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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2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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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박현숙]신사도 이슈

요사이 ‘신사도’라는 어휘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 어휘에 대한 반응도 제 각기라서 우리가 가진 인식의 다양성이 자못 흥미롭다. 나의 경우엔 성경의 사도적 영성에 대한 향수 때문인지 몹시도 반가웠다.  왜냐하면 목회자라면 마땅히 사도적 영성을 본받아야한다고 생각해왔고 현실적으로 그런 사도적 영성을 몹시도 갈구해왔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랜 세월동안 우리가 교회의 리더에게 바라온 것이 다름아닌 사도 바울과 같은 영성과 사역의 자세가 아니었던가?  드디어 그 사도성에의 회복의 시대가 열리나보다 라는 희망이 은근히 솟아났다. 

그런데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니 이 신사도에 대한 논란이 분분했다.  어떤 이는 실천도 못하는 목회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승격시키기 위해 사도라는 명칭을 들고나와 교만을 떨고 있다고 비판하고, 또 다른 이들은 초기 교회시대의 사도성을 자신들이 갈아치우고 성경을 다시 쓰려하는 이단이라며 계시록의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2:2)"을 인용하여  성토하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직통계시라는 예언을 통해 또 말씀보다 가시적인 기적과 이사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악한 세력이라고 배척하고 있는 경우가 보였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고 보내시므로 세우신 열두 사도의 자리를 가로챈다는 비난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어떤 문제에 대한 비난도 어느 정도 이성의 범주안에 들어와야 비판이 성립되는 것인데 그렇쟎으면 억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IHOP에 있는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들어보았다.  Allen Hood라는 목사님의 설교 두 편을 들어보았는데 처음 듣자마자 너무 가슴이 벅차도록 반가운 감명을 받았다.  다름아닌 요한계시록의 하늘 성소에서의 경배장면에 대한 설교이었는데 이 성경의 장면은 여지껏 내게도 다른 어떤 성경의  장면보다도 최고의 은혜의 감동에 들어가게 하는 충만한 장으로 특히 마음이 우울해지려 할때마다 펴보곤 하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Allen Hood의 설교속에는 예수님의 마음에 올인한 진정 헌신되고 진실된 사역자의 영성이 유감없이 녹아있었다. 국가적이고 시대적인 사명을 이방 선교의 사명과 함께 전력 감당하고 있는 진정 부르심을 받은 성실한 추수꾼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자기가 받은 예언에 비추어 국가적이고 시대적인 회개와 기도를 시급히 촉구하는 음성이 인상적이었다.

신사도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거짓 사도'에 비유하는 언급도 있는가본데  '거짓사도'가 부도덕과 우상숭배 행위를 일삼는 영지주의적 이단종파에 속하는 니골라당을 일컫는 말이라는 사실을 알면 신사도엔 전혀 합당하지 않은것을  깨달을 것이다. 

하여 며칠전 신사도에 관한 정보를 구글에서 좀 찾아보았다.  이해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도는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던 초에 그의 뜻대로 부르신 열두 명의 제자를 말한다. 즉 사도의 부르심은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 영광을 받으시기 이전이다(눅 6:13∼16).

신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사도직을 전무후무하고 유일무이한 특별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들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앞서 베드로 사도의 부인이나 유다의 배신을 볼때 사도 자체보다는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성령의 강림을 기다리도록 당부하셨던 말씀을(행1: 4-5) 더 중히 여긴다.

성령의 강림을 받고 나서야 사도들이 비로서 미흡한 제자에서 온전한 사도적 능력을 나타나게 되어 온전한 예수의 증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시대 이후 바울 이후로 사도직은 종결되었으나 성령을 받은 성도들은 성령의 은사적인 역사하심으로 인해 누구나 사도적 사명과 능력(권능)을 계승하게 되었다. 

사도들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계승한 것이다. 사도들은 보냄을 받은 자인데 그 사역의 권위는 보낸 자에게 근거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교회의 사도적 권세의 계승은 교회 구성원 전체에 있는 것으로 안수 목회자에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평신도로 하여금 사도적 권세를 가지고 선교현장에서 능력사역을 하게 이유가 된다.

그러나 목회자와 평신도와의 질서는 존중되어야 한다. 안수 목회자는 코우치로써 평신도들이 사도적 능력을 행사하도록 양육할 임무가 주어진다.

요컨데 신사도는 사도행전적 역사를 중요시 여기고 사도적 영성의 계속됨과 교회 회중에게 임하는 그 영성의 보편화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교회 지도자가  사도적 권능을 가진 평신도 사역자를 길러내어 선교사역을 확장시켜 가는 것이다.

이로써 보건데, 최근 이 '신사도'라는 신조어가 나타나기 전에도 대부분의 오늘날 교회의 흐름은 이런 사도행전적 영성을 크게 부인하거나 배제해 온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과거엔 칼비니즘의 영향으로 말씀의 은사에 많은 역점을 두어왔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 방언과 능력에 관한 은사가 서서히 포문을 열면서 개신교 각 교파에 성령의 운동이 퍼져나가게 되어온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길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고 하셨고 또 말씀하신바 축귀와 방언과 능력과 치유은사는 믿는자들에게 따르는 자연스런 표적으로 인정되어 왔다(막16:17-18).

그러나 이 신사도파가  어떤 면으로 어떤 이들에게 이질감을 주는 이유는 강한 사도적 권능과  능력사역의 영성을 강조하다보니 편안함과 익숙함보다는 어색함과 거부감을 느끼게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결코 말씀을 등한히 하지 않지만 사도성의 증거로 사도행전적 기사와 이적 또한 중요시 하다보니 기존 교회의 분위기와  자못 달라  의혹감을 낳고 마치 가시적인 표적에만 의존하는 저급 영성인양  입소문과 평가절하를 당하는 사례도 보인다. 

여기에는 사도들의 죽음과 함께 이적등 능력 행함의 은사도 사라졌다고 믿는 딱딱한 신자들이 한 몫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엔 예언에 대한 개념에도 차이가 있어 앞일에 대해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영감적 예언을 정확도로만  판단하려는 나머지, 확실한 검증이 가능한 말씀 강론적인 예언만이 옳다고 주장하게 된다.

생각해보자.  그러면 기사와 이적을 중요시 않고 말씀만을 중요시 한다고 자처하는 신자들은 과연 고급 영성인가를.  결코 그렇지 않다고 느낀다.  너나 할것 없이 내면 속에 있는 인간적인 견고한 진은 그 누구 못지 않다. 

신사도가 기사와 이적을 일으키는 동안 이들은 쉬지 않고 저들의 기사와 이적의 배후에 악령의 세력이 있다며 질타와 비난과 공격을 서슴치 않는다.  또 신사도적 리더는 이런 자들 누구를 막론하고 안수기도를 할때마다 악령이 떠나가는 소리를 듣는다며 맞선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통해 나타나는 영의 세력을 꼬집는 동안 정작  자신들 속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력은 간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적 기피론자들이 영분별의 촉각을 예민히 내세우며 판단의 영으로 무장한 방위군들이라면,  이적 수용론자들은 적진에 뛰어들어 영과 함께 다이내믹하게  싸우고 일하는 전투군들로 보인다. 

한 비유로 잘 익고 못익은 수박을 감별하거나 겉핥기를 하는 자와 수박 속을 깊이 파먹는 자는 구분이 되는 것이다.  감별사들은 말이 많고 또 겉핥기를 하는 자는 수박 맛을 다 아는 것처럼 떠벌릴 수도 있겠지만 열심히 먹고 있는 자들은 먹는 맛에 흠뻑 젖어 별말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성경 말씀을 새겨야 할 필요가 있다. 

"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12:6-7)

성령의 역사 속에는 지혜와 지식의 말씀등 지적 능력에 관한 은사와 믿음, 신유, 능력, 예언, 영분별등 특별한 능력에 관한 은사, 또 방언의 은사가 있다.

신사도에서 이슈가 되는것은 '능력 행함'에 대한 것과 '예언'에 대한 것인데 여기서 '능력 행함'의 성경적 뜻은 능력과 이적을 일으키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행하는 특수능력으로써 치유나 예언 외에 사도행전적 이적들(행5,13,16)과 마귀를 대적하는 능력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도 행전적 이적을 행하거나 믿는 자들은 자연 사도적 믿음을 가진 자들 이어야 한다. 

또 예언엔 성경적 테두리 안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영감을 미리 말하게 하는 것과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등이 있다. 그런데 혹자들은 예언의 부당성을 논하기 위해  '직통계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계시자체가 직접성을 시사하고 있는 것을 안다면, 이런 모순적인 표현으로 신사도가 성경의 완성을 부인하거나 어떤 계시를 성경에 편입시키려 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절대 곤란하다고 본다. 

예언은 단지 주어진 성경 말씀 안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영감을 말하게 하는 것으로 크게는 말씀을 깨닫게 하는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라 이해 되어져야 할것이다(마11:27; 엡1:17).

그런데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보다 정확성에 대한 판단을 최우선으로 놓으면, 그래서 그렇게 맞는가 안 맞는가에만 총 집중하게 되면 그만큼 영적인 이해의 폭이 줄어들어 원만한 영성을 기르기가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완성된 계시와 예언인 성경이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겐 총론 즉 큰 지도안에서 각론 즉 부분적인 지형변화를 볼 수있는 여유와 실력이 있기 때문이고 또 예언의 주 목적은 대언자나 듣는자나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온전한 것이 와서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할때 까지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게 된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고전 13:9-10).  바울 사도는 예언을 하는 자는 자기 믿음의 분량에 따라 한다고 하였는데(롬 12:6), 예언을 받는 자도 응당 그러할 것이다.

우리가 예언을 받을때 가장 큰 유익은 무엇보다 우리의 영이 살아나는 것이다.  자신에게 격려와 경각심을 고취시킬수 있는 유익함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하기를 구하라(고전 14:1)"고 말씀하신다. 즉 은사로서의 예언을 열심으로 추구하고 사모하란 뜻으로 근본적으론 다른 은사들처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것이지만 우리 자신들도 노력해서 개발시키라는 권면인 것이다. 그러기에 예언의 은사를 가진 자들과도 다른 은사지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소통하는 자세가 덕스럽다고 본다.

비단 예언뿐만 아니라 말씀이나 방언, 신유, 축귀등 어떤 은사를 사용할지라도 사용자가 겸손히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않으면 악령의 역사는 늘 따라다니기 마련인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신앙에 있어 중요한 것은 단편적이고 분석적 지식, 외적이고 이론적인 지식 못지않게 통합적이고도 직관적이고 실제적이고도 사차원적인 원융한 영적인 지혜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또 유념할 것은 개인이나 교회의  모든 신앙적인 모색(노력, 흐름)을 카테고리화하려는 폐단이다.  어디에 갔다고 해서 어떤 파(派)가 되는 듯 서로  파를 가지고 반목할 것이 아니라,  또 나만 '말씀파'라고 자처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늘 좋은 것을 본받고 싶어하는 "믿고 행함을 잘 하려고 노력하는 파'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실제 신사도 리더들에게서 배울 점은 이들의 주님과의 남다른 친밀감과  열정이며  혼신을 다해 기도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과  선교에 헌신하는 역동적이고 사명감에 찬 신앙인의 모습이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것은 완전히 예수꾼으로 올인하지 않고서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져 견고한 자아의 성을 쌓아가기가 쉬운 인생이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 시대에 우리는 절대적 존재인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을  잃어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비함, 하나님께서 부르심의 신비함, 보내심을 받고, 전하는 자에 대한 신비함, 만남에 대한 신비함,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신비함,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신비함을 느끼는 마음들이 점차 고갈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신비주의가 아닌 신비함은 경외감과 순종, 겸손함을 낳는다고 본다. 

요사이는 정보  통신의 발달로 어떤 귀동냥이나 기사 심지어 댓글등에 의존해서 신앙에 대해 여론을 형성하고 대중의 세력을 은밀히 행사하는 폐단이 적지 않은것 같다.  이것을 미디어의 폭력이라 할수 있는데 적어도 신앙에 관한 것에는 고지식할만큼 진실하게 체험적으로 터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누리는 익명성과 가림성의 보호막과 자유함 속에서 자칫 사고의 방종함이 묻어나 자기도 모르게 마이너스 열매들을 확산하게 될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개방성과 투명성의 본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씀하셨고 가르치셨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요18:20).  

한 시대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영적 리더의 모습속에는 계산되지 않은 남다른 순수함과 진실함과 투명함이 묻어난다.  비록 눌변이더라도, 설사  세련되지 않은 투박한 표현이더라도 영혼의 중심에서 우러나는  맑고 정직한 빛은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지혜자의 모습을 새삼 느끼게 한다.

부도덕적 성향이나 삼위일체를 변형하든지 산으로 끌고가거나 자기를 신격화 하는 이단의 경우가 아니라면 어떤 영적 동향에 대해 무조건 경계하고 악성 비난을 남발하기 전에 그만한 관심으로 직접 설교를 듣거나 예배모임에  참여하여 보거나  취사선택하여 좋은 것을 배우는 자세가  중요할 것 같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께 대한 겸손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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