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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2시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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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장막 르네상스

잃어버린 법궤

1981년에 스필버그와 루카스 두 성공적인 영화 제작자가 만나 처음 공동제작한 영화 "잃어버린 법궤의 추적자들(Raiders of The Lost Ark)"은 최고의 호평을 많이 받았던 다큐멘터리 영화로서 여전히 최고 10위 안에 드는 흥행을 기록하고있다.
 
이 영화는 예루살렘 법궤의 행방을 유대 성서학자들의 자문하에 상상력을 동원해 추적한 영화로 이집트의 한 신전에 보관되었던 법궤가 2차대전중 나치독일군과 인디아나존스와의 스릴있는 경쟁끝에 미국 고고학자의 손에 넘겨져 국방성창고에 보관되는 것으로 끝이난다. 
 
그런데 이 영화에 깊은 영향을 받은 영국의 한 언론인 헨콕은 1992년 "신의암호/상징과 봉인"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법궤의 역사적 행방을 추적한 수준있는 논픽션으로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솔로몬 왕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보관되었던 법궤는 B.C. 6세기경 바벨론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때 사라졌다고 보는데 위의 두 영화와 책에는 르호보암 5년에 이집트의 파라오 시삭이 쳐들어와 성전의 보물창고를 털어갈 때 법궤도 전리품으로 가져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무튼 솔로몬 왕 사후 행방이 묘연한 법궤는 인류 역사동안 최대 관심사중 하나가 되어와 많은 작품의 소재로 씌여져 온것이 사실이다.

다윗의 법궤 안치

역대상 16장에는 "다윗의 장막"의 내용이 나온다. 일찌기 엘리의 두 아들 흡니와 비느하스의 불신앙으로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긴 이후 벳세메스를 거쳐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어진 법궤는(삼상4) 70년이 지나서야 비로서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다윗이 마련한 장막으로 옮겨지게 된다(삼하6;역상13:5). 

그런데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옮기는 역사적인 도중 그만 언약궤를 붙들었던 웃사가 하나님의 치심을 당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게 된 다윗은 석달전 실수를 거울삼아 규례대로 아론의 후손과 레위 사람들만을 뽑아 엄중히 정결케 한후 노래와 악기로 찬양을 하는 가운데 언약궤를 메어오도록 하여 성공적으로 안치시킨다.
 
안치식에서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후 백성들을 축복하며 기념음식을 나누어주고 레위인들로 하나님을 찬양할 찬양대를 조직하여 섬기며 자신이 직접 지은 찬양시로 감사찬양을 하게 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다윗의 장막은 성소로서 오늘날 교회와 성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예표하는 것이다.  
 
상징과 모형

상징(象徵, symbol)이란 어떤 추상적인 관념을 구체적인 사물이나 심상을 통해 암시하는 표현방법으로서 보통 비슷한 것이나 연상되는 것 또는 관례에 의해 표현되어진다. 그러기에 상징(symbol)은 다분히 간접적이고 비유적인 것이어서 '상징되어지는 것(what is symbolized)'과 구별된다. 즉 상징은 상징 되어지는 것인 실체와 꼭 같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로서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며 독수리는 용맹의 상징이 된다.
 
이에 비해 모형(유형, 예표:type)은 "동일한 물건을 만들기 위한 틀의 의미"로 실체와 유사성을 지닌다. 구약성경의 역사에 나오는 인물이나 사건, 사물등을 신약의 계시에서 구현된 모형 - 그림자적 진리 - 구원의 예시로 보는 것을 성경 해석학적으로 모형론(typology)이라 한다. 요나의 경험이나 광야의 놋뱀, 멜기세댁, 할례나 희생제사등이 이에 속한다.

구약성경은 모두 그리스도를 언급하는 내용 즉 죄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구속을 예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예수께서도 이를 몸소 증명하셨다(눅24:44; 행3:24). 따라서 성경의 모형들은 역사성과 점진적 계시성을 띄며 예언적인 동시에 그리스도안에서 종국적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이다 (고전13:12).

그러나 모형론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것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하나님의 진리는 구속사적인 통일성 안에서 생명력을 지닌 동등한 가치로서 같은 비중으로 역사한다는 점인것이다.   
 
다윗의 장막의 의의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하리라 이는 이를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9:11-12) 

사도행전 15장에는 바나바와 바울이 이방인 사역중에 일어난 표적과 기사에 대해 말씀을 전한후 야고보가 암몬서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했을때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메시지를 전하는 내용에서 하나님이 장차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신다는 말씀이 나온다.
 
왜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암몬과 신약의 사도행전에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솔로몬의 성전대신 그것도 제대로 양식이 갖추어진 모세의 장막도 아닌 내용상 허술하기 그지없는 다윗의 장막을 들어 말씀하셨을까?
 
다윗이 살던 시대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블레셋)과 수세기동안 연속적인 전쟁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 직전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긴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성소로 되가져오기 위해서 노력을 하게 되는데 언약궤를 탈취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큰 재난에 처하게 된 블레셋은 마침내 유대로 언약궤를 돌려주게 된다. 그러나 법궤는 수십년동안 유대와 블레셋의 경계지역인 아비나답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사울의 전 통치기간 동안 언약궤를 모세의 장막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이 없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사울은 인본주의 신앙으로 사무엘 선지자의 가르침에 계속 도전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은 자가되어 급기야 버림을 당하였고, 회개대신 다윗에 대한 시기와 피해의식 때문에 놉의 제사장들을 죽이기까지 하였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삶을 산것이다. :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다시 옮겨오자. 우리가 사울의 때에는 궤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대상13;3). 
 
반면 다윗의 삶은 사울에게 쫓겨 풍전등화와 같이 목숨이 위태로웠던 수많은 경우에도 오로지 하나님의 얼굴만을 바라보는 진정 법궤와 함께 한 삶이었다. 다윗은 왕이 된 후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긴후 언약궤를 본곳인 실로로 되돌리지 않고  자기가 임시로 마련한 새 장막 가운데 안치시켰던 것이다.
 
이 장막에는 모세의 장막과는 달리 제단을 비롯한 제사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 법궤를 안치한 후 드려졌던 봉헌 제사외에는 그 후 다른 제사가 드려지지 않았고 대신에 아삽과 그가 이끄는 찬양대가 궤앞에서 주야로 날마다 섬기며 찬양하게 하였다(대상 16). 당시 놉과 기브온에 성막이 있었는데 번제는  언약궤가 없는 기브온 성막에서 드려졌다.
 
다윗의 장막은 단순하게 그러나 조직적으로 감사 찬양에 올인하였던 곳이었다. 찬양과 경배와 전도사역과 예언과 함께 중보기도가 24시간 끊이지 않는 곳으로서 다윗이 하나님의 얼굴을 전심으로 구하는 곳 이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시27:4)
 
법궤의 의의
  
우리가 '다윗의 장막의 영'으로 기도하며 찬양한다고 할 때 '다윗의 장막의 영'에 대하여 구약시대 다윗의 장막에서 법궤를 모신 것에만 역점을 둔다면 언뜻 요즘 시대에 맞지않은 예배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법궤의 의미에 관해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같다.
 
첫째로, "다윗의 장막"과 "장막의 영"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다윗의 장막'은 성막으로서 오늘날 교회와 성도, 그리스도의 몸의 모형이 되므로 '장막의 영'은 '하나님의 영'을 일컫는 말이 된다. 따라서 '다윗의 장막의 영'은 다름아닌 예수의 영, 성령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하고 찬양한다는 의미가 된다.

둘째로, 법궤가 있는 일정한 장소로만 장막의 의미를 국한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법궤를 구약시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인 - 그것도 박제화된 - 안목에서만 봄으로 인해 법궤가 예표하는 실체인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과 "성령"을 간과하고 있다면 잘못이다.

사실 구약 시대에도 법궤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저절로 대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법궤의 뚜껑에 해당하는 속죄소(mercy seat)는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인간과 만나시기로 약속한 장소였으며(출25:22),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속죄피를 들고 들어가 속죄해야 하는 곳이 됨으로써(레16) 예수그리스도의 화목제사를 예표하게 된 것이다.

법궤나 성전이 하나님과 저절로 동일시 될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생수의 원천인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 스스로 죄악에 빠진 백성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이 성전에 사신다"고 자위하거나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고 떠드는 거짓말을 더 이상 믿지말라고 책망하셨을뿐 아니라 성전을 의지하고 죄만 짓기 때문에 성전을 부수겠다고 까지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렘7).

또 더 나아가 "...어느 누구도 법궤를 찾거나 그리워하거나 생각하지도 않게 될것이다. 법궤를 아쉬워하는 사람도 없고 새로 만들어야 할 필요도 없을것이다. 그때에는 예루살렘 전역이 나의 보좌가 될것이기 때문이다(2:13; 3:16-17)"고도 말씀하신다.

결국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법궤나 성전 자체가 아니라 한결같이 예배자의 예배정신, 전인격적이고 성령충만한 예배정신, 예배자의 생활태도와 행실인 것이다.

그러므로 법궤가 우리 밖에 있거나 우리 안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공히 법궤의 참 정신 즉, 다윗의 장막의 영(spirit)이라 할수있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정신이 촛점인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한편 법궤와 성전이 갖는 고유한 상징과 의미를 축소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1:22에서 요한이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고 말씀한 반면에, 또 여러 곳에서는 하늘성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바,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인다(11:19)"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상 성소가  원형이 되는 하늘 성소의 식양(tupos: type)을 본떠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하늘 성소도 어떤 형태로든 존재할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타당할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법궤와 성전이 가지는 상징성과 모형성은 본질상 생명력이 있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것이다.)
 
셋째로, 현시대처럼 유동적이고 바쁜 시대에  만약 어느 곳에서 24시간 365일 하는 찬양과 기도의 센터가 세워졌다면 이는 시대적으로 영적 각성을 위한 예배와 기도운동의 사명을 띄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본질상 역동적인 신앙의 진리를 전하는 사역지를 일차원적인 장소나 건물에 국한해서만 바라보는 시각은 바람직하지 않을것이다. 의식의 카테고리화는 기계적 평면적 사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이는 내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것임이라(56:7)"는 구약의 성경구절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그대로 적용하기에 아무런 하자가 없는것이 아니겠는가?  

영적 시대상황의 유사성

또 생각해보건데, 그러면 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기도한다면 간단한 것을 굳이 다윗의 장막의 영으로 기도한다는 표현을 선호할까?  이는 다윗이라는 인물의 신앙수준에 따른 성경적인 비중 외에 또 그 시대 상황적인 의미가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상황에 도전이 됨과 아울러 유사성이 있기에 이러한 콘텍스트에서 인용한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보여진다.

다윗이 법궤를 가져오기 70여년 전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에벤에셀 전투에서 패하여 언약궤를 빼앗겼을 당시는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있었던 때로 사무엘이 성장하던 시기였다. 당시 제사장들은 영적으로 무지하고 윤리적으로 타락한 시대였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삼상3:1)".

영적 지도자들은 자신의 소유와 관계를 더 중요시하여 말씀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씀을 맡은 자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죄악을 저지르게 되어 성전을 죄의 소굴로 만들었던  것이다. 개인윤리, 가정윤리, 사회적 윤리가 무너지어 성적 타락과 불륜이 팽배한 시대였으며 바르게 교훈해야 될 지도자들이 어두워짐으로 모두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경고인 블레셋의 침입에 직면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회개하며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대신 타성적으로 하나님의 임재의 외적 상징일뿐인 법궤만을 믿고 실로에서 가져온 언약궤를 앞세워 전쟁터로 가져갔다가 도리어 이로인해 적군의 기상을 자극하는 역효과만을 가져오게 되므로 결국 전쟁에 패하고는 법궤마저 빼앗기게 되었던 것이다.

법궤 자체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인한 이들의 신앙은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성격을 지닌것으로 다분히 불성실하고 비순수하며 외식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법궤의 참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간과하고 자신들의 순결한 신앙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로서의 법궤의 상징적 역할이 제 구실을 하게되는 진리를 망각하였던 것이다. 즉 법궤의 참 정신을 몰랐던 것이다. 

다윗의 출생시기는 사무엘 선지자가 노쇠해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를 사사로 세웠던 때였는데 불행히도 이들 역시 부당한 이익을 탐하며 부정한 재판을 하는 악행을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을 들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였던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었다(삼상8). 우리의 영적 시대적 상황도 이러한 시대 상황으로부터 전격 자유롭다고는 할수 없지 않겠는가?

다윗의 충성스런 신앙심 - 다윗 장막의 영(spirit) 르네상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다윗은 사울 왕과는 달리 70여년간 빼앗겨 있던,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노심초사 전심전력을 기울인 끝에 드디어 예루살렘 장막에 즐거이 안치하게 되었던 것이다.

웃사 사건후 삼개월 동안의 근신기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깨우치기 원하셨던 것은 바로 법궤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만을 앙망하는 법궤의 참 정신(spirit)이었으리라...  얼마나 자유함 가운데 감격에 겨웠으면 왕의 체통도 잊고 이리저리 뛰고 춤추며 기뻐하다가 아내의 멸시까지 받게되었을까...다윗에게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즐거워하고 하나님 한 분으로만 행복한 참 예배정신이 충만했던 것이다.  

언약궤에 대한 다윗의 갈망과 기쁨은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사모하는 순전한 예배정신의 발로였던 것이다. 이토록 감사와 기쁨의 영적 축제속에서 제사의 직분과 조직을 정비하여 성막을 근간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생활을 재 정비하였던 다윗의 업적 - 열정적인 신앙심의 진수는 바로 하나님, 주님 한 분만을 향한 순수한 열심이기에 오늘날 교회사회에 리바이벌되어 "다윗의 장막의 영 르네상스"를 일으키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아니 이 시대가 요청하는 신앙의 모본인 것이다. 이 역사적인 기록이 이미 B.C.5세기경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언약궤가 있던 성전을 재건축하고 신앙을 회복하기위해 쓰여졌듯이 말이다.

이로볼때 기도찬양 사역의 올인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다윗의 장막의 존재가 지니는 귀중한 신앙적 가치유산을 되살려 오늘날 가슴없이 메마른 교회사회의 영성을 갱신하기 위한 비젼을 품고 있다고 보여진다.

다윗의 주옥같은 신앙 고백은 주의 장막을 향한 사랑의 그리움으로 생생하게 표현되어 오늘도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

다윗이 사모하고 경배한 것은 법궤나 성전 자체가 아니라 '생존하시는 하나님', '온 땅에 아름다운 주의 이름',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선포하는 하늘', '영혼을 소성시키며 지혜롭게하며 정직하여 기쁨을 주며 순결하고 정결하여 영원에 이르는 도(19)', '안위하심과 의와 선하심과 인자하심(23)' -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로 인한 신령한 은총, 찬송과 기도의 영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장막의 영"이 아니고 무엇이랴...

영적 안목과 통찰

오늘날 교회사회 일부에서 보여지는 우려는 성경의 진리를 너무 평면적으로 구분하거나 도식화하여 지나간 상징으로만 보고 있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성경적 진리에 대해서는 될수있는대로 연계적인 통일성 가운데 현재 진행적이며 입체적으로 사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성경의 진리는 구약이나 신약이나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현재성 즉, 통시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속에 간직된 살아 숨쉬는 상징이나 모형들을 단지 피상적으로만 이해하고 바로 깊숙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늘날 이 생명력의 상징이나 모형들은 한낱 박제된 골동품으로 전락하고 말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패턴의 위험성은 교회사회에 역으로 심각한 부작용마저 가져올 소지가 다분하다. 예를 들면, 다윗의 장막의 영으로 예배한다고 할 때 그것을 때 지난 법궤를 섬기는 정신으로 오해하듯이, 동일선상에서 하나님 편에서 보시는 다윗의 신앙적 인정을 그의 지나간 범죄적 행위도 거저 쉽게 용납되는 것으로 오인 해석하는 사례등이다. 이것은 앎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요, 영적인 안목과 통찰의 문제인 것이다.

크리스찬의 자세

우리 모든 크리스챤들은 오늘날 비록 온전치 않아도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위임받은 자들이다. 우리 모두는 지도력과 영향력을 발휘하고 예배의 삶을 살며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다. 선지자나 예언자로서의 사명은 은사의 정도가 다를지라도 기본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므로 참-거짓 예언자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타인이 아니라 오늘날 바로 내 자신에게 적용되어지는 말씀으로 새겨야 할것이다.

예레미아서에는 예언자를 비롯하여 모든 성직자와 지도자를 규탄하며 탄식하는 말씀이 자세히 나와있다(23:9-). 참된 지도자, 참된 예언자, 참된 성도의 기준은 구약과 신약을 막론하고 다름아닌 죄악에 대하여 통분히 여기며 피눈물을 흘리고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자세를 가진 자임을 깨닫게 된다.

다윗과 같이 자신의 죄를 진솔하고 정직히 하나님께 고백하며 고범죄를 범하지 않기를 간구하며 자기와 타인의 영혼에 대하여 의롭고 성실히 책임을 질 줄 아는 자가 참된 지도자요 에언자요 성도이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잃어버린 법궤를 찾기를 소망한다. 상징과 외식이 아닌 생명과 진실의 법궤정신인 예배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아름다운 다윗의 장막의 영으로 충만하여 날마다 찬양과 기도속에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늘 간절히 사모하는 삶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고후 5:2). Blessed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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