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의 페르조나(Persona) - 기독뉴스
모바일보기
기독뉴스 개편사이트 안...
2024년 05월 20일
 
뉴스 오피니언 방송사진 커뮤니티 2세뉴스
기사등록 I 독자마당 I 광고후원 로그인 회원가입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참빛칼럼
2011년12월28일 02시52분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크리스찬의 페르조나(Persona)
요즈음 틴 에이져인 딸 아이와 사사건건 부딪히면서 갈수록 자신의 한계가 느껴져 패배자처럼 혼자 누워 곰곰히 생각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니 생각하는 시간이라기 보다는 내 안의 감옥을 느끼는 경우라는 표현이 더 타당할듯 싶다. 그런데 감옥의 감정을 느끼는 와중에 나의 내면으로부터 들려오는 꾸준한 한 음성이 있었다.  
이 음성은 현재의 나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과거의 어떤 유전적 전통과 또 후천적으로 습득된 어떤 규율에 단단히 묶여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본능적 암시 같은 것이었다. 하여 나도 모르게 신음처럼 터져 나오는 말은 “아마도 집단 무의식…”이것 이었다.
생각해 본다. 왜 나는 딸 아이에게 이런 옷만을 입어야 한다고, 이런 언행을 해야만 마땅하다고, 시간을 엄수해야 한다고, 이런 책을 읽으라고, 매일 같이 규칙적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고, 성전에서는 찬송가만 연주해야... 한다고 고집하며 강요하며 윽박지르는 것일까? 더구나 고분 고분한 성격도 아니고 에너지가 너무도 넘쳐나는 아이에게…?
기억을 해본다. 나의 어머니는 나의 학창시절 귀밑 삼사 센티 정도의 단말 머리만 허락하시며 머리가 조금만 길어져도 품행이 단정치 않은 인격으로 간주하셨고,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나 혼자 방안 공부 상 앞에 무릎을 꿇고 앉게 하셔서는 엄격하신 태도로 국어 책을 두번 통독하기 까지 가르치셨으며, 너는 항상 조용하고 깨끗하게 집에 앉아서 책만 읽고 어중이 떠중이들처럼 나가 놀지 말라고 하셨다.

속으로는 불만이었는지 몰라도 겉으로는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큰 딸이어서인지  평시와는 다르게 손님이 오실 때면 늘 나를 칭찬하시며 그때마다 나를 낳으시기 전 태몽에 꼬옥 당신 맘에 드는 손목시계를 보셨다고 자랑하시듯 흐믓해 하시곤 하셨다. 
그러나 나는 평소 칭찬에 인색하셨던 어머니께서 어쩌다 방문하시는 손님에게 우리 딸은 보증수표라는 식으로 나를 칭찬을 하실때면 되려 몹시 창피하고 마치 내 흉을 보시는 것처럼 속으로 골이 나기 일수였다.  

또 지금도 기억하는 스트레스는  이웃 어른들을 만나거나  또 어쩌다 마주친 동네 언니 오빠가 얘는 그림같이  예쁘게 생겼다고 서로 소곤거리거나 또는 어머니를 따라 미장원에 갈 때마다 미장원 아주머니가 따님이 아주 예쁘니 이담에 크면 미스코리아에 내 보내세요란 소리에는 정말 죽을 기분이 들곤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어머니께선 설상가상으로 늘 “얼굴만 예쁘면 되나요? 키도 늘씬해야죠”하셨었다. 그래서인지 열심히 콩나물국을 먹고 줄넘기를 해서인지 초등학교 때엔 키순으로 앞줄에서 서너번을 다퉜었는데 중학교 이 학년땐 많이 자라서 사십 팔번이 되고서는 퍽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의아한것은 왜 나는 어려서부터 도무지 남의 칭찬을 좋아하지 않는 아이로 자라났나 하는 것인데 그런 속성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다. 생각해 보면 이래저래 속으로 꼭꼭 눌려있어서 자존감이 매우 낮았던 탓이 아니었나 추측해 보게된다. 
그런 내가 이제 엄마로서 나와는 성격이 많이 다른 고등학생이 된 딸아이를 윽박지르고 씨름을 하고 있으니 스스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 아이는 매우 활발하고 용감하며 표현력과 이해력, 사교성이 매우 풍부하고, 동물 애호가이며, 나에게는 전혀 없는 손 재주까지 뛰어나서 컴퓨터고 전기용품이고 다 척척 고쳐내고 노래도 율동도 마라톤도 잘 할뿐 아니라 귀여운 얼굴과 예쁜 몸매에 패션 감각도 빼어난 정말 팔방 미인이다. 

 한번은 중학교때 클래식 서적을 안 읽고 요즘 책만 읽는 것 같아 '제인 에어'를 읽으라고 권하자 도리어 요새 시대에 그런 지루하고 따분한 표현의 작가는 어필하지 않는다며 내게 소설 작법에 대해 점쟎게 훈수를 주었을 정도다.  그런 아이가 조금 더 자라더니 이제는 웬만한 충고는 귀담아 듣지 않고 도리어 제 엄마의 신앙까지 분석하려 드니 어찌 당하겠는가?
엄마로서 한계상황에서 스스로의 내면의 소리에 눈을 떠 사색해보니 아이들에게 일일이 간섭하며 강요하며 스스로와 아이들을 속박하는 나의 성격은 아마도 암암리에 긴세월 동안 유전된 무의식의 발로일지 모른다는 깨달음이 마침내 들었던 것이다.
 
개인 무의식은 각인이 어릴 때부터 쌓아온 의식적인 경험이 무의식 속에 억압되거나 망각, 혹은 미약한 의식으로 남아 그 사람의 생각, 감정,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칼 융'에 의하면, 사람의 인격속에는 이 개인적 경험에 기초한 무의식 외에 특별히 집단적 무의식(集團無意識 collective unconscious)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집단적 무의식은 우리가 비록 의식하지 못하지만 옛 조상들의 경험적 의식이 오랜세월 축적되어 종족적으로 우리에게 유전된 것으로서 우리의 인격 전체를 지배하며 보편적 성질을 띄고 있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꽃을 아름답다고 여기거나 특정 동물을 혐오하는 예가 이에 속한다. 지혜의 보고가 되기도 하며 또 인식의 폐습을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의 인격이나 개성을 형성하는 이런 무의식들을 생각해 볼때, 우리가 생각하고 주장하고 믿는 많은 부분들은 원래 내 것이 아니라 남들의 생각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라 할수있고, 그러기에 우리의 인격이나 개성이란 것도 어쩌면 자기의 본 모습과는 차이가 나는 가면적인 것이라 생각할수있다.

그래서 인물이나 인격(personality)을 의미하는 심리학적 용어인 이태리어 페르조나(Persona)는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역할에 따라 썼던 가면(mask)이란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주입하셨던 유교성이 강한 경직된 사고도 결국은 어머니 안의 개인적, 집단적인 무의식이 가져다준 페르조나의 표현이며, 내가 아이에게 간섭하고 강요하는 이런 저런 요구도 주변이나 부모로부터 주입된 개인적, 집단적 페르조나의 산물인 것을 깨달을때 언뜻 놀라운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수 없다.

자신도 모르게 아이의 본질을–고유한 생명력과 특성을 훼방내지 손상시키는 무지한 엄마로 대부분 살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아프게 파고드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가? 가정이라는 집단에서 학교라는 집단에서 한국 사회라는 집단에서 종교사회라는 집단에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도 모르게 집단 정신에 동화되어 페르조나를 쓰고 살아오는 동안 유실되어 왔던 나의 진정한 자아, 나의 참 개성, 나의 본질은 어떻게 발견되고 회복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세상속에서 건전한 사회인으로 맡은 역할을 수행하면서 역할에 부응되는 각자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은 온전치않은 인간으로서 어쩌면 불가피한 존재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면은 뻔뻔스럽게도 보이고 혹은 연약하고 슬프게도 보이는 우리 존재의 현주소가 아닐까?
 
가면을 부정할 수 없을 때 현실과 괴리된 본질은 한갖 추상에 지나지 않으므로 본질이 현실적인 본질이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겐 가면과 잘 화해 해야하는 과제가 남을 것이다.

우리가 이 가면을 무시하거나 맹신하지 말아야 할것은 가면을 떠나서는 우리의 인격이 방종하거나 황폐해지기 쉽기 때문이고 또 너무 가면에 몰입하다가는 자칫 착각으로 교만해지거나 무의식적 위선자가 되기 쉽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크리스찬으로서의 집단적 무의식적 페르조나를 생각해 볼때 인간에 대한 성경적 정의는 언제나 우리에게 겸손하게 우리의 본질을 상기시키는 호소력이 있다. 성경은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혹할 정도로 적나라한 정의는 오늘도 에덴동산 나무사이 그늘 속에 숨은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 안에 있는 미숙하고 열등한 인격의 그림자를 실감하게 한다.
 
그러면 무화과나무 잎 치마의 속성과도 같은 이 가면과 화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가면이 지닌 어두운 그림자가 배태하고 있는 간극을, 모순과 긴장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수 없다. 요는 가면도 아니고 가면 뒤에 가려있는 실제 얼굴도 아닌, 참 존재(자아)의 원형적 본질의 회복이 주어져야 할것이다.   
  
융에게 있어서의 원형(archetype)은 집단 정신의 구조물로서 인간 정신의 시작에서부터 모든 경험의 침전물이다.  그러면 무엇이 '원형적 본질'인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기에,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원형적 본질이고 이를 회복하는 것이 곧 우리의 참 존재를 회복하는 길이다. 
 
프로이드와는 달리 융은 인간 무의식 속에 신성(神性)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 신성은 기독교의 삼위일체적인 신성이 아닌 종교일반적 신성에 가까우나 그가 무의식의 심층에 원형적 이미지로 각인된 신()의 형상을 말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영원한 사랑과 섬김의 생명력을 주고 받는 관계성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하나님을 위한 의지가 성육신 되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사람을 알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의 생명을 위해 우리를 쏟아붇는 열정적이며 견고한 의지를 말함이리라.
 
한편 프로이드가 정신활동의 에너지의 근원을 리비도에만 두었을지라도 그가 정신적 에너지를 생의 본능과 죽음의 본능으로 방향을 잡아 구분한 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라 할만하다. 생의 본능은 부드럽고 자유롭고 활기차고 빛의 속성이 강한 반면, 죽음의 본능은 경직되고 구속적이고 침울하고 어둠의 속성이 강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생의 본능을 지향한다. 크리스찬이 누리는 본질적 생명의 기쁨은 그러나, 죽음을 통해서 나온 것이므로, 이 죽음의 속성에서 전격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크리스찬에게서의 죽음은 생이 전제된 죽음이요, 어두움은 빛이 보장된 어두움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의주도하게 우리 안의 어두움(그림자)을 부드럽게 잘 관리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나갈(치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쉽게 어두움(그림자)속에 함몰될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안의 어두움을 다스릴수 있는(치유할수 있는) 방법은 오직 십자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지 않고는 우리는 영혼을 돌볼 수 없는 지성만으로, 어떤 다른 종교로도 본질과 페르조나와의 간극을 접목시키거나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불균형을 섬세한 균형으로 조화 시키거나 우리의 인격을 원만하게 통일하여 자기 실현을 도모할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언제고 시들고야 마는 무화과나무 잎이나 요나의 머리를 잠시 가리웠던 박 넝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의 보혈!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은 후 눈물로 감격의 찬송을 부르는동안 어느 새 양처럼 온순히 잠들어 있는 딸 아이를 안아보며 새삼 깨달아지는 것이다. 주님의 보혈! 참으로 놀라운 비밀이며 신비이며 은총임을...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뉴스스크랩하기
참빛칼럼섹션 목록으로
 
 달그림 (2020-08-10 20:17:45)     11   12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이름 비밀번호
 21872971  입력
댓글콘선택 : 댓글 작성시 댓글콘을 클릭하시면 내용에 추가됩니다.
[1]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참빛칼럼
다음기사 : 하얀 기도 (2011-12-28 02:53:20)
이전기사 : 다르게 치는 베토벤 (2011-12-28 02:52:27)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회사소개 보도지침 저작권 규약 이용약관 사업제휴 직원채용 광고후원 기사제보 연락처 don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