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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14시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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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박철수](간증)31.도둑놈 소리를 들으며
 

31.도둑놈 소리를 들으며

 첫째의 사고로 잘 못을 깨닫고 다시 신학을 계속하기로 결정하고, 곧 바로 신학교 2학년 2학기 복학을 신청했다. 그 사건이 일어난 때가 바로 신학기를 개학할 시기였던 것이다. 불과 며칠을 앞에 두고 그러한 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야말로 아무런 대책도 없이 신학교에 복학을 했으니 등록금도 납부를 하지 못하고 복학을 했던 것이다. 생활 대책도 없이 신학교를 복학했으니 등록금을 낼 형편이 안 되었던 것이다. 신학교는 야간으로 다녔다. 주간에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밤에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등록금을 안 내고 다니는 학생들이 몇 명이 있었는데 학교 당국에서는 계속해서 등록금을 납부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심지어 전교 채플시간 중 공개석상에서 등록금을 안내고 공부하면 도둑놈이라는 소리를 듣기를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오죽했으면 등록금도 내지 못하고 다니고 있을까! 라고 서운한 마음이 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결국 두 학기를 등록금을 못 내고 다니면서 학교로부터 경고를 여러 번 받기도 했다. 3학년 2학기를 다닐 때 밀린 등록금을 모두 납부하였고 무사히 신학교 공부를 마칠 수가 있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다.

학교를 다닐 때, 그래도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다. 야간에 공부하는 학과니까 대부분 직장을 다니는 학생들이 많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믿음의 열정에 불타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신학을 공부하며 목회의 꿈을 꾸는 목회자 후보생들이었다. 그중에 나이가 비슷한 학생이 있었는데 직장이 서울 구치소였다.

직장을 마치고 학교에 와서 저녁식사를 하고 공부를 하는데 그래도 직장인이니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니까 항상 그 학생이 저녁 값을 내주었다. 빨리 준비되는 라면 종류인 너구리라는 라면을 맛있게 먹던 기억이 난다. 나이가 비슷한 연배 인지라 항상 같이 대화를 나누고 서로 잘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나이가 꽤나 되었는데도 아직 결혼을 하지 아니한 총각이었다. 그리고 양친 부모님이 안계시고 결혼한 누님이 한 분 계셨다. 그러니 세상 적으로는 외로운 처지였다. 그래서 아는 장로님을 통해서 그 교회 나이 많은 노처녀 전도사님과 중매를 서게 되었고, 결국 두 사람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노총각 노처녀가 만났으니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어야 당연한데 아쉽게도 결혼 하여 아들을 둘 낳고 인천에서 개척교회를 하다가 그만 새벽기도를 마치고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6살 된 아들과 불과 몇 개월 된 신생아를 놔두고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야말로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개척교회를 한다고 고생고생 하다가 결국은 하늘나라로 먼저 가신 것이다. 평상시 몸 관리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사람의 생명은 우리 사람이 알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사모님과 자녀들은 한 동안 한국에 계시다가 미국에 살고 있는 친정가족을 통해 미국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후에 듣게 되었다. 참으로 지금도 아쉬운 마음이 든다.

또 한 학생은 모 방송국 기자였는데 야간에 신학교를 다니게 된 것이었다. 역시 선교의 열정에 불타는 마음으로 신학에 입문을 하게 된 것이었다. 역시 연배가 비슷해서 함께 자주 대화도 나누게 되었고, 취재를 다닐 때 같이 다니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그 학생은 계속해서 기자생활을 했고, 지금은 모 대학교의 교수로, 서울의 큰 교회 장로로 충성하고 있다. 나는 역곡에 있는 작은 교회 교육전도사로 부임하여 주일학교, 중고등부, 청년부, 성가대까지 그야말로 동분서주 하면서 전도사의 사명을 감당했다. 물론 보수는 교통비 수준에 지나지 아니했다. 그런 상황이니 경제적으로 무척 힘든 시간이었다. 신학생, 교육전도사, 가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힘든 과정의 시간들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박철수 목사(익산봉곡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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