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중에 핑크를 - 기독뉴스
모바일보기
기독뉴스 개편사이트 안...
2024년 05월 20일
 
뉴스 오피니언 방송사진 커뮤니티 2세뉴스
기사등록 I 독자마당 I 광고후원 로그인 회원가입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참빛칼럼
2011년12월28일 02시50분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블루중에 핑크를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처럼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 방언이나 예언 환상 치유등 어떤 가시적 표적등을 우선적으로 연상하는 것같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마음을 비울때 일어난다.  예수께서도 오히려 자기를 비우신 분이시다(빌2:7).  이 비움은 무아無我와 무의식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최대한 주님께 의식적으로 순종하는 것, 따라서 자기 의견이나 의지가 최대한 제어된 상태를 말한다. 

곧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은 자기의 자유의지인 것이다.  그때 순수하게 주님에게만 몰입하고 주님만을 추구하는 마음이 간절할때 그러므로 절대적인 안정과 고요한 심령과 아주 낮아진 겸손함으로 영혼의 지성소에 엎드려질떼 성령의 역사가 임하신다. 

나는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여 밀착한 심령을 가진것 뿐인데 그러한 상태에서 말씀을 읽는도중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침상에서 주님을(주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대해) 매우 기뻐한것 뿐인데 주님의 영이 신비롭게 찾아오신다.  물론 주님의 영은 우리속에 항상 내주하여 계신다.  그러므로 이때는 초자연적인 임재를 경험케 하신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것이다. 

이십여년 전 갓 유학을 와서 한참 힘들고 중요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새벽기도에 나가서 간절히 부르짖었을때 방언을 받은 적이 있다.  도미전 결혼 후 일년간 살았던 구미의 순복음 교회에서 방언을 받기위해서는 주님을 계속 빠르게 반복적으로 부르며 기도해보라는 전도사님의 지시대로 해 보기도 했지만 통 못받았었다.  부족하나마 그 교회에서의 마지막 섬김의 뜻으로 교회 어린이들을 위해  예수님의 탄생과 오병이어의 기적,  십자가 고난과 예수님의 승천의 네 장면을 유화로 제법 매우 크게 그려서 벽화처럼 교회 친교실 벽에 붙여 놓고 왔던 기억이 새롭다. 

그후 미국에 와서 얼마 안되어 방언을 받게 되었는데 새벽기도에 터진 방언이 집에 와서도 계속되었고 몇 시간이고 방언찬송이 불려졌다.  그때의 기쁨과 확신이 얼마나 크고  귀한것이었는지 필설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격이었다. 

그후로는 똑 같은 방언이 안나오고 통성으로 기도할때마다 반복적이고 단조로운 방언이 나오곤 하는데 그렇다고해서 이런 현상을 악령의 역사라고는 결코 생각해본 적이 없다.  누구보다 나의 영의 상태를 잘 아시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내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더라도 날 위해 친히 간구하시며(롬8:26) 나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고 하나님의 생각을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고전2:11).

그러나 나는 지금도 가장 효과적인 기도를 드리길 여전히 사모하고 있다.  요즈음 운전을 하면서 부르는 찬양 중보기도를 개발했는데 매우 은혜가 되는 효과적인 기도법인것 같다.

예언기도

그간 미국 생활을 하면서 몇 차례 교회에서 예언기도를 받아본적이 있는데  나의 신앙에 매우 고무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예언의 내용은 나의 영적 상태에 대한 진단이 주류를 이루는 데 이 속에는 위로와 권면과 격려의 메시지가 들어있었다.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예언 기도는 약 일년 전 받은 내용인데, 들으면서 하나님의 이 부족한 여식을 향한 간절하시고 애틋하신 사랑의 심정이 느껴져서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과거 남모를 큰 억울함과 상처도 다 아시므로 밝혀주시고, 이에 대한 나의 소극적인 자세를 교정해주시고, 잠재적인 성격의 원인도 알려주시고, 나의 현 영적 상태의 진단과  함께 주신 은사도 확인하심과  아울러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통해 나를 향하신  아버지의 깊으신 뜻에 따른 사역의 방향과 비전을 들려주시는 것이었다.  참으로 큰 위로와 고무가 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예언의 내용이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의 실체를 벗어난 엉뚱한 새로운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들은 익히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부분들인데, 그간 지치거나 소홀함으로 인해 이끼가 끼게된 영성을 재 점검하도록 통촉하심과 아울러 성실하고 적극적인  영적 자세를 일깨우시고 새롭게 고무시키시고 다짐케 하시며 큰 비젼을 갖게하시는 내용들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감격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정확히 나를 아시고 들으시고 연민하시고 사랑하시는 친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의 실감스런 재확인과  내 가슴에 전달되는 아버지의 애틋한 심경 그리고 이에 대한 내 영혼의 공명과 전율 그리고 기쁨, 치유와 자유함이었다.

예언 사역자의 자세

한편 생각해보게 되는 것은 예언의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예언 사역에 임하시는 분의 내적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는 발견이다.  예언기도 전  먼저 사역자가 자신을 일절 깨끗하게 온전히 비우고, 단지 자신은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는 도구로만  쓰임받는 종일 뿐이라는 겸허한 자세로서 투철하고 충만한 예배정신으로 임해야  할것 같다.  그럴때 예언을 듣는 자에게도 예배때와 마찬가지로 충만한 은혜가 임해진다.

그런데 혹간은 고압적이고 유별나게 자신감에 차있고 무례한 언사를 하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는데 이런 자세는 예언 사역의 효율성도 격감 시킬뿐만 아니라 도리어  듣는 자에게 상처를 주거나 덕을 끼치기 어렵다고 본다.  때에 따라 오히려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는 자가 예언  사역자에게서 악령의 역사를 감지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예언 사역자가 예언을 통해 자신의 유익을 구하려하거나  자신을 드려내려 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이런 부류중에는 사역과는 어울리지 않게 어떤 도덕적 결함이 있는 경우도 더러 있는 모양인데 여기엔 지적인 요인, 성품적인 요인등 인격적인 요소가 많이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다.  관찰컨데, 경조부박한 성품일수록 진지성이 결여되어서 인지 신학공부의 연륜에 관계없이 죄성에 대한 심각성을 별로 못느끼는 것 같다.  그러기에 자연 도덕적 지각력이 떨어지고 실생활에서의 사리분별력과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정적 낙천성과 천박성을 잘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본다. 

쉽게 우쭐대며 특별한 은사등을 뽐내다가 은밀히 사탄의 심부름꾼이 되는 경우에 대해서도 상기해야할  주의 말씀이 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요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며 많은 열매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라도 제대로 된 아름다운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인 것이다.(마7:19-23)  

예언사역 뿐만 아니라 찬양사역과 말씀사역자들도 마찬가지다.   찬양은사에 대한 세상의 박수에 취하거나 말씀 또는 지식에 대한 세상의 환대에 취할때 혹은 치유사역에 대해 자만하거나 이런 것들에 대한 댓가를 바랄때 그래서 하나님의 것을 자기의 것인양 착각할때 자기도 모르게 점점 양의 옷을 입고 노략질하는 이리가 되어 가는지도 모를일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9:27)"고 말씀하셨다.

능력(dunameōs)의 역사

우리가 구해야할 것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이며 '부르심의 소망'이며 '기업의 영광'이며 '능력의 크심'이다(엡1:17-19).  그런데 능력에 대해서 "그 힘의 강력에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능력'(권능dunameōs)을 주실때 '힘(ischuos)'의 '강력(kratous)'한 '역사(energeian)'에 따라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힘'은 내적이며 본질적인 힘을 말하고, '강력'은 정복하는 힘을 말하며, '역사'는 신적인 초자연적인 힘이 실제 효과적으로 역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하나님의 힘이 정복적인 초자연적 힘으로 실제에 임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같은 능력의 역사는 구원의 역사를 필두로 말씀속에서도 임하고 찬양속에서도 임하고 기도속에서도 임하며 명상속에서도 임한다.  또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일상 속에서도 임하며 고통속에서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할 때도 임한다. 

또 우리가 시간과 온 맘과 온 뜻과 정성을 들여 간절히 능력을 구할때에 우리의 영성이 단계적으로 정화, 성숙됨에 따라 하나님의 때에, 사람에 따라서는 매우 큰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볼수있다.  이때의 가장 큰 기쁨은 평안과 자유함의 기쁨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dunameōs)에 있음이라(고전 4:20)"고 말했다    

우리의 태도

방언을 주시는 것도 치유를 주시는 것도 예언을 주시는 것도 비젼을 주시는 것도 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다.  어떤 이들이 큰 비젼을 받아서 도시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했다면 그 또한 아름다운 일이다.  목표가 확실할수록 강력한  동기가 생기는 것이며 동기부여가 확실할수록 행함이 따르기 때문이다. 

도시 전체가 아니라 나라 전체 아니 세계 전체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포부를 품었다고 해서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인가?  이런 소망을 품은 자는 벽돌을 하나하나 쌓듯 먼저 한 영혼 한 영혼 이웃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서는, 자신의 전 삶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지 않고서는 큰 소망으로 나아갈수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런 비젼에 대해 섣부른 오만으로 비판한다면 전체적인 그림을 즉 우주적인 섭리를 보지 못한채  한계적인 인간을 너무 과신하는 넌센스가 될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큰 이상을 보여주신 하나님이셨지만 당대에 아브라함이 본것은 이삭과 이스마엘 뿐이었으며 그들의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파란만장한 인간사의 역사의 점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고 지금도 진행시켜가고 계시지  않는가...  계획은 사람이 세울지라도  그 일을 이루시는 일은 결국 하나님이시다 .

종말은 불루 무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핑크 무드도 있다.  우리 삶에는 언제나  어두움의 불루무드가 점철되어 있지만 가장 효율적인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블루보다는 핑크를 택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단지 핑크가 정욕적인 레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면 말이다.

우리의 성정과 한계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죄악된 세상을 살아가는 자녀들을 효율적으로 보살피시기 위해  블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핑크의 말씀들을 심어놓으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 29:11)".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7)."

불뱀이 달려드는 광야의 인생에서 구리 놋뱀을 올려다 보게하심으로 죄성의 자각이 동반된(회개) 구원의 길을 함께 열어놓으신 하나님이시다. 

한편, 우리가 부정적인 내용의 예언을 특히 경계해야 할것은 그것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고 나태와 무력과 절망으로 유도하는 마귀적인 것이기 때문이며 창조적인 하나님의 속성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과 교회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은  운명론적인 것이 아니라 늘 회개의 촉구를 위한 열린 권면과 책망이신 것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새로운 조류

한편, 은혜의 복음에 spoil되어 차지도 덥지도 않은 상태로 진정한 영성에 관해선 눈이 감겨져있는 지도자가  조직의 코드를 타고 버젓이 행세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 현실에서, 별도로 특별한 부름을 받고 이십 사시간 기도와 찬양과 말씀에만 전념하면서 영혼들을 섬기려는 사역자들이 있다면 참 가상하고 위안되고 고무적인 일이 아닐까?  새 예루살렘 성이 있는 하늘 성소에서의 예배를 지상에서 실현해 보겠다는 저들의 비젼이 너무 벅찬것이지만 나태가 만연된 현실에서 참신한 도전이 될것같고 실보다는 득이 많을것 같다.

또 한편, 은혜구원 이전과 이후에도 도덕성과 회개를 강조하는 신사도적 메시지를 은혜를 반감시키는 자력 구원으로 성토한다면, 은혜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도덕성과 회개의 본질을 훼손내지 모호하게 오염시키는데 솔선이 되고 있는 일부 지도자들의 행위와 메시지 또한 타력 구원으로 성토될만 하다.  문제는 자력도 타력도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코드를 잡아야 하는 것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면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데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 받을수 없다는 말이 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14)"

그러므로 회개와 구원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하며 좋고 나쁜 열매 맺는 나무와도 비교되는 것이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22)" 이처럼 회개의 긴급성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2-4)"

우리는 한정된 사고로써 구원의 여정과 재림론에 각기 이런저런 선후를 두려하지만 하나님의 시간 편에서는 어쩌면 동시다발적인 역사일른지도 모른다.  주님께서 종말의 시와 때를 우리에게 알려주시지 않고 종말의 징조만을 알려주신 것은 우리의 영성을 가장 효율적으로 지키시고자 함이셨을 것이다.  

"늘 깨어있으라"는 당부를 하신것이 현재속에서 종말론적 신앙으로 살아가라는 메시지일진데, 즉 현재와 종말을 같이 살아가라는 뜻일진데, 이와같이 회개와 구원도 늘 함께 가는것이 안전한 지혜일것이다. 영성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칼비니즘과 알미니즘이 다 들어있다.  본질이 왜곡된 은혜 신앙의 오류적 현상에 대한 시대적 요청으로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 위해 택하시고 세우시는 자들이라면 하나님께 맡겨야 할일이다.  바라기는 저들의 인격이 받은 은사 못지 않게 말씀으로 고루 다듬어져  쉴새없이 자신들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가운데 분별력을 길러 방황하는 영혼들을 살리고  기성 교회들과 효율적으로 잘 대화해 나감으로써 서로 협력하여  영성의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면  좋을것 같다.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뉴스스크랩하기
참빛칼럼섹션 목록으로
 

이름 비밀번호
 32611458  입력
댓글콘선택 : 댓글 작성시 댓글콘을 클릭하시면 내용에 추가됩니다.
[1]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참빛칼럼
다음기사 : [칼럼/박현숙]신사도 이슈 (2011-12-28 02:50:36)
이전기사 : 사랑하는 아버지께 (2011-12-28 02:49:51)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회사소개 보도지침 저작권 규약 이용약관 사업제휴 직원채용 광고후원 기사제보 연락처 don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