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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2시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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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상대주의의 위기
전미 복음주의 협의회(NAE: th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 지도자들은 작년 시월 복음주의 지도자들을 상대로한 여론조사 결과 오늘날 미국의 세속화와 동성애, 포르노등 다양한 도덕적 이슈들중 낙태와 도덕적 상대주의, 그리고 인간학대를 최대의 도덕적 이슈로 선정하였읍니다.   
NAE 디렉터 카펜터 목사는절대적 진리에 대한 불신앙이 우리사회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고 있다경고하면서 도덕적 상대주의를 꼽은 많은 지도자들이 사사기 17 6(사람마다 자기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인용했다고 했읍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낙태와 인간학대의 주된 원천 또한 도덕적 혼란을 낳는 도덕적 상대주의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여집니다. 도덕적 상대주의의 문제는 전반적인 세상의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사회 내에서도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바, 무신론과 함께 범신론과 이신론을 배경으로 한 자유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을 온상으로 삼고 있으므로 이를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무신론(無神論, atheism)
인본주의와 자연주의는 어떤 종류의 신이든 신의 존재를 부인합니다. 모든 속세적인 인본주의나 물질주의나 자연주의나긍정주의들은 무신론의 형태를 가진다고 할수 있읍니다이들에게 궁극적 실재는 우주일 뿐이며, 우주는 자연법칙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며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무신론자들은 인간을 고도로 복합된 생화학 기계로 보기에 마음은 단지 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그러기에 인격과 사고를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화학적이고 물리적 성분들의 상호관계로 간주합니다. 인간은 무의식적이고 우연적이고 무심하고 무목적적인 진화과정에 의해 자연으로부터 생겨났다고 보는 것이죠죽음은 육신의구조가 해체되는 것이며죽음과 함께 사고, 인격, 개인성의 존재도 없어진다고 봅니다. 시후세계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무신론자들에  의하면 도덕과 가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며 도덕은 자율적이고 상황적이고 임의적인 것이며 인간의 필요와 관심에 뿌리를 두는것 이라고 봅니다. 인간의 삶이 의미가 있는 것은 인간이 미래를 창조하고 개발해 나가기 때문이며, 인간은 홀로 자기 운명과 삶의 가치를 조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종교적 경험이나 성경은 이들에겐 단지 인간의 심리적 경험의 기록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들의 이런 생각은 도덕적 상대주의를 가져와 주어진 사회에서 무엇이든 도덕적으로 옳다고 여깁니다. 이들은 도덕적 이슈나 갈등을 다수의 투표나 권력의 힘에 의해 해결하려 합니다. 히틀러가 대표적인 예가 되겠읍니다. 따라서 도덕적 책임이나 인간의 도덕적 당위성도 없어지게 됩니다. 인간의 삶을 무의미하고 터무니없이 만듭니다. 인간의 인생은 자연의 우연한 부산물이며 사건과 시간과 기회의 결과일 뿐입니다. 인간 존재의 이유가 없읍니다. 내 인생은 단지 영원의 무한한 흑점안에서의 불꽃이나 명멸, 망각에서 망각으로 흐르는 과정의 한순간일 뿐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다. 인생에 하나님과 불멸성이 없다면 내가 가진 인생은 궁극적인 의미나 가치나 목적이 없게 되지 않겠읍니까? 희생하고 노력하고 우정을 지키는 것도  의미가 없고 종국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이기적으로 살지 않고 도덕적으로 희생적으로 살아야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읍니까?
그러나 인간은 삶의 의미없이는 살아갈수 없는 존재입니다. 무신론자들이 사랑과 우정 조화와 정의를 주장하고 비도덕적 범죄를 정죄하지만 그들의 철학엔 이에 대한 근거가 사실상 없다고 할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에 목적의식을 주기위하여 이들은 자연(Nature)이나 어머니 자연(Mother Nature), 우주(Cosmos)등의 을 대신화는 대문자 명사들을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체계에 대한 수용이 없는 무신론은 선악에 대해 우주적이고 절대적인 기준이 없기에 범신론과 함께 모든것을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평가에 의존하는 상대주의적 가치관을 가져오는 도덕적 상대주의로 연결됩니다.
또 한편 하나님을 인격적 존재로 인정하지만 창조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기적과 초자연적 역사를 부인하므로 조물주와  피조물인 인간과의 신비한 인격적인 교제를 외면하는 자기 모순적인 이신론 역시 무신론의 입지를 견고히 해준 셈이라 할수 있읍니다.
            자유주의 신학과 포스트 모더니즘
종합해 보면, 범신론적 사고는  연합, 일치, 조화를 추구하므로 신학자들이 성경 안에서도 중요한 가치인 연합과 일치의가르침을 (6:5; 2:21-22; 4:3-6) 많이 고취시키는데 좋은 영향을 주었읍니다이신론적 사고는 믿음과 함께 이성을등한시 하지 않음으로 인해  분별과 균형있는 바른 말씀의 해석을 도와주는 이로움을 가져왔읍니다
그러나 한편 인격적 신을 부인하는 범신론은 도덕적 기준을 모호하게 만들고 이신론은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부인하므로써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를 세속화 시켰읍니다이런 개념들은 자연주의나 인본주의등 무신론적 사고와 공통점을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유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으로 발전되었읍니다.
이성과 과학을 맹신하는 무신론적 모더니즘과 달리 이성과 과학의 한계를 지적한 포스트 모더니즘은 기독교와 공통 분모를 가진것으로 보이지만 철저한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객관적 또는 보편적 진리의 존재를 부정하고 성경의 절대성과 기독교 교리의 객관성을 손상시킨다는 점에서 기독교인에게 새로운 난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신론과 다른 근거에서 기독교를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다원적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은 '믿음의일치' '영적인 일치'에서 이탈하여 '타 종교와의 일치'방향을 돌리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읍니다성경적인 일치와 연합은 '예수와의 일치', '성령 안에서의 신자들의 일치'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포용주의는 엉뚱하게도 범신론적 사고의 神에 대한 포용적이고 총체적인 개념의 패러다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치하는 방향으로 이탈하고 있으며, 안에는 또한 이신론의 자연신학이 기저를 깔고 있는 것입니다.  
이신론의 자연 신학이 자연으로부터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착안하여 포용주의는 타 종교의 도 결국 같은 하나님의 다양한 표현이 되며, 따라서 모든 역사적인 종교에는 구원의 다양한 길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의 생각은 모든 개별적 종교(神性)들의 총체를 하나님으로 보고 이런 연합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일치를 꾀하려는 범신론적 사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도덕적 위기
자유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의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전술한 바, 그 안에 범신론적 도덕관과 이신론적 신앙관의 맹점이 들어 있다는데 있읍니다. 범신론이 가진 신비주의와 善惡에 대한 불확실한 구분과 이신론의 세속화된 예수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와 포스트 모더니즘 신학은 성경의 "하라"와 "하지 말라"와 같은 명령적 도덕률에 대한 책임감을 모호하게 해서 실상 말씀의 권위를 심하게 훼손시키는 위험으로 유도할 소지가 많습니다.
선과 악에 대한 구분과 판단이 없고 선악을 초월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면 또 실제로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이라면, 계명도 절대적이지 않고 얼마든지 주관적인 상황을 앞세워 선악의 경계를 느슨케 하거나 허무는 일이 용이해지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빨간 불'이 켜지는 것입니다. 자유주의와 다원주의 신학에 물든 일부 교회 사회내 도덕적 불감증이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심히 경계가 되는 것은 세상 사회내에서 보다도 양심의 가책없이 상대주의적 신학의 내적 근거와 지지를 가지고 부도덕한 행위로 연결 될수 있다는데 있읍니다.
가슴이란 정착된 가치관의 형성과 이에 따라 훈련된 감정이며, 상대주의 교육의 무서운 점은 머리의 지식과 충동적 본능이 따로 놀고 가슴의 살아있는 양심이 없는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 설파하였던 C. S. Lewis 의 말과 통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세계관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 본성안에 깊이 자리잡은 필요를 채워주기 때문인데 여기엔 인간의 사고(thought)등 이성적인 필요와 생활과 행동등의 실제적인 필요가 있읍니다. 따라서 바른 신학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의 생각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의 안내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와 다원적 사고에 물든 신앙 리더들은 일견 포용력 있고 오픈되어 보이며 정치성과 사회성이 유난히 많아 인간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장점들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포용력이 양들을 돌보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목자와 아비와 같은 포용력이 아니라면, 그들의 열림이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가까워져 막힌 담이 허물어짐으로 인한 열림이 아니라면, 그들의 폭넓은 교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성령의 전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면 그들의 장점은 다만 불안한 유연함이나 모호한 개방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신앙과 영적 리더십의 부재로 혼합주의가 성행하였던 사사시대 이스라엘의 영적 사회적 상황에서 사람들의 신앙이 자기 임의대로 개인주의화 되어 우상숭배와 상업주의에 빠졌던 성경의 기록을 교훈삼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욱 주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경건의 능력과 분별의 영을 키우고 사랑으로 깨어 근신하면서 동시대의 무신론자들과 신앙 리더들을 위해 함께 열심히 눈물로 기도해야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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