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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6시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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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국진의 신앙에세이
 

누가 진정한 이웃이냐? 고 예수님은 물으셨다. 또 하나님은 레위기에서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집단의 유지와 집단 자체의 건승을 위해 우리의 이웃들을 서로 사랑하여야 할 필연성에 대해 말씀하신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예수님 가르침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행위로써 짓는 죄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짓는 죄까지, 아니 오히려 더욱 더 정죄하신다는 점이었다.--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연좌맷돌을 메고 저 바다에 던지움이 마땅하니라.

인간으로서 복잡한 사회를 살아가다보면, 우리는 때론 어떤 사람을 미워하게 되기도 한다. 이것이 보통의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경계하시기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는 것조차” 하나의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상대방의 잘못이나 실수조차 너그러이 감싸주고, 미움과 증오대신에 따뜻한 애정의 마음으로 전환토록 권고받는 것이다.

누가 진정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느냐?고 예수님은 물으신다. 이를 매우 극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예증하신다. ---길가의 강도당한 이웃을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저 지나친다.

반면에 어떤 사마리아인은 상처를 싸매주고, 의원으로 데리고가고, 그 값까지 치르어주고 자신의 길을 떠난다. “이 중에서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하고 예수님은 물으신다.

처음 지나친 사람들은 구약적이고 율법적인 지도자층들이었는데, 이들은 말로는 ‘여호와의 사랑의 율법’을 되뇌이고, 사랑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그것은 결국은 겉으로 꾸며진 신앙이었을 뿐, 진정한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는다.

반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경우, 자신의 시간과 노력과 재물을 들여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벗이자 진정한 이웃이 되었다. ‘사랑을 직접 실천’한 사람이 된 것이다. 여기서 비판되고 있는 이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끝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앞장서게 된다. 이 비유로써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이웃사랑을 직접 실천하는 진정한 이웃이 되거라, 하고 가르치신다.

우리는 예전부터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좋은 건 없을걸” 하고 믿어 왔다. 즉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고 최고의 인간적 가치라고 믿어 왔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율법의 문구들을 섬기는 사람이나, 마음으로만 사랑을 갖는 것보다, 실제로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사람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우리의 모범으로써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철학에서 원효는 “자리 리타행”을 설파한 바 있다. 즉 “스스로를 이롭게 하면서(自利), 타인을 이롭게 함(利他行)”이 불교의 실천덕목임을 밝힌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이웃사랑을 할 것인가?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우선 우리 스스로가 ‘진정한 벗’이 되어주어야 하고,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존재하고 있는 친지들이나, 나의 주변 사람들, 내가 접하고 있는 모든 사람, 주변의 모든 인간세계가 나의 손길을 바라는 이웃들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주변 세계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바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도록 노력하여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한 그리스도인 되기’는 그리 쉽지 않은 문제인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는 때론 자기 희생도 필요하고, 때론 적극적인 봉사정신도 필요하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희생과 봉사의 사랑의 구체화는 역으로 우리 자신에게 큰 기쁨과 보람을 갖게 해주기에, 우리는 힘을 얻어 그리스도인다운 사랑의 행동을 기쁨으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힘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우리가 사랑을 베풀 때에 가져야 할 기본 자세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한다.” 우리가 사랑의 행위를 실천할 때에도 우리 자신은 자랑치 말아야 하며, 그 실천으로 교만해지지 말아야 하고, 자기의 유익과 반대급부를 구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나의 선행으로써 축복을 기대하는 것도 반대급부를 구하는 것이 될 것이다. 댓가없이 선행함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구약율법의 기본정신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이었다.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그대로 갚아주라는 것이었다. 이 율법정신은 예수님에게로 오면 급진적인 전환을 보게 된다. 즉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차원 높은 사랑의 정신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원수사랑을 십자가 상에서 실제로 친히 나타내시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주시옵소서.” 자기를 죽인 그 적대자들을 오히려 측은하게 여기고, 그들의 범한 것을 용서하여주기를 하나님께 간구하였던 것이다.

또한 로마 군병들이 메시야 그리스도를 잡으러 왔을 때에도 예수님은 자신의 원수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으셨다. 체포하러 온 로마군병들에 맞서 베드로는 칼을 들었고, 그들을 베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떨어진 귀를 붙여주는 사랑의 행위를 하시었고, 그들에게 폭력적으로나 반항적으로 대하지 않으셨다. 순순히 잡혀가셨다.

그리하여 십자가 처형을 당하면서도 그 자신이 기적으로써 스스로를 구하려하지 않으시고, 묵묵히 처형당하셨다. 이로써 예수님은 위대한 인류애를 보이신 것이다. 인류 전체의 구원과 사랑을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내맡긴 것이었다.

예수운동에 대해 적대적인 세력이었던 로마제국조차, 바울의 로마선교를 거쳐, 마침내는 로마제국 전체가 기독교화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에게 적대적인 무신론자들조차 품어 안고, 긍휼과 측은지심으로 감싸주어,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품안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구원의 기적이 가능함을 믿고 그들에게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10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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