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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2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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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에이지와 성령

최근 한국인 특유의 기질 때문인지 건설적인 오피니언의 수위에서 벗어나 교회사회 안에 어떤 대립 구도로 무질서하게 여론을 형성하면서 체계화되지 않은 신학적 지식의 편린으로 혼란을 가중시키는 사례들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다.

그중 신사도와 연관되어 뉴 에이지라는 표현이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생기는데,  피상적으로 얼핏 생각해도  "새로운 트렌드"라는 컨셉이 만들어낸 연결이 아닌가 짐작해 볼수 있겠다.

이에,  카프라(Fritjof Capra)의 두 저서를 통해 뉴에이지 대해 총괄적으로 간략하게 나마 살펴보는 것과 아울러 성령의 본질을 재확인해  봄으로써 요즘 교회사회의 현실을 진단해 보는 것도 이러한 혼돈을 바로 잡고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라 여겨진다.    

뉴 에이지 운동(New Age Movement)

뉴 에이지는 서구 문화에서 근본적인 사고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베스트셀러 책인  'The Aquarian Conspiracy'나 '새 의식과 새시대 운동(The New Consciousness and The New Age Movement)'에서 명명되어진 것이다.  '의식 심리학(The Psychology of Consciousness)'과  '제 3의 물결(The Third Wave)' 에선 문화적 변형이 예고되어 왔고, 또 다른 유명한 책인 카프라의  'Tao of Physics'에선 서양 과학과 동양적 신비사상(힌두교, 불교, 도교)의 통일이  주장되고 있다.

'카프라'에 의하면, 문화는 넓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리듬을 타고 오고 가는 것인데, 사회의 구조와 행동 양식이 너무 경직되어 사회가 더 이상 변화하는 상황을 수용할수 없을때, 문화적 진보가 창조적으로 이행될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 문화는 멸망과 종국적인 붕괴를 맞게된다. 

붕괴 되어가는 사회안에 신축성이 없어질때 구성원 간에 조화가 깨어지므로  불가피하게 사회적인 내분과 혼란이 생겨난다.  비록 기존의 사회적 주류들이 고정된 사고와 경직된 행동양식에 달라붙어 돌같이 되어왔을지라도,  창조적인 소수가 무대에 나타나 도전과 응전의 과정을 수행함으로 옛것을 새롭게 변형시킬수 있을것이라는 전망이다.    

뉴에이지의 발아는 1800년대 'Bhagavad Gita'와 'Upanishads'의 영역(英譯), 동양 사상의 유행과 크리스찬 사이언스의 설립으로 시작되었는데 1971년 동서양 간행물인 "Be Here Now"에 의해 본격화되었다.

이 동안 서구사회에는 동양적인 신( 神)개념과 인간의 본성과  운명에 대한 사고가 점점 유행되어 오게되었다.  이런 생각의 유형은 유행하는 초월적 명상이나  동양의 영적 도사, 점성술의 수용과 최면술의 사용 그리고 널리 퍼진  전인적 건강치료술등에 현저하게 나타난다. 

뉴에이지 운동은 심리학, 사회학, 문화 역사, 고고학, 공상과학 요법, 과학, 정치학, 스포츠등을 포함하는 혼합적인 영적, 사회적, 정치적운동이라 할수있다. 

그러나 이들의 중심사상의 대부분은 기독교와 조화될수 없고 뉴 에이지의 세게관은 크리스찬의 세계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서구 사상과 동양 사상

이론 물리학자인 Fritjof Capra는 그의 저서 'The Turning Point'에서 물리학의 새로운 개념이 우리들의 세계관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시대의 지적, 정서적, 도덕적, 존재적 위기는 근본적으로 인식의 위기(a crisis of perception)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원인을 서구사회가 오랜 세월 수용해왔던 이원론적인 사고에서 찾는다.

그러므로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구시대적인 이원론적 사고 즉, 데카르트-뉴턴식 과학의 기계적(mechanistic)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전체적(holistic)-생태학적(ecological) 세계관을 가져야한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렇게 현실에 대한 새로운 비젼 즉, 우리의 사고와 인식과 가치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카프라는 서양사상을 기계적이고(mechanistic)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적(dualistic)으로 보는 반면에, 동양사상을 일원론적(monistic)이고 유기적(organic)으로 본다. 

그는 서구사상이 생각과 몸을 분리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인들이 자신의 존재를 육체안에 있는 격리된 자아로 인식하게 되며, 이로 인해 끝없는 혼돈과 좌절 속에서 사회적, 환경적, 문화적 위기와 경제적, 정치적 무질서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해결책은 일원적이고 유기적인 동양사상에서 찾아야 되는데, 저자는 흥미롭게도 물리학자의 신분으로서 현대 물리학에서의 시공(時空/time-space)과 원인-결과(cause-effect)에 대한 급진적인 개념의 변화의 방향이 동양 신비주의 세계관의 방향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현대 물리학의 내용을 잠시 따라가보자.

현대 물리학의 혁명

아인슈타인은 사고에 있어 두가지 혁명을 가져왔는데 하나는 상대성 (theory of relativity)이론이고, 또 하나는 원자 현상(atomic phenomena)의 이론인 quantum이론의 특징이 된 전자파(electromagnetic radiation)를 새롭게 보는 방법을 새로 소개한 것이다.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시공(space-time)은 특정한 관찰자가 관찰한 현상을 묘사하는 언어의 요소들 뿐이지 절대적인 것이 될수없다.  3차원적인 공간은 육중한 대량의 물체들로 구성된 중력장(gravitational field)이 만든 실제적인 굴곡이며(actually curved), 공간과 불가분한 시간은 우주속에 다른 부분에서 다른 비율로 흐르는 물체의 존재에 영향을 받는다.  이와 같이 시공을 포함한 모든 측정이 상대적일뿐 아니라 전체 시공의 구조가 우주속에 있는 물체의 분포에 의존하기 때문에 '비인 공간(empty space)'의 개념은 사라진다. 

질량은 본질적 실체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에너지의 형태이다.  에너지는 운동이나 과정과 관련된 역동적인 용량이다.  그러므로 입자의 질량은 특정량의 에너지와 상응하는 것으로써 입자는 더이상 고정된 물채가 아니라 입자의 질량을 나타내는 에너지를 포함한 과정인 역동적인 패턴으로 인지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소립자(subatomic)의 차원에서 물체는 특정한 장소에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려는 경향('tendencies to exist')만을  보이는 것이며 원자의 경우도(atomic event) 그러하다.  quantum이론에 있어서 이런 경향(tendency)들은 가능성(probabilities)으로 표현되고 웨이브로 나타나는 수학적인 용량과 연관되어 있다. 

요컨데, quantum theory에서는 자연은 개체적인 미립자의 구성체가 아니라 전체의 여러 부분사이에 관계를 이루는 복합적인 웹(web)으로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저자가 물리학의 개념의 변천을 형이상학적 사고에 끌어들였느냐 하는 문제이다.  즉, 현대 물리학에서 전 우주가 불가분한 에너지 패턴의 역동적인 웹으로 나타나는 개념을 어떻게 동양의 일원론적인 신비주의와 매우 유사한 것으로 연결시키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생태학(ecology)과 영성(spirituality)의 통합

카프라는 'Tao of  Physics'의 서문에서 물리학의 세계관과 신비주의를 병행시키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신비주의는 서구사회에서 전통적으로  모호하고 비과학적인 것으로 매우 잘못 취급되어 왔으나 이런 태도는 변화되어 과학계에서도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물리학이 물질적인 구조나 에너지, 엔트로피등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지만 바로 생명의 기저엔 뭔가 물리학이 접근할수 없는 것이 있다.  이에 카프라는 생태학(ecology)을  본질적인 실재(reality)를 설명하는 새로운 비전의 골격으로 믿게된 것이다.

심오한 생태학은 세계를 독립된 개체의 모임으로 보지않고 오히려 근본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의존적인 현상들의 네트 워크로 본다.  이런 관점은 모든 생명체의 본래적 가치를 인식하면서 인간을 생명의 웹안에 있는 단지 하나의 특정한 가닥으로 본다.

여기서 바로 심오한 연결감, 콘텍스트와 관계와 소속감의 철학이 발생한다.  바로 이 심오한 수준에서 생태학이 영성과 통합이 된다.  즉, 모든 자연과 연결되는 경험과 우주에의 소속감이 바로 영성의 진수(essence of spirituality)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쪽의 스펙트럼에서 생태학은 생명계의 이론에 과학적인 근거를 두고있는데 그러면 이것은 영성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시스템 과학은 영성에 관해 말할수 있는 것이 없지만 인간 영혼의 성질에 관해서는 무엇인가를 말할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계의 새 이론의 부분은 마음과 의식의 급진적인 새로운 이해를 다룬다. 새 이론은 지식의 과정인 인지(cognition)를 생명계의 모든 수준에서 생명의 과정과 동일시한다.  즉,  마음은 어떤 것이 아니라 과정이다. 

샌티아고 인지이론(Santiago theory of cognition)에 의하면  마음은 인식의 과정이고, 생명의 과정이고, 의식은 이러한 과정의 정교한 형태이다. 카프라에 의하면 이 이론은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충분히 극복하는 과학적인 골격으로 양자는 생명의 현상의 두 보완적인 면 - 과정의 면과 구조적인 면 - 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뇌(온 몸)는 이러한 과정을 나타내는 구조가 된다. 

카프라에 의하면 이것은 매우 심오한 새로운 통찰로써 이것은 또한 오래된 통찰이다.  고대 문화와 철학과 영적인 전통을 살펴보면, 서양과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전통적인 구분은 육체와 영혼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와 혼과 영혼에 있었다.  고대의 'soul' 과 'spirit'은 모두 공통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바 모두 'breath'를 뜻한다.  고대인은 영혼을 생명의 호흡(the breath of life)으로 인식하였다

카프라에 의하면, 시스템 과학이 마음과 인지를 생명의 과정으로 보고, 고대 전통이 영혼을 생명의 호흡으로 본것은 같은 통찰인 것이다 - 하나는 과학의 기술적 언어로, 또 하나는 영성의 시적이고 은유적 언어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영혼은 생명의 호흡이다. 

결론적으로 카프라는 현대 사회의 위기의 해결책은 유대-기독교에 뿌리를 두고있는 이원론적인 사상에서 탈피하여 동양 사상에 나오는 일원적이고 유기적인 세계관을 가짐으로 해결될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뉴 에이지의 오류

그러나 카프라의 주장은 기독교의 세계관을 3차원적인 기계 결정론(three- dimensional mechanistic determinism)으로 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일원론적(monistic)인 것도 아니고 이원론적인 것(dualism)도 아니다.  성경적인 창조는 하나님께서 무(無)로 부터(ex nihilo)창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과정에서 선재하는 물질을 사용하지 않으셨고 하나님 자신을 포함시키지도 않으셨다.  하나님 외에 어떤 궁극적인 실재가 있을수 없기에 창조에 이원론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이원론에는 두개의 궁극적 원리가 있다.  창조주인 조물주 하나님과 창조주가  창조에 있어서 활용하거나 도구로 삼는 물질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엔 더 높은 차원의 요소와 더 낮은 차원의 요소가 들어있다.  더 높은 차원은 거룩하고 좋은 것이고 더 낮은 차원은 거룩하지 않고 나쁜 것이다. 

카프라는 이원론에서 오는 영혼과 물질의 분리를 인간 사회의 불만족한 문제의 중요한 이유로 보고있다.  그러나 카프라가 보는 것처럼 이원론적인 사고는 전형적인 크리스찬의 세계관이 될수 없는바 그의 성경 지식의 결핍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는 현 사회의 문제 해결책을 일원론에서 찾으려는 것이다.

일원론에서는 세계가 하나님의 방사( emanation from God)에 의해 창조 되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본질 그대로와 분리된 하나님의 속성의 유출이나 방사로 본다.  이런 방사를 아직 신성한 것으로 보는 경향의 관점이 범신론(pantheism)이다. 

카프라는 말하길 "의식의 궁극적인 상태란 모든 경계와 이원론적인 것이 초월되고 모든 개인이 우주속에서 용해되어 구분되어지지 않는 존재가 되는 상태" 라고 했다.  이와같이 뉴 에이져들은 하나님과 인간을 우주와 구분되지 않는 존재로 본다.  따라서 모든 존재가 신(god)이될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천지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피조물과 구분되시며 피조물 가운데 계시더라도 특성적인 에너지(characteristic energy)나 의식(consciousness)이 아니다.  그는 회개하고 당신을 믿는 자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특성적인 하나님이시다.  창조론은 이원론과 일원론을 배격한다. 

성령에 대한 편견

성령 하나님은 신성과 인격성을 동시에 가지신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거룩성과 영원성과 전능성이 하나님의 초월성의 표현이라면, 편재성은 내재성의 표현이라 할수 있다,

그런데 오랫동안 동양적인 범신론의 영향권 안에 살아온 한국인들의 문화적 배경 때문인지 성령의 신성보다는 인격성만을 부각시키려는 노력들이 더욱 기울여지고 있음도 간과할수 없는 현상이다.   이런 현실적인 상황에 의거하여 성경이 말씀하는 성령에 대해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성령의 신성(神性)

성경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에 비해 성령 하나님의 명백한 계시가 상대적으로 적게 나와있다.  성령의 주된 사역이 주님을 선포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역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요 16:13-14). 

또한 성부와 성자 하나님에 비해 성령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형상이 가져오는 이미지의 결핍 때문인지 Holy Ghost라는 표현을 쓰고도 있다.  그러나 성령이 성부와 성자를 섬기는 사역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열등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같은 비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예(例)는 하나님에 대한 예(例)와 맞바꿀수 있다.  베드로는 아나니야에게 성령을 속인것을 나무라며 아나니야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을 한것이라 말하고 있다(행5:3).  즉,  성령에게 거짓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속성과 본질을 가지고 있는 전능하신 분이다(고전 2:10-11;요16:13)  바울은 그의 모든 사역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성취된것을 인식하였다.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15:18-19)".

요한은 하나님에게만 속한 권능이 성령에게도 있음을 말하고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셨던 성령은 우리를 또한 일으키실 것이다.  즉,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일으키실 것이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성령은 영원하신 분이시다:"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9:14)."

성령의 인격성

성령의 인격성은 명백히 인격적인 대행인 누군가의 일을 말하는 많은 귀절들에 나타나는바,  Parakletos(Counselor, Advocate)는 성령에 해당한다(요한14:26;15:26;16:7).

성령이 추상적인 영향력의 존재가 아닌것은 예수께서 요한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또다른(another) 파라클레토스를 보내주실 하나님께 기도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수있다. 여기서 "another"은 "another of same kind"를 뜻하는 것으로, 주님의 가심과 성령의 오심을 연결시키고 있으므로, 명백히 성령은 예수를 대행하며 같은 역할을 수행할거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역할에 있어서의 유사성이 시사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성령도 인격이어야 한다는것이다.

성령은 지정의를 가지신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시며(요한14:26), 우리로 인하여 (마음으로) 근심하시며( 엡4:30), 그의 뜻(의지)대로 우리에게 은사를 나눠주신다(고전12:11).  비인격체에게 단순한 힘에 대항하는 것은가능할지라도 어찌 우리가 거짓말을 하고 근심케하는 것이 가능할수 있겠는가? 

결론

뉴에이지의 오류는 '생명의 호흡'이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에게 불어넣으셔서 생령(生靈)이 된 사실을 즉, 진정한 영성이 생명의 호흡에서 비롯된 것임을 간과하고 이를 단지 시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인 것으로만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뉴 에이져에게는 자연과 우주와의 교류속에서 비인격적인 힘-특성적인 에너지나 의식과의 합일만이 추구하는 신성(神性)이 되는 것이다.

성령의 인격성은 동양종교의 범신론적 경향이 흐르는 때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수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하였듯이  성령의 인격성에만 촛점을 맞춰서 성령의 신성을 축소한다면 이 또한 신성 모독죄가 될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창조시 부터(창1:2), 주님의 성육신의 시초 부터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요사이 교회사회 안에서 열심히 행해지고 있는 기도와 성령의 사역을 영분별이라는 명분으로 함부로 비난하는 사례가 많은데 이 또한 영분별의 입장에서 참으로 경계해야 마땅하다.  영분별도 은사요, 성령의 권능을 행함도 은사요, 예언도 다 같은 은사일진데 어느 하나의 은사를 앞세워 다른 은사를 멸시하는 자세는 비 성경적이며 바람직하지 못하다. 

신앙의 밸런스란 다름아닌 '영 분별'과 '성령 훼방죄'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요 '신성'과 '인격성'의 이해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개별적 인간의 존재는 성경적으로 일체(unity)적 존재로 간주된다.  사람의 영적인 상태는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상황과 별개로 간주될수 없다.   우리는 육체와 감정과 이성을 경시하도록 되어있지 않다.  복음이 어필하는 대상은 전인격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정,의의 인격을 갖추신 성령의 임재하심과 역사속에서 우리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공명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인 것이다.  그런데도 혹자는 영을 지정의와는 별개의 것으로만 구분하거나  영혼육의 이분법, 삼분법의 시비로 어떤 논리를 펴는 경우도 있는데, 여전히 우리가 명심해야 할것은 성령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 교류를 하시면서도  또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예를들면, 집단 안수기도시 거의가 뒤로 넘어지는 상황에서도 내가 넘어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느끼면 나는 넘어지지 않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나는 넘어지지 않은 것을 유감스레 생각하거나 자랑스레 생각지도 않는다.  또 그렇다고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초자연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거나 어떤 현상이 특이하다고 해서 불쾌해하거나 성토하지도 않는다.  난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성령님께 의지하여 주님께만 몰두하며 열심히 기도에 힘쓸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의 지정의를 감동시키시지만 또한 나의 지정의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는 분임도 알기 때문이다.   

총체적이고 유기적인 역동성의 적용은 말씀을 읽는 나를 비롯해서 하나님과 나, 나와 세상과의 관계에 두루 해당되는데 여기서도 늘 유념해야 할것은 신성(神性)에 대한 초자연적 경외감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을 통하여 여전히 우리의 전인격을 새롭게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시다.      

요즘 교회사회의 어떤 흐름을 뉴에이지로 보고자하는 시각은 그들의 섬김이 기성 교회와는 좀 색다른 컨셉과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뉴 에이지적 문화 흐름에 대한 소견이 목하 교회사회의 문제의식과 변화에 대한 열망과 상황 인식적인 유사성이 있다고 해서 소프트 웨어 마저 동일하게 보는 시각은 위험천만한 잘못이라 할수 있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의문과 불만은 담임 목회자와 나눔으로 해결을 보는 것이 가장 자신에게 유익한 길이다.     

주님은 성령에 의해 시험이 일어나는 장소로 인도되었다.  성령의 임재는 곧 악령의 세력과의 투쟁인 것이다. 성령의 역사에 대해 명성이냐, 오명이냐를 가름하기 전에, 명성이냐 오명이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기 지금, 하나님의 눈동자에 비친 나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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