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찾기 운동 - 기독뉴스
모바일보기
기독뉴스 개편사이트 안...
2024년 05월 20일
 
뉴스 오피니언 방송사진 커뮤니티 2세뉴스
기사등록 I 독자마당 I 광고후원 로그인 회원가입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참빛칼럼
2011년12월28일 02시46분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예수 찾기 운동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 박사가 최근에 한국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예수 선언(Jesus Manifesto)’을 통해 “기독교는 이념도 철학도 아닌, 그리스도 그 자체”라며 “이러한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가 앓고 있는 가장 심각한 질병은 예수 결핍 장애(Jesus Deficit Disorder)이고, 우리는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 가장 우선에 둘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적절한 지적이다!
예수 찾기는 곧 말씀 찾기이다.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은 곧 예수님이기에 예수 찾기는 곧 말씀 찾기다. 우리는 말씀을 읽음으로써 예수를 찾을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미리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5:39)"고 밝히 알려 주셨던 것이다. 
말씀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마음을 비우고 성경을 읽다가 보면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는 실재가 되어 시공을 초월한 초자연적인 성령의 능력의 역사를 체험할 때도 있다. 
이천여년 전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켰던 베드로의 능력이 그대로 현재의 나에게 전해지는 산 역사가 일어난다. 정말로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에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지(엡1:19)"를 알려주시는 은혜이다. 
이처럼 성경의 말씀은 죽은 문자나 의사 전달 매체의 하나가 아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살아 역사하는 놀라운 생명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말씀에는 권세가 있다. 예수께서 사역을 하시는 동안 복음을 가르치시고 전파하셨지만 심지어 제자들도 그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자들과 무리들은 그의 가르치심에 놀랐는데 이는 그의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있는 자와 같았기 때문이라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주님의 가르치심은 (마7:29)율법 조문을 달달 암기하듯 기계적으로 읽어 내려가는 당시의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기에 그중 급기야 한 서기관은 예수께 나아와 어디든 예수를 좇겠다는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다 이해할수는 없어도 그의 신적 권위에 압도 당하였고 그런 그들 사이로 예수님은 치유사역을 행하셨다.  어떤 이들은 주님을 두려워하여 떠나기를 간구하였는가 하면(마8:34) 어떤 이들은 두려우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다(마9:8)고 한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함께 존재한다. 주님께서는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 따라 우리도 당연 이런 능력을 구해야 한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고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기도함으로써만 성령의 능력을 얻을수 있다. 
예수의 치유 사역은 권세있는 가르치심과 복음전파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동반된 것이었다. 그러면 주님의 치유사역의 동기는 무엇이었겠는가? 주님께서는 무리를 보실때마다 민망히 여기셨다고 말씀하는데 이는 큰 동정심을 품으셨다는 뜻이다. 주님은 이 민망하고 통분히 여기는 마음으로 죽은 나사로도 일으키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에게 있는 가장 고귀한 성정은 '연민의 정(compassion)'이다. 오해도 미움도 실망도 분함도 절망도 환멸도 이 '연민의 정'을 통해서 다 수용될수 있기 때문이다. 원수를 사랑할수 없는 우리지만 연민의 정을 통해서는 사랑으로 고양될수 있다. 연민의 정은 우리의 이해를 넓히고 아비와 같은 마음의 그릇을 만들어가며 우리의 사역의 지경을 확장시킨다. 이것이 다름 아닌 사랑의 능력이다. 
사랑과 성령의 권능은 이같이 본질상 불가분한 것인데도 오늘날 많은 경우에 대치되는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쪽의 결핍 때문이다.
오늘날 성령의 권능이 충만하지 않으면서 사랑이나 이해나 연합을 강조하면 모호한 부도덕으로 흐르기가 쉽다. 성령의 권능을 입지 않은 목회자의 사랑은 얼마든지 인본주의적으로 재해석되고 자의적인 상황적 상대윤리로 변질될 가능성이 열려있다. 더군다나 기본 인격이 함양되지 않은 경우에 이런 가능성이 더욱 농후하다.   
반면 인격 함양이 결핍된 가운데 성령의 권능을 행하는 자들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자기 독선과 오만에 빠지거나 정죄의 영에 빠져 그리스도를 가리고 스스로도 정욕의 노예가 되기 쉽상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이에 관해 한 다른 말씀으로 우리를 유의하도록 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아니 하였나이까 하리니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주님의 이름 자체에 권세가 들어있으므로 이를 아는 지식이나 감정적 열정만으로 주님을 부르고 사역을 행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역자 안에 사리사욕등 깊숙한 기만이 자리잡고 있다면, 사랑의 십자가가 없다면, 그날 주님은 사역의 양()에 관계없이 불법을 행하는 자로 심판하시겠다는 엄중한 경고의 말씀이다.  
빛의 열매인 선하고 의롭고 진실함이 없는 신앙의 모습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은 죽은자와 방불한 것이다. 우리의 주님의 모습에는 자비와 권능과 희생과 부활의 모습이 다 들어있다. 그러므로 우리안에 예수 결핍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골고루 종합적인 영성을 조화롭게 갖추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제이다.  
교회사회도 일반 세상처럼 선풍적인 바람이 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결속이라는 명목으로 조직의 세력을 확대해 가면 뭔가 분위기에 휩쓸려 저절로 하나님의 일에 소속되고 주의 일이 이루어 지는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힐지 모른다.
각종 포럼과 회합이 아무리 근사해 보이고 그 곳에 혹 예수님이 계시는 것처럼 생각될지 몰라도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보자. 예수께서는 사천명, 오천명 이상을 먹이시는 놀라운 대 사역을 행하신 후에도 제자들의 치하나 사람들의 환대를 마다하시고 홀로 기도하시러 따로 빈들이나 산에 올라가셔서 저물도록 유하셨음을... 
진정한 영성(靈性)의 함양은 다른 프로그램을  없애기 위한 또 다른 프로그램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많은 이벤트를 없애기 위한 새로운 이벤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저기 컨퍼런스나 심포지엄에서 개발되고 생기는 것도 아닌 것이다
영력이 약한 교회의 경우 대개 목회자가 새벽 기도를 마음 놓고 할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 자신을 스케쥴에 옭아맨 것을 보게 된다. 교회 일은 뒷전에 놓고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각종 회합에 홍길동처럼 뛰어다니느라 바쁜 목사는 본인은 다이내믹한 생활에 fun과 만족을 느끼는지 모르나 그 자신이나 교인들의 영성은 형편없이  허물어져 간다. 
경건과 명상적인 고찰의 대가라 할수 있는 찰스 스펄젼 목사는 "영적 건강으로의 길은 경건한 묵상으로 자아를 훈련시키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기도함으로써 기도하는 것을 배운다 라고 했다. 이와 같이 성경도 읽음으로써 읽는 것을 배운다 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사회의 영적 건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지도자들이 기도시간과 말씀시간을 여유있게 제쳐 놓고 홀로 경건히 보낼수 있는 능력을 쌓아야 한다. 
진정으로 이 시대의 영적 유익을 끼치는 지도자라면 목양과 함께 요란한 이벤트성 행사를 떠벌이므로 다른 이들의 시간을 빼앗지 않고도 소박하고 경건하게 교회 사회를 향해 글이나 설교만으로도 자신의 생각을 충분히 전달하고 건설적인 영향을 끼칠수 있으리라...
다수를 움직여 가기위해 자기의 취향이나 자신의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것에 대한 위험성을 경고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영원 구원을 위해 전념함으로써만 세상을 정복할수 있다는 스펄젼의 통찰력이 귀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깥 모양이 내적 실체의 진정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세대에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해야 한다는 경고는 스펄젼이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 그래서 스펄젼은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가장 큰 적이요 타고난 작은 도둑이라고 슬퍼했는가 보다.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뉴스스크랩하기
참빛칼럼섹션 목록으로
 

이름 비밀번호
 77882644  입력
댓글콘선택 : 댓글 작성시 댓글콘을 클릭하시면 내용에 추가됩니다.
[1]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참빛칼럼
다음기사 : 돌연변이와 수선 시스템 (2011-12-28 02:47:05)
이전기사 : 생명나무의 지식 (2011-12-28 02:46:23)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회사소개 보도지침 저작권 규약 이용약관 사업제휴 직원채용 광고후원 기사제보 연락처 don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