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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2시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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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의 회복을 위하여
이성적 사고의 약점은 성령의 지혜와 계시가 부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성은 감성과 의지와 함께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요소로서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 놓는 귀중한 정신이 된다.

"the sociopath next door"의 저자인 martha stout는 양심과 이성, 그리고 감성과의 관계를 규명하였다. 그녀는 인간의 오감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맡고 맛보는 -외에 직관(intuition)을 여섯번째 감각(6th sense)으로 명명하고 양심(conscience)을 일곱번째 감각(7th sense)으로 명명하였다.
양심에 대한 정의의 기원은 4c 그리스 기독교 학자인 제롬에게까지 올라가는데 제롬은 양심을 synderesis라 호칭하고 양심을 온 인류가 선악의 분별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양심대로 선하지 않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사람들은 수세기를 두고 양심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을 벌여왔다
13세기에 와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제롬의 synderesis와는 좀 다른 개념의 양심(conscientia)을 구분하였다. 즉, 이 양심에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 갈등하며 결정하기까지 실수를 저지를수 있는 인간 이성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잘못된 인간의 결정은 양심의 결핍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결정과 행동을 낳는 사람의 이성에서 나온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이 완전하다면 나쁜 행동이 있을 수 없게 된다. 고로 나쁜 행동은 양심의 결핍이라기 보다는 잘못된 생각의 결과가 된다.
아퀴나스 이후  수세기 동안 학자들은 인간의 비 양심적인 행위를 "약한 이성"탓으로 돌려왔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양심의 정의는 무신론자인 물리 과학자 프로이드의 이론으로 인해 근본적인 변화를 겪게되었다.
프로이드는 어린아이가 하나님이 아닌 부모나 사회의 외적인 실제적 권위에 의해 내면화된 도덕적 권위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보았다. 엄중한 부모양육에서 온 도덕적 권위의 음성인 "하지마라!"가 발달해나가 결국 아이의 사고와 행동을 지시하는 독립적인 힘으로 자리잡는다고 믿었다.
프로이드의 이론은 도덕성이 모든 사람에게 깃들어 있는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성스런 코드가 아니라 가족과 사회적 유대에 단단히 묶여있는 역동적인 코드라는 개념을 소개하는 공헌을 하였지만, 어떤 이의 양심은 수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는 세속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양심의 정의에 대해 불확실한 문화적 상대주의의 길을 터주었다.
저자 martha stout는 양심을 이성에 기초를 두거나 프로이드의 체벌적인 부모양육의 영향에서 형성된 두려움에 기초를 둔 초자아(super ego)가 아니고, 사랑과 연민에 기초를 둔것으로 정의한다. 즉 양심을 사랑이나 동정심 ,부드러움과 같은 다른 사람들에게 느끼는 정서적 밀착감으로 남을 돌보는 의무감으로 정의한다. 이같이 양심은 서로를 돌보는 우리의 능력에 깊이 뿌리를 박고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흘러온 양심의 정의를 고찰해보면, 양심에 대한 이해가 절대적 도덕법에서 출발하여 이성의 연마로 보완되어 오다가 개별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을 통과하여 오늘날 정서적인 본질에 강점을 두게된 흐름을 타고있다.
이 흐름을 종합해보면 양심이란 절대 도덕법 안에서 건전한 이성을 가지고 바른 가정교육을 통해 남을 공감함으로 돌보는 사랑을 실천하는 능력이라 할수있겠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양심이 마비되었다든가 오염되었다는 표현들을 드물지 않게 사용하게 되는데 양심을 회복시킨다는 의미는 결국 이성(지)과 감성(정)과 의지(의)의 회복을 뜻한다는 것을 알수있다. 이를 성경은 '선한 양심(good conscience)'으로 말씀한다(딤전1:5).
즉 계명을 지키되 바른 사고력을 배양하고 공감능력을 키우고 사랑의 수고(헌신)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는다. 양심에는 이 세가지 요소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볼 때 어느 하나가 부족해도 전체적 양심의 불균형을 가져온다고 할수있다.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이 책망하신 것은 장로들의 유전같은 재래적이고 구습적인 인본주의 사고와 권위주의, 세속주의와 집단 이기주의적인 몰인정함이었다(마태복음 23). 이런 현상은 분별적 이성의 약화와 감성의 부패로 인한 양심의 둔감때문에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이를 '양심의 (guilty conscience)'으로 말씀하고 있다(10:22). 
오늘날 교회사회 내에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본질의 회복에 대한 외침은 바로 양심의 회복과 직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분별있게 사고하고 바르게 공감하고 용기있게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마틴 루터 킹목사는 설교중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은 말하자면 나쁜 사람들의 요란한 소음이 아니라 소위 말해서 좋은 사람들의 절대침묵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절대 침묵이란 무엇인가? 흔히 광신(fanaticism)이라고 지칭되는 혐오스런 현상들은 파벌주의(sectarianism)에서 나온 비합리적이고 무비판적인 환경때문에 생겨나는데 이것이 침묵의 문화(culture of silence)를 만든다.
이런 현상은 비단 종교집단뿐만 아니라 다수의 지배적인 엘리트층들에 의해 이끌어져 나가는 사회안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으로서 결과적으로 억압당하는 자들을 양산한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은 교육적인 영역에도 지대한 영향을 행사하므로 악순환의 생리를 가져온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한 남성 성직자가 사랑의 탱크가 비어있는 한 여성 교인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녀에게 동정심을 품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녀의 비인 탱크를 차고 넘치게 만들어주고 싶어 더 집중적인 믿음의 은혜로운 환경을 그녀를 위해 제공하려 계획한다면 이것은 도덕법(계명)안에서 매우 충실한 앎과 느낌이며 행함이 된다. 곧 양심있는 성직자의 자세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녀의 그런 약점을 알고 그녀가 불쌍하니 내가 직접 사랑을 채워주자는 자기기만적 생각으로 호시탐탐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하려 한다면 이는 깨어진 창문을 수리하거나 갈아 끼워주는 대신에 손상된 창문을 이용해 안으로 침입하여 부품을 다 약탈하고자 하는 파괴적이고 비양심적인 행위의 시도가 된다.  이런 비 양심의 출처가 오도된 이성과 감성의 부패인 것은 말할것도 없다.
그런데 관련된 사회가 이런 문제에 대해 계속적으로 침묵을 선택한다면 자연 침묵의 문화가 자리잡게 된다. 그리하여 개인적인 비양심적 문제가 어느덧 집단적인 비양심적 문제로 발전하게 된다. 이로써 시대의 비극이 탄생된다.   
그러면 이런 불합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는 억압자(the oppressor)와 억압당하는 자(the oppressed)들에게 자신들이 처한 객관적인 상황을 알리고 인식하게 하여야 한다.
위와 같은 부도덕한 상황엔 정신적 불륜도 상당히 내포되어 있는데, 노출된 예는 피상적으로 사회법상 단순한 성폭행에 해당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용적으로는 유인하여 추행, 간음하는 죄와 더욱 가깝다고 할수있다. 즉 심리적-영적 유괴죄(psycho-spiritual kidnapping)에 해당된다고 볼수있다. 
"대한민국법률에서 유괴는 대체로 약취, 유인죄처벌된다. 여기에서 약취란 폭행또는 협박을 수단으로 사람을 보호되고 있는 상태에서 분리하여 자기 또는 3자의 실력적 지배밑으로 옮기는것을 말하며, 유인이란 기만, 유혹 또는 기타 거짓수단을 사용해 사람을 자기 또는 3자의 실력적 지배밑으로 옮기는것이다.
약취는 피해자의 동의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반면, 유인은 피해자가 가해자의 거짓된 수단에 속아넘어가 실력적 지배밑으로 옮기는것을 승낙하는것에서 차이가 있다.   
또한유괴범이피해자를어떠한장소에감금하거나하여신체적자유를구속했을때에는체포·감금죄가성립할있다. 부녀를약취·유인하여 추행, 간음 또는 다른 영리적목적으로 매매하는 경우도 유괴의 일종으로 보아, 부녀 매매죄로 처벌된다.
노예제가존재했던 근대 이전에도 자유민의 유괴는 엄벌처해졌다. 로마법에도 이미 자유민의 약취가 범죄로 취급되었으며 게르만법에서유괴는살인같이 벌해지는 중죄였다. 중세 교회법과 독일보통법은 유괴를 절도관한 가장 무거운 죄로 취급하였다(위키백과의 법률적 정의)."
유괴되어 20여년간을 북 캐롤라이나 뒷 마당에 갇혀있었다 부모품에 돌아간 두가드여인의 기사와 더불어 그간 그녀가 수사진에게 취한 모호한 태도가 사람들의 흥미를 끌었었다. 그녀의 그같은 태도는 인질극의 볼모가 된 사람들이 자신을 해치지 않는 인질범들에게 고마움과 온정을 느끼고 지지하는 심리현상으로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뎌내기 위해 이성적 판단력을 스스로 마비시켜 버리는 심리기제라고 한다.
종교사회 내의 인질극이 세상 누구나 지탄하는 유괴범의 인질극보다 더 음험한 성격을 띄는것은 성직자라는 신분의 보톡스적인 독성이 가져다주는 마비 현상으로 인해 사람들이 가해자보다 피해자에 대한 이해와 동정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데 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억압받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이며 개인의 자유뿐 아니라 사회적 자유를 구현해야 할 의무도 함께 지니고있다. 따라서 사회를 통한 개인적 자유의 진정한 향상을 도모할수 없다면 아무리 사회적으로 자유를 부르짖고 뛰어도  - 사회안에 주님의 나라를 결코 임하게 할수 없을것이다.  
그래서 부족하더라도 전하는 자의 사명이 필요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배반하는 가룟 유다에게 까지도 끝까지 그의 상태를 알려주는 말씀을 하여 주셨다. 이 말씀을 전하신 목적은 비판과 정죄가 아니라 상대의 상황을 직접 알게하시고 그로 하여금 깨닫고 회개할 기회를 주셔서 그를 변화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선택은 들은 자에게 있었고 알리시는 자는 다만 알리셨을 뿐이다. 주님은 그를 가두시거나 협박하지 않으셨다. 다만 어느 환경에서든 주님은 알리시기를 멈추지 않으셨다. 마지막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까지도...
주님은 목자없이 유리하는 양들을 슬퍼하시며, 지도자를 책망하시거나 연민하시며 또한 당부하시며, 초지일관 이 모든 상황을 통해 그리고 모든 상황을 초월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며 사명자의 길을 가셨고, 어느 때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는 묵묵히 순종하며 걸어가셨다.

모쪼록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어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사회속에 충만히 임하시길 오늘도 소망하며 간구한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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