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의 영을 경계하자 - 기독뉴스
모바일보기
기독뉴스 개편사이트 안...
2024년 05월 20일
 
뉴스 오피니언 방송사진 커뮤니티 2세뉴스
기사등록 I 독자마당 I 광고후원 로그인 회원가입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참빛칼럼
2011년12월28일 02시42분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판단의 영을 경계하자
  판단의 영을 경계하자

신앙의 연륜이 쌓이고 교회 생활을 많이 할수록 지도자에 대해 느끼는 부분도 많아지고 여러모로 관찰력과 판단력이 생겨나는 것이 사실이다. 사람에게는 누군가를 롤 모델로 삼아 의지하고 따르고 싶은 속성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좋은 부모와 스승, 멘토를 만나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라 할수 있다.

혹자는 누구를 존경하는 것은 자신의 결단이고 의지라고 하면서 부족한 부분이 보이더하도 흔들리지 말고 버티어 나가라고 조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 그러기가 쉬운가 말이다.

모름지기우리에게는 항상 '기대치'라는 것이  따라다닌다. 흔히 '눈이 높다'거나 '안목이 높다'는 말을 하는데 곧 기대치가 높다는 말과 통하는 것 같다.  믿음의 철없던 엣날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칭찬인줄 알았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이것이 '안목의 정욕'과 통한다는 깨달음을 가지며, 눈을 낮춰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아니 아주 밑바닥까지 기준이 없어지도록 낮아지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시니까...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찾아 오셨어도 우리의 눈에, 기준에 맞지 않아 사형선고를 내렸던 우리이다. 이제 그만하면 두손들고 항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우리의 기준은 머리를 쳐들고 판단의 영은 아직도 기세등등히 우리를 쥐어 흔들고 있다. 아직은 우리 모두가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세상에 살고있기  때문에 어쩔수 없는 일이기도하다. 마지막 때까지 이일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개는 짖어도 열차는 달린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소매뿌리와 멱살을 잡고 뒤흔들어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진행시 키심으로 전진되고 있다.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것은 자기의 기준에 예수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를 돈에 욕심이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세상적인 것은 정욕적인 것이요,  정욕적인 것은 마귀적인 것과 통하지 않는가 (약3:15).  이 속에는 우리의 판단도 들어간다.

예수님의 잘못으로 가룟유다가 생긴것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요6;70)"고 하셨다. 이세상이 끝날때까지 언제나 가라지는, 가룟유다와 같은 존재는 있게 마련인것을 시사하시는 말씀이다,

반기련등 안티크리스챤 단체가 생기고 사탄의 교회가 생긴것은(그리스도인들이여 단연코 말하건데,) 목회자들의 책임이아니다. 저들의 구호를 살펴보라. 철저히 성경을 부인하는 사단의 회임을 알수있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나 불신자가 아니라 믿었던 자들의 배도에 대해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회개케 할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4~6).

한번 비췸이나 하늘의 은사나 성령참여나 말씀과 능력등은 대개 그리스도교의 초보적인 신앙에서도 얼마든지 맛볼수 있는 경험들이다. 위의 말씀은 그러고 나서 행해지는 고의적인 배도에 대한 사례를 언급하고 있는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히 10:26, 27).

교인이 목회자에게 실망하여 신앙을 져버렸다는 식의 비난은 적어도 성경적으로 볼때 공적으로 할수있는 성질의 내용이아니다. 어떤문제가 공적으로 비난할수 있는 성질인가에 대한 판단여부를 가릴수 있는 영적인 통찰력이 적어도 오래된신자에겐 있어야 할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안에대한 공적인 비난의 파급효과는 교회사회 전체에 대해 커다란 부정적 효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성경과 대치되는 타파해야할 구습과 재래적 인식에 대한 사안적 비평이나 실천신학, 신학적 고찰등은 사회전체에 퍼져서 유익이되고 교회사회에도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줄수 있지만, 세상에 나타나는 반기독교적 사회적 현상에대해 주먹구구식으로 몰아서 교회 내부지도자에게 화살을 쏘아대는 식의 비판은 함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서지 못하는 집안처럼 교회사회를 허무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모든 죄와 무릇 훼방하는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고하셨다(막 3:28-29). 성령 훼방죄는 성령 하나님이나 그의 사역을 상대로 방해를하는 말이나 행동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사회 안에서 의견을 내놓을때 함부로 향방없는베드로의 칼을 뽑아들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한다. 어느 사회에나 지도자가 필요하고 지도자의 위치와 책임은 실로 중요하다. 진정 그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어떤 제언이든 지도자를 세워주는 방법과 목적에 의해 행해져야 한다. 모든 책임을 지도자에게 다 돌리는 것은 지도자를허무는 행위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교회사회에 혼돈과 손실 - 신앙의 아나키즘을 가져온다.

습관적으로 지도자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또 다른 부작용은 미성숙한 신앙인들을 양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신앙의 연륜이 오래 되었어도 단단한 것을 먹지 못하고 연단받기를 거부하고 영적 분별력이 없는 신자를 만들어 그 영혼을 실족하게 할수있기 때문이다(고전3:1-3; 히 5:12-14). 바울이 지도자로 있었던 고린도 교회에서도 베레아교회에서도 에베소 교회에서도 배도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져 있었다(살후 2:1-12). 그리고 배도에는 본질적으로 지도자와 피지도자의 구분이 없다고 봐야한다. 

한편 대형교회니 기복신앙이니 하는 비판들도 매우 신중히 사리분별을 요하는 일이다. 세상의 정치, 경제사회에서도 공적과 실정을 구분해서 평가 하는것이 상식이지 않은가? 지도자의 전인격과 교회 전체에 대한 매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안별로 건의를 해야 할 일이다.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뉴스스크랩하기
참빛칼럼섹션 목록으로
 

이름 비밀번호
 44569354  입력
댓글콘선택 : 댓글 작성시 댓글콘을 클릭하시면 내용에 추가됩니다.
[1]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참빛칼럼
다음기사 : 수(數)가 주는 메시지 (2011-12-28 02:43:29)
이전기사 : 아인슈타인의 편지 (2011-12-28 02:42:30)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회사소개 보도지침 저작권 규약 이용약관 사업제휴 직원채용 광고후원 기사제보 연락처 don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