 성전봉헌기도(왕상 8: 23-53, 대하 6: 12-42)와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① 당신자신을 위해서(For Himself; 1-5절), ② 제자(弟子)들을 위해서(For His disciples; 9-19절), ③ 지구상의 모든 제자들인 믿는 성도들을 위해서(For all disciples; 20-24절), 그리고 다시 ④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서(For His disciples; 25-26절)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던 겟세마네 동산 마지막 기도(요 17: 1-26)가 기도 중에 가장 긴 기도일 것이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최후기도에서 “내가 했습니다”(I have)란 과거분사를 열 번이나 사용했는데 ① “내가 아버지를 영화(榮華)롭게 했습니다”(I have glorified Thee; 4절) ② “내게 부탁하신 아버지의 일을 다 수행했습니다”(I have finished Thy work; 4절) ③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다 나타냈습니다”I have manifested Thy name; 6절) ④ "내게 주신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다 주었습니다”(I have given to them Thy words; 8절) 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지켰습니다”(I have kept them; 12절) ⑥ “아버지의 말씀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습니다”(I have given them Thy word; 14절) ⑦ “아버지께서 세상에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냈습니다”(I have sent them into the world, as You sent Me; 18절) ⑧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저들에게도 주었습니다”(I have given them Thy glory; 22절) ⑨ “나는 아버지를 알았습니다”(I have known Thee; 25절) ⑩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했습니다”(I have declared unto them Thy name; 26절)

 

이처럼 예수님은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과 계획과 뜻을 하나도 어김이 없이 실천하셨다. 여러분도 자신의 인생을 끝낼 때 마지막 기도를 “내가 했습니다”(I have)를 말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솔로몬은 성전 봉헌기도에서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면’ ① 사람이 죄를 지을 때라도 응답해주시고(If men sin, then hear; 왕상 8: 31-32절) ② 이스라엘이 죄 때문에 전쟁에 진 것을 깨닫고 자기 죄를 회개할 때, 응답해주시며(When Israel sins and defeated, and shall confess and pray, then hear; 33-34절) ③ 이스라엘이 범죄(犯罪)함으로 한발(旱魃)의 저주를 당할 때, 죄를 회개하고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응답해주시며(When they have sinned and are judged, and if they pray and confess, then hear; 35-36절) ④ 이스라엘에 무슨 재앙이나 질병이 임할 때 그들이 기도한다면 응답해 주시며(If there be plagues and curses, and they pray, then hear; 37-40절) ⑤ 먼 지방에서 이스라엘을 일시 방문한 사람이라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응답하시고(When strangers seek You and pray toward this temple, then hear; 41-43절) ⑥ 주의 백성이 전쟁에 나가서 성전을 향해 기도하거든 응답하시며(If Your people go out to battle and pray toward the temple, then hear; 44-45절) ⑦ 그들이 죄를 지어 패전해 포로로 잡혀가더라도 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응답해 달라(If they sin, and defeated in battle, go into captivity, and return to You with all the heart, then hear; 46-53절)고 일곱 가지제목으로 기도했다.

 

그런데 이 솔로몬 성전봉헌기도의 4대 핵심 요청(왕상 8: 27-30절)은 ① 하나님의 눈이 주야로 성전을 향하여 보사 모든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For God's eyes to be toward the temple night and day, to hear all the prayers of His people) ②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모든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For God to hear his prayers that would be prayed toward the temple) ③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언제 어디서 성전을 향해 기도하더라도 응답해주시는 것(For God to hear that prayers of all Israel wherever they were and when they prayed toward the temple) ④ 무슨 기도를 하던 하나님께서 듣지만 마시고 응답하사 용서해주시는 것(For God to answer and forgive, not merely hear what was said)이었다.

 

솔로몬의 성전봉헌 기도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솔로몬의 기도대로 개인적으로나 지파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죄를 지었거나 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할 때, 국가적인 위기를 겪거나 염병이나 기근을 당할 때, 그리고 대적들과 전쟁을 하거나 심지어 패전해 전쟁포로가 돼 잡혀갔을 때도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기도하거나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했다. 그래서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의 유일한 희망은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한 요나

 

1. 요나와 다니엘

 

사람이 절망과 파멸에서 다시 살아나 재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기도이다. 기도만이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기도만이 사람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해준다.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만들어 주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해주는 고속도로 통로이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난 후 뱃사람들에게 들려서 망망대해 지중해 한 복판에 던져진 후 거대한 물결과 휘몰아치는 거센 파도에 휩싸여 삼켜지면서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는데 바다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하나님이 예비하신 물고기가 삼켜버리므로 칠흑의 고기 뱃속으로까지 들어갔다.

 

그 때부터 만 사흘, 72시간 동안,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당했던 죽음의 체험은 요나만이 설명할 수 있는 고난체험일 것이다. 고기 뱃속에서 살아있어야 하는 고통은 가히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고 지옥의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무 것도 잡을 수 없는 미끈거리는 고기 내장에서 펑펑 쏟아져 흘러나오는 위액으로 정신 차릴 수 없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과 호흡마저 막혀버리는 고통, 그리고 수 억 톤 지중해 바닷물의 수압으로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은 잠시 후도 예측할 수 없는 변화난측의 지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나는 이 죽음의 고난에서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의 불순종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었다. 요나는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습니다”(I am cast out of Thy sight, yet I will look again toward Thy holy temple; 4절)며 부르짖는다.

 

그렇다. 요나는 고기 뱃속, 죽음의 문턱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며 부르짖어 기도했다. 사실 요나는 지중해 바다 속, 그리고 큰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성전이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맘속에는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며 자기의 불순종의 죄를 회개하면서 성전을 바라보면서 기도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요나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물고기에게 요나를 해변 모래사장에 토해내도록 명령했다.

 

이렇게 구사일생의 기적으로 사흘 만에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요나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죄악의 도성 니느웨로 달려가 심판과 회개의 복음을 증거했는데 하나님의 역사로 40일도 안 되는 기간에 줄잡아 60만 명을 구원하는 인류역사 최대 구원과 부흥역사를 일으켰다. 이러한 전대미문의 니느웨 구원역사는 성전을 바라보고 드린 요나의 기도에서 시작됐다. 여러분도 집에서 자동차에서 학교와 사무실에서 직장과 일터에서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므로 그 기도에 하나님의 역사들이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다니엘도 성전을 향해 기도한 사람이다. 십대 Teenager 때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은 풍전등화의 아슬아슬한 죽음의 위기를 겪을 때에도, 그리고 그가 성공해 국무총리가 돼 탄탄대로를 달리는 평안한 때에도, 오전 9시와 정오, 오후 3시 매일하루에 세 번,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70년 이상을 기도했다. 그 기도 때문에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사자 굴에 들어가는 죽음의 시련까지 당했지만 성전을 향한 다니엘의 기도는 쉬지 않았다.

 

일개 전쟁포로로서 다니엘이 대제국 바벨론과 메데 파사의 국무총리가 됐고,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돼 구약 4대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으며, 당대의 세계정치뿐 아니라 수천 년 후에 일어날 지구 종말시대까지를 꿰뚫어보며 미래사를 예언할 수 있도록 특별계시들을 받았으며, 노아와 욥과 함께 구약의 삼대 의인 중 한 사람으로 칭송이 되고(겔 14: 12-20) 지혜의 왕 솔로몬과 함께 지혜의 양대 산맥으로 아니 그보다 더 뛰어난 성경역사 최대의 지혜자로 칭송받는(겔 28: 3) 사람이 된 것은 그가 ‘기도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다니엘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특별히 다니엘은 성전을 향해서,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사실 다니엘이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할 때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 침공으로 파멸돼 흔적만 남은 채 한줌의 재로 변했던 때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성전을 향한 그의 기도를 받으셨다. 어째서 성전을 바라보고 드린 다니엘의 기도가 그렇게 위대한 기적을 만들었는가? 그렇다. 그것은 성경대로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기 때문이다.

 

다니엘 시대에 비록 솔로몬 성전은 제사장들과 선지자와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온갖 죄로 심판을 받아 이미 파멸됐지만 그 성전에 하나님이 영광으로 임재 하여 계셨었고 그 성전 터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다시 세워질 것이며 장차 다시 세워질 그 성전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그 성전에 계시니(The Lord is in His holy temple)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시 11: 4)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The Lord is in His holy temple!)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 20)

 

그렇다.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고 하나님은 영광으로 성전에 임재 해 계신다. 그러므로 아침에 일어나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성도, 일터로 나가면서 직장에서 일하고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그리고 일을 마치고 퇴근하면서 성전에 계신 하나님을 사모하여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요나의 구원과 사명, 다니엘의 축복과 은사들이 넘치기를 축원한다.

 

2. 성전에 와서 기도하라

 

하나님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만 해도 기뻐하시고 응답하신다. 그렇다면 성전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은 얼마나 더 기뻐하시고 축복하시겠는가? 반가운 사람끼리의 만남도 유선전화의 대화보다는 화상전화가 더 실감이 있고 화상전화보다는 얼굴과 얼굴을 보는 만남이 더 사실적이고 실감나는 만남이듯 하나님을 만나는 일도 멀리서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과 가까이서 성전을 찾아와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은 그 감격이나 축복이 같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집에서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것과 졸면서 기도하더라도 성전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은 그 은혜와 축복이 다르다. 교회에 와서 잠만 자도 그 은혜가 다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요나와 다니엘처럼 어쩔 수 없는 환경에서는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해야겠지만 조금만 애쓰면 언제라도 성전을 올 수 있는 환경이라면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찾을 것이다.

 

성전을 찾을 수 있는 환경임에도 ‘방콕 사람’(방에 콕 박혀 있는 사람)으로 있는 것은 한 마디로 게으른 사람이다. ‘그 밭과 포도원에 가시덤불이 퍼졌고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으며 돌담이 무너진 사람’(잠 30-34)이고 그 집에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곤핍(困乏)이 군사같이 쳐들어올 불행한 사람’이다. 소망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다.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이 거저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나는 고등학교 학생시절 3년 동안 집에서 잔 것보다는 교회에서 잔 것이 더 많았다. 부모님들이 당신들이 원하는 사관학교를 안 가고 목사가 되겠다는 나의 신앙을 반대하여 핍박하는 바람에 밥 먹듯 굶고 집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었던 나는 저녁마다 담요 한 장 들고 교회를 찾아가 교회 마룻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고 새벽엔 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부여잡고 기도하고 설교연습을 했었다.

 

그 후 신학을 졸업하고 전도사 시절 7년 동안도 하나님께서 ‘결혼 전까지 강대상에서 자겠다’는 결심을 주시므로 성전을 가까이 하며 살았더니 그 축복으로 많은 은사체험을 하게하셨는데 그때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은사가 지금까지 나를 버티게 해주는 거대한 힘이 되고 있다. 특히 그 때 주신 여러 가지 많은 축복 중에 미국을 오게 하신 축복은 귀한 간증이 된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많이 해서 건강을 장담하고 자신하여 무리가 가는 줄도 모르고 자주 금식을 하고 기도한다고 밤마다 강단에 엎드려 새우잠을 자다가 양쪽 폐에 동공이 생겼는데 그것도 모른 채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했다가 3일 만에 폐병으로 제대케 하시고 다시 건강을 주셔서 ‘7년 후에 미국에 보내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대로 7년 만에 미국으로 오게 하신 것은 지금도 내겐 꿈같은 간증이다. 양쪽 폐에 구멍이 생겨 기침을 할 때마다 피를 토할 당시는 절망뿐이었는데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합력해 선을 이루어 주셨다.

 

돌이켜보면 내 짧은 생애는 성전을 가까이 하며 살아온 삶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성전을 가까이한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었고 어쩌면 앞으로 남은여생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게 하시리라 믿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진군할 때, 정중앙에 성막이 있게 하고 그 성막을 중심하여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한 방향에 세 지파씩 열두 지파가 일사분란하게 진행하게 하셨다. 이렇게 성막을 이스라엘 진영 중앙에 있게 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성전을 중심해 살라, 하나님의 백성 성도는 누구라도 성전을 가까이 해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이었다. 그렇다. 성도는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가까이 해야 한다. 성전이 자신의 삶을 붙잡아 주는 축이 되는 사람이 참 성도이다.

 

성전을 가까이 하는 성도일수록 은혜가 자라고 신앙이 성숙해지며 축복을 받는 횟수가 많아진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번 하나님을 뵙는 교인과 매일 하루에 한번 하나님을 뵙는 성도의 축복이 같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올바로 하려는 성도는 교회 가까운 곳으로 이사까지 한다. 어떤 성도는 아예 새벽에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교회에서 아침을 먹고 바로 직장을 가고 학교를 가게 한다. 그리고 어떤 성도는 학교나 직장 일을 끝내고 교회를 들려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집으로 간다. 그렇게 하나님을 매일 만나는 사람의 삶은 실패할 수가 없다. 그리고 축복을 받지 못할 수도 없다. 축복이 그를 피해가지 않는다.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사시사철 축복의 열매를 맺는다.

 

이 땅에 세워진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성도와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인 자신을 돌아보아 날마다 자신을 깨끗이 하면서 하나님이 임재 해 계시는 성전에 나와 기도하는 성도가 되므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적인 축복에서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축복까지 모두 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3.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때

 

지금은 다시 요나와 다니엘처럼 성도들이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할 때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이 임박한 지금 이 시대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 성전을 향해 기도해야 하는 시대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 지난 2,000년 동안 지구촌에 세워진 수백만 개의 교회가 있지만 성경에서의 성전은 크게 나누어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환난성전, 천년왕국 성전 이렇게 네 개의 성전이 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480년인 주전 952년, 현시가로 대략 750억 달러의 건축비가 들어간 모리아 산 솔로몬 성전은 다윗이 평생에 건축 준비를 했지만 하나님의 거절로 취소되고 그 아들 솔로몬이 지은 성전으로 역사상 최상최대의 비싸고 고급스러운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던 성전이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은 바벨론 침공으로 366년 만인 주전 586년에 무너졌다.

 

그다음 바벨론 침공으로 무너진 솔로몬 성전 터에 주전 516년에 다시 세워진 스룹바벨 성전이다. 이 성전은 70년 만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자들이 20년에 걸쳐서 건축한 성전인데 이 스룹바벨 성전은 그 이후로 500년 동안 계속 조금씩 증축해 오다가 예수님 당시 헤롯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46년에 걸려 완공하여 12만 명이 예배할 수 있는 거대한 성전으로 만들었지만 주후 70년에 로마군에 파멸 당한다.

 

세 번째 성전은 칠년 대 환난 전에 세워지는 성전으로 환난 때에 적그리스도가 자기 우상을 성전 안에 세우고 자기가 하나님이라 선포할 것이기 때문에 ‘적그리스도 성전’, 또는 ‘환난 성전’이라고 부른다.

 

적그리스도의 성전인 환난 성전은 ① 1974년에 착공해서 1982년 8월 9일에 완공한 ‘예루살렘 대 회당’(Jerusalem Great Synagogue)이라는 학설과 ② 1984년 6월 17일-24일까지의 기공식 잔치에서 “이 건물에 메시야가 올 것이다”라고 발표하면서 착공해 1987년에 20,000명을 수용하는 거대 성전으로 완공한 대성전이라는 학설과 ③ 히브리대학의 카프만 박사가 Middot라는 유대 랍비 문서와 사가 요세프스의 기록 등 50가지 단서들을 제시하며 주장하는 현재의 회교사원(Dome of the Rock)에서 330피트 북방에 가까운 시일에 세워질 성전이라는 학설이 있는데

 

신약이나 환난성전을 믿지 않고 구약만 믿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지어져 메시야성전으로 생각하고 있는 예루살렘 대회당과 대성전 외에도 그들이 지을 준비를 다 끝낸 카프만 박사가 주장하는 제 삼 성전까지도 메시야성전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대 회당이나 대성전, 제삼 성전 중 어떤 것이 환난 성전이 될지 알 수 없지만 적그리스도의 환난성전은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처럼 성경예언대로 대환난 때에 파멸될 것이다. 그 성전은 그들이 믿는 것처럼 메시야성전이 아니다.

 

네 번째 성전은 예수님이 지상에 재림하셔서 적그리스도를 처단하시고 적그리스도를 추종한 자들과 666표를 받은 모든 사람을 죽이시며 지구촌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 지으실 천년왕국 성전이다.

 

에스겔은 환상 중에 이 성전 문지방에서 나오는 생수의 강물이 남쪽으로는 엔게디와 에네글라임까지 흘러 이스라엘 땅을 에덴동산으로 만들 것이며 서쪽으로는 생명수강물이 지중해로 연결돼, 맑은 물에 잉크를 넣으면 파란 잉크 물이 되고 사과나 포도나 매실의 원액 엑기스를 넣으면 맛있는 과일주스가 되듯, 7년 대환난 때에 일어날 초대형 화산과 지진, 섬들과 육지가 바다에 잠기고 대륙이 바다에서 솟아나는 거대한 지각변동과 지구를 돌고 있는 수많은 혹성들이 지구를 충돌하는 천재지변과 인간이 만든 첨단무기들이 모두 사용되는 전쟁과 온갖 질병으로 오염된 지구촌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오는 생명수에 연결되므로 남극에서 북극까지 동양에서 서양까지 다시 새롭게 살아나 지구촌의 모든 사막과 불모지와 얼음 땅들이 없어지고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을 창조하신 때처럼 오대양 육대주가 에덴동산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계시로 보았다. 그러므로 말세성도는 네 번째 성전인 천년왕국 성전을 마음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사모하고 기다리며 기도해야 한다.

 

물고기 뱃속에서 밤낮 사흘 동안 그 마음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했던 요나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70년 동안 기도했던 다니엘처럼 오늘 우리, 종말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내가 살고 생활하는 곳에서 날마다 눈에 보이는 성전,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할 것이며 우리 몸을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 만드셨으니 날마다 성전인 우리 육체를 거룩하게 만들면서 기도할 것이며 잠시잠간 후면 세상에 다시 오셔서 지구촌에 세우실 예수님의 천년왕국 성전을 사모하면서 그날을 바라보고 기도할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자. 하나님의 성전인 내 몸을 기도하는 집을 만들자. 불원간에 지구촌에 세워질 천년왕국 성전을 사모하면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시편 저자는

 

“주의 집에 거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라고 노래했다.

 

그렇다. 하나님이 계신 성전을 바라보고,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성도, 그 마음이 주의 집 성전에 거하는 자,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어 주께로부터 힘을 얻고 항상 찬송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이다. 그런 성도는 인생의 눈물 골짜기(The valley of Baca), 하루도 슬픔의 눈물이 떠나지 않고 탄식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 골짜기를 많은 샘물의 골짜기, 많은 축복의 골짜기를 만들며 삶의 모든 환경을 기적의 땅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성경의 약속대로 힘을 얻고 더 얻어(They go from strength to strength, 메하일 알 하일: 힘으로부터 힘에로!-지속적으로 힘을 얻고)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는 축복을 받는다.

 

성전을 바라보고,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자. 성전인 우리 육체를 거룩하게 보존하여 기도하는 집을 만들자. 장차 세워질 메시야 성전을 마음에 그리며 그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자. 성전을 바라보고,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최고의 복된 성도가 되기를 축원한다.

 

 

 

 

 

 


김엘리야목사(워싱턴 주기도문 교회)

www.czoneus.net
info@czoneu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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