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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2시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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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와 예언의 본질성

필자는 최근 한달 전에야  처음으로 ‘신사도’라는 용어를 접하게 되었다.  그동안 특별히 사도행전을 비롯하여 신약 서신서들을 읽을 때마다  한가지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경이 호칭하고 있는 교회 직분의 하나인 사도직분과 목사직분과의 불분명한 차이와 아울러 사도직의  현재적 부재에 대한 의구심이었다(고전 12:28; 엡4:11).

어쩌면 이런 의문은 성경에 너무도 분명히 말씀되어 있는 사도적 목회자 상(狀)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러한 목회자 상의 현실적 결핍에 대한 유감이 강한 희구가 되어 표출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신사도”라는 용어는 충분히 필자의 관심을 환기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요사이 뜨거운 감자처럼 교회사회에서 이슈화가 되고있는 현상을 보면서 그동안 “사도적 목회성”을 갈구해온 입장에서 미력하나마 이에 대한 소견을 피력하는 동인이 되었음을 밝히고 싶다.

‘사도’는  '아포스톨로스'(αποστολοs)를 우리말로 번역한 것인데, 아포스톨로스는 '보내다''파견하다'는 뜻을 지닌 동사 '아포스텔로'(αποστελλω)에서 나온 말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를 일컫는 용어이다.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보냄을 받은 사도이셨다(히3:1).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았던 열두 사도와(요17:18; 20:21)바울,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의 대사요 증인으로서 세상에 파송된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도들인 것 이다(행13; 14:14). 또 교회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교사적 사도(messenger)들이 있다(고후8:23).    

그런데 일부에선 요사이 사도직 수여에 대한 비난이 한창이다. 어떤 이들은 사도직을 오직 초기 열두 사도에게만 국한시킨 나머지 사도직분의 임명권을 오직 성육신하셨던 예수께로만 돌려서 주님께만 속했던 사도 임명권을 가로채는 사탄의 속임수라고 비난하거나  요즈음 사도로 호칭되는 사역자들을  ‘자칭사도’니 ‘거짓사도’니 하며 공격하고 있다.

이런 이들은 협의의 사도적 의미에만 사로잡혀 보다 본질적인 사도적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후서에 보면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고후11:13)”는 귀절이 나온다. 

‘거짓 사도’라는 이 표현은 꽤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는,  사도직분을 맡은 자들이 특수하게 국한 되어 있지 않다는 가능성을 농후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만일 사도의 호칭이 초기 열두 사도에게로만 한정되어 있어서 이미 유대인들에게 알려진 상태라면 굳이 ‘저런 사람’들을 어떠어떠한 ‘사도’라고 호칭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즉 초기의 사도들을 Big Apostles라 한다면, little Apostles가 있었을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바울이 어떤 사도들을 ‘지극히 큰 사도들(super- apostles)’로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나(12:11),  자신을 “사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사도들의 다양성을 추정할수 있다. 

바울은 또 자신과 열두 사도 외에 주님의 형제인 야고보와 바나바,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등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고전 9:6; 15:7; 갈 1:19; 롬 16,7). 따라서 사도란 결코 초기의 열두 사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열두 기초석에 새겨진 열두 사도의 이름은(계21:14) 구약의 12지파가 구약의 모든 성도를 대표하듯이 신약의 모든 성도를 대표하는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

두번째는,  ‘거짓’이라는 수식어인데 이는 당시 고린도에 스며든 율법주의자들이 전한 내용을 지칭한 것이다.  이로써 선명한 것은 ‘거짓’이 시사하는 내용이 초기 열두 사도와는 다른 인격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벗어난 메시지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 복음서에 는 ‘거짓 선지자’나  ‘거짓 그리스도’라는 용어가 나온다.  ‘거짓 선지자’는 예루살렘 멸망전 자신을 메시야로 자처하여 백성들의 구원을 보장한다고 선동했던 부류였으며, 초대교회에서의 ‘거짓 선지자’는 유대주의적 율법주의로 복음을 희석시켰던 자들을 일컫는다. 

또한 ‘거짓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함락 전 ‘드다’와 백성들을 광야로 유인했던  ‘갈릴리 유다’(행5:36,37; 21:38)를 비롯한 사마리아 인등의 유대 민족주의적인 메시야운동권 리더들을 말한다.  그리고 재림이 가까운 종말전 출현하는 ‘자칭 그리스도’라 하는 자들을 일컫는다(마24:23).

사도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저질렀던 악행을 열거하고 있는바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11:20)”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거짓 사도들이 상전행세와 물질에 대한 탐욕으로 성도들의 재산을 탈취하는 것과 성도들을 완전히 미혹하는 것과 성도들을 오만한 태도로 대하는 것과 성도들에게 폭력행사를 함부로 휘두르는 사례를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대비하여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복음 전파를 위한 자신의 수고와 고난과 희생과 약함을 자랑하고 있다(11:30).  그러나 거짓 사도들은 허탄한 자랑과 인정받는 외적 조건을 내세워 자신의 신분, 혈통, 지위, 학식, 언변술을 자랑하였다.         

따라서 임의적으로 불렀던 용어가 점차로 ‘거짓 사도’로 고유명사화 된사실을 보건데, 상대적으로 참 복음을 전한 ‘참 사도’가 있다는 반증이 성립된다. 

같은 장 앞선 절에선 ‘다른 예수’…’다른 영’…’다른 복음’이란 표현이 나온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때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11:4)”

이는 고린도 교회에 잠입한 거짓 사도들이 바울이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본질적으로 다른 예수를 전파한 사실을 지적한 것으로 여기서 ‘다른 예수’는 역시 본래 예수와 다른 인격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에 대한 믿음의 성질의 상이함을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다른 영’과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을 통한 은혜의 복음을 인정치 않는 변질된 이설(異說)로 추정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도직분의 자격은 참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특정인물에 국한되는 자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기 사도직은 그리스도로부터 위임을 받아 정통성과 권위,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인데, 오늘날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성령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으로 위임되는 것으로 초기 사도 직분자와 동일한 정통성과 권위, 성령의 능력이 주어진다고 보는것이다.

그간 교회사속에서 전통적으로 사도직과 목회직을 굳이 구분하여 온것이 사실이지만 실제 사도 들이 또한 목회자이기도 하였던 사실을 볼때 이는 실로 불필요하고 부자연스런, 비 생산적인 구분이었다고 느껴진다.

이것은 오랜 세월 그리스도로부터의 사도권의 직접적인 임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있어서 그 시초의 위대한, 시공을 초월한 영적 의미보다는 국한된 시공(時空)적 의미에만 너무 가치를 둔 나머지 ‘사도성’의 ‘박제화(剝製化)’현상이 오랜 세월 진행되어 온 결과를 낳았다고 볼수있다. 그 부작용으로 동전의 앞뒤같은 사도-목회성에 사도성이 제외되거나 결여되어 목회관의 불투명함과 불확실성이라는 누수현상이 생겨온것 같다.

목회자로서 사도적인 정통성의 아이덴티티와 영적 권위와 영적 능력의 부실 내지 실종으로 급기야는 오늘날의 목회자는 신학적 목회자나CEO적 목회자 혹은 영적인 기술자(Spiritual Engineer)등으로 변질되거나 전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사도’라는 호칭에 대해 과민한 저항감을 느끼고 ‘사도권’을 곧 ‘목회자 상전권’이나 오만의 표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아마도 구태의연한 관습과  안이한 기존 질서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의 속성이  기존 관점과 차이가 나는 어떤 새로운 질서와 흐름을 경계하고 나아가서는 자기 위치에 위협을 느끼는 방어 심리 기제의 반응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놓쳐서는 안될것은 본질에 더 충실한 변화라면, 진보적 변화에 대한 관심과      수용의 자세이다.

그러면 과연 사도권은 무엇인가 살펴보자.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도권은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며 인내하는 것”이고(고전9:12)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되는” 역설적인 권리다(:19).  사도의 직분이란 다름아닌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서의 직분인 것이다(고전4:1).

또한 바울은 사도의 표(mark)로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signs, wonders, miracles and great perseverance)”을 들고있다(고후12:12).  바울이 한 말과 일, 표적과 기사의 능력은 복음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성령의 능력의 역사하심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롬15:18).   

사도바울의 사도적 목회관은 교인들을 “예수안에서 복음으로 난” “사랑하는 자녀”로 여기는 “아비”로서의 목회관이었으며(:14-15), “모친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은 목회관이었으며, 베드로의 사도적 목회관은 목자장인 주님이 맡기신 하나님의 양무리를 자원하는 심정으로 순수한 기쁨으로 치는 목자로서의 목회관이었다(벧전5:2).   

목회양식에 대한 전반적인 모델에 있어서 디도와 디모데와 같은 목사적 모델이 언급되어 있지만 바울과 베드로의 사도적-목사적 모델이 성경에 더 광범위하게 체계적으로 자세하게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사도적 영성을 목회적 영성의 온전한 모델로 삼아온 사실을 부인할수 없을것이다.

성경이 주어진 이 시대에 생겨난 또 하나의 병폐가 있다면, 성경을 교리서로 해석하여 한정된 이해로 터득해온 교리 옹호에만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병폐이다. 

성경은 교리서가 아니라 날마다 살아있는 역동적인 말씀이 숨쉬는 생명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더 깊고 새롭게 생명의 능력을 덧입어가는 편견없이 정결하고 가슴설레는 순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영성(靈性)에 대한 비 겸손함은 곧 이성의 오만함으로 연결된다.  가장 지성적이고 이성적이라 자처한 자들이 벌인 행태의 결국은 가장 야만적이고 비 이성적인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십자가 처형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교리적 도그마의 위해(危害)성을 새삼 절감하는 요즈음이다. 제도와 교리를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제도와 교리는 본래 본질을 제한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보전하기 위해 생긴 것임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더 나은 신앙생활을 위하여 융통적 사고의 빈곤성과 영적인 취약성, 그리고  자기속의 ‘견고한 진(stronghold)’을 늘 예민하게 감지할 필요가 있다.    

요사이 교회사회 안에서 엄연히 주의 종으로서 받은 예언 은사나 여러 모양의 성령의 역사를 모함하여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거짓 선지자나  적 그리스도로 엉뚱하게 몰아가는 현상은 실로 아연실색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에 달하고 있다.  

한번 생각해 보자.  목사는 주님이 임명하신 직분이 아니고 인간의  제도가 만든 직분인가?  목사는 주님이 세우신 직분이다.  성도는 제도가 만들어 낸 신분인가?  성도는 주님이 주신 신분이다.  한국적 구습에 얽혀서 오랜 세월동안  비록 바람직 하지 못한 현상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하더라도 목회자를 기름부으신 주체는 엄밀히 기관이 아니라 ‘주의 성령님’이시다.  성도 또한 동일하게 ‘주님이 기름부으신’ 주님의 종들이다.  다만 사명의 밀도와 전문성, 은사의 특수성, 역할과 질서에 있어 구분이 있는 것이며 그 구분은 존중되어야 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나 기관장을 가리키며 그가 명예때문에 권력욕 때문에 사욕( 私慾)때문에 되었다고 손가락질 하면서 너나 나나 다른것이 무어냐고 대든다면  그 나라가 바로 세워지겠는가?   성도가 목회자를 이와 같은 차원에서 대하고  또  근자에  신사도 그룹이 생겨난 후엔  목회자가 신사도 사역자들을 이와 같은 차원에서 대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세워지겠는가?  세상의 권력자도 사명자인 것이므로 그들의 사명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에게 보내심을 받은 사역자들임에랴…

역할 구분이 모호하고 질서를 저버리고 사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본질을 잃어가는 야만적인 위험한 사회이다.  주님이 부르시고 보내심에 대한 사명의 신성한 본질을 망각하고 목회자나 교인이나 직업의식으로만 도배되어 신성함을 잃어가는 때에,  사역지 곳곳에 세상영이 활개를 치는 때에,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사도행전적인 사도성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 사도적 영성을 부흥시키시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예감은 과연 나만의 것일까?  이들에게 교인들이 몰려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여 인신공격으로 분풀이를 삼을것이 아니라, 이들이 가진 메리트를 눈여겨 좋은 점을 취할줄 알아야 한다. 

요사이 한국에 대해 회개와 전쟁에 대한 예언을 선포한 어떤 사역자에 대해 많은 비판들이 가해지는 것 같다.  비판의 내용중 놀라운 것은 “자기의 공명심과 명예를 위해 예언한다”  “회개를 너무 강조하거나 전쟁 위협으로 불안감을 조장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 예언의 공이요, 안 일어나면 회개의 공으로 돌리려는 계산적 술수이다” 라는 내용등이다.  

나는  한국에 대해 예언을 한 그 분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 분의 예언 선포에 대해 무척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 예언에 대한 사람들의 위와같은 비판적 반응에 대해서는 무척 염려와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수 없는 심정이다. 

영적으로 비뚤어진 자가 아니고서야 어찌 주 안에서 예언하는 자를 인간적인 동기로 폄하할수 있는지 의문이다.  모름지기 크리스찬으로서 예언하는 자라면 순수한 영적인 동기로 예언하기 마련이 아니겠는가?  성경은 영적 분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요일4:2-3)”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이1:7)”

 

한편, 회개의 강조가 교인들의 구원의 확신을 떨어뜨리고 불안감을 조장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불안은 무신론자들이나 반 크리스찬들을 비롯하여 크리스찬들에게 마저도 엄습하는 세상의 영이다.  불안은 어두운 영의 속성인 것이다.  믿지 않는 자의 불안은 어쩔수 없지만, 믿는 자의 불안은 회개의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믿음의 약함때문 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단 믿음이 든든히 뿌리 밖히고 나면 회개의 메시지는 시시때때로 연약하여 실족하기 쉬운 우리에게 더없는 축복이고 위안이고 치유이고 회복이며 감사인 것이다. 

회개는 우리를 주의 보혈에 잠기게 하므로 영적인 재충전과 활력을 공급받는 원천이 된다. 우리는 회개로 인해 날마다 성화되고 영적으로 깊어지게 된다.  만약 주님을 영접한 후에도 회개의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구원의 확신에의 염려가 생긴다면 더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기울이는 것이 해결책이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나의 심령을 통촉하시고 때때로 나로 인하여 근심하시고 슬퍼하시거나  또한 나로 인하여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데 무슨 의문과 염려가 생길수 있단 말인가?  요는 주님과의 관계성의 문제이다.  즉 친밀감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역자라면 영적인 깊이와 강도높은 회개를 전하는 어떤 사역자들을 비판하기에 앞서 교인들을 위한  말씀 양육과 기도 훈련이 제대로 되었는가를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가장 염려가 되는 것은 세번째의 종류와 같은 인본주의적 비난 - “전쟁이 일어나면 자기 예언의 공이요, 안 일어나면 회개의 공으로 돌리려는 계산적 술수이다” 이다.  이와 같은 비난은 주님이 명하신 회개의 명령과 참뜻을 비웃고 왜곡하는 소위 인간 이성이 만들어낸 인본주의적인 비난이라 할수 있다. 

인본주의적인 사고는 성경이 말씀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도 도리어 선악과를 먹음으로 인해 세상을 발전시켜온 칭찬받을 만한 업적이 되는 것으로 둔갑시킨다.  같은 선상에서 위와 같은 비난은 “회개하면 주님이 들으시고 사유하시고 행하시는(Hear, forgive and act)”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깃든  주권적인 섭리를 인간의 계산적 차원으로 역리(逆理)적으로 해석하는 불경건하고 신성모독적인 사고(思考)이다.

설사 말세가 되어 참 선지자가 나타나 세상의 종말을 고한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위와 같은 류로 조롱하고 비웃을 것이다.  주님은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9)”고 이르셨다.

종말에 대해 너무 빠져있어도(eschatomania) 바람직하지 않지만, 종말에 대해 너무 두려움을 느끼는 나머지 (eschatophobia) 회피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언제나 죽음의 가능성에 열려있는 우리의 인생은 본질적으로 종말적인 현재성을 지니고 있기에, 종말적인 신앙관이란 어떤 별다르게 생소한 것이 아닌 아주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것임을 숙지할 필요가 있다.

솔로몬 왕이 성전 봉헌을 위해 이스라엘 온 회중을 향하여 기도하는 내용중에, 백성들이 범죄하여 적국의 땅으로 사로잡혀 갈때에, 저들이  회개하고 기도하거든 주의 용서와 긍휼을 입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내용이 있다.  당시 솔로몬 왕 때엔 앗수르와 애굽의 쇠퇴와 화친 정책으로 주변에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적국이 없는 평화로운 정세이었지만,  솔로몬 왕은 언제나 범죄에 열려있는인간의 성정에 대한 통찰력이 있었기에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연상케 하는 예견적인  기도와(왕상8:46-50) 더불어 다음과 같은 기도를 하였던 것이다 :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전염병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막론하고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아심이니이다(:37-39)”

후세에 이스라엘의 역사를 뒤돌아 볼때, 우리는 이때에 솔로몬왕의 기도속 예언이 역사적 사실로 그대로 성취되었다고 평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언의 본질을 상고할 필요가 있다.  예언은 기도, 즉,  하나님과의  교통과 주권적인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느껴지고 보여지고 말하여지는 것으로 늘 보편적인 성경적 진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언은 성취되는 운명적인 것-점지적인것- 결정론적인 것이 아니라 즉, 미래의 시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중요한것이  통시적으로 현재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라는 점이다.  

 예언자를 나무라기 전에 예언의 본질에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자.  목회자를 나무라기 전에 목회의 본질을 회복하는데 심혈을 기울이자.  선지자와 신사도들을 나무라기  전에 기도하는 영성과 사도성의 본질을 깊이 발견하고 배양하도록 노력해보자.  이러한 겸허함이 그 어느때보다  더욱 요청되는 현실이다.  사랑하는 조국과 우리의 교회와 가정을 위해 더욱 더 기도에 힘써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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