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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2시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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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편지

      

아인슈타인의 편지
최근 한 일간신문에 전 언론인에 의해 '아인슈타인의 편지'란 제하의 칼럼이 실렸다. 내용인즉, 아인슈타인이 그의 종교관을 내비친 자필 편지가 최근 발견되었는데 거기서 그는 종교를 유치한 미신으로, 신(神)이란 단어는 인간의 나약함의 표출이며 성경은 훌륭하나 어리석은 책이라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이 칼럼 기고자는 진화 생물학자 '리차드 도킨스'의 말을 빌어서 그간 기독교인들이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유명인의 말을 구미에 맞게 아전인수격으로 인용하여 기독교 선전에 이용하여 왔다는 비평에 합세하였다.
이 칼럼 기고자는 더 나아가 하이티의 대지진은 "물질 세계의 운동법칙에 따른 자연의 무의미한 폭력이 빚어낸 참사"일 뿐인데 이에 대한 기독교 목사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에 대해 한탄하면서 위대한 과학자의 비판을 계기삼아 종교가 맹목을 버리고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합리적 윤리규범으로 무장한 도덕운동으로 거듭날 것을 촉구하였다. 이런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떠돌이 신학'을 소개하고 있다.
        신학과 과학의 관계
흔히들 생각하듯 신학과 과학은 별개의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학은 어떤 의미에서 과학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꼭 협의의 자연과학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오히려 과학적 지식이라는 전통적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연 과학의 대표격인 물리학(Physics)의 의미는 본래 모든 사물들의 본질적인 성격을 연구한다는 뜻을 담고있다. 그러므로 자연과학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 물리학의 근원은 모든 서구 과학처럼 B.C. 6세기에 그리스 철학의 첫 시기에, 즉 과학과 철학과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때에 발견된다.
물리학은 에너지나 엔트로피등 물질적 구조에 대한 지식을 제공하지만, 생명의 기저엔 물리학이 미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 생물학과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생명의 비밀도 파헤치고 있고 생명의 창조도 더 이상 신의 영역이 될수 없다는 오만한 망상이 떠돌아 다니지만 이것은 단지 "인간의 미망(the human delusion: 환상, 착각)"일 뿐이다. 
과학이 인간이나 우주에 대해 전체적으로 완벽한 설명이 가능한 특정한 발견을 할수 없을때 그 자격에서 벗어나 철학이나 우주학이 되어가는 것이다. 과학적 사고와 신학적 사고와의 불가분한 운명성은 위의 아인슈타인의 말이나 리차드 도킨스, 그리고 위의 칼럼 기고자의 말에도 이미 충분히 드러나 있는 셈이다.
        망상의 하나님
무신론자들은 눈에 보이는것을 보이지 않는 것 보다 더 확실하고 우월한 가치로 인정하는 사고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저들이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무신론자인 '리차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 "The God Delusion(망상의하나님)" 에서 하나님의 전지한(omniscient)속성과 전능한(omnipotent)속성을 양립불가한 개념으로 유도해내고 있다.
 모든 것을 미리 내다보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또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수 있느냐는 의문은 뉴턴식, 즉 기계결정론적인 사고패턴에 기반을 두고있는 셈으로 이 또한  3차원적인 이성의 한계가 낳는 일반적 논리의 자기충돌적 속성의 결과라 보인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치 못하고 철학적 사변의 과제로만 간주할 때는 불완전한 이성의 한계로 인해 좌절할 수 밖에 없다. 즉 완전주의에 기반한 무기력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데, 이는 이성만을 맹신하는 미혹과 교만의 영의 지배를 받기 때문일 것이다.
            무신론(無神論, atheism)의 이해
인본주의와 자연주의는 어떤 종류의 신의 존재든 부인한다. 모든 속세적인 인본주의나 물질주의나 자연주의나 긍정주의들은 무신론의 형태를 가진다고 할수있다.
이들에게 있어 궁극적 실재(the ultimate reality)는 우주일 뿐이며, 우주는 자연법칙(Natural law)에 의해 스스로 움직이며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이들은 기적이나 초자연적 역사를 부인하는데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것들은 자연법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이티의 대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을 "물질 세계의 운동법칙에 따른 자연의 무의미한 폭력이 빚어낸 참사"일뿐으로만 해석할것을 요구하며 어떤 종류의 영적인 의미부여와 해석도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재난과 환난과 재림에 대한 말세의 징조에 대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바(마24:3-14; 막13; 눅21:7-19),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근거해 시대의 징조를 분별할 영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신론(deism)에 입각한 자유주의 신학
역사적 신학조류의 하나였던 이신론은 종교적인 믿음과 함께 이성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는데 문제는 이신론이 기적과 초자연적인 역사를 부인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은 창조와 심판에만 관여하고 세상은 하나님의 간섭없이 하나님이 완전하게 만든 자연법칙(Natural Law)에 의해서만 스스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신론은 결국 무신론의 입지를 공고히 해주었다.
오늘날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예수의 신성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이들은 성경의 초자연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부인하고 예수를 인간 삶의 완전한 도덕적 화신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신앙은 예수를뛰어난 종교 도덕 선생들 중 일인으로 보는 무신론적 인본주의자들의 사고와 맥락을 같이 하는것이다.
          요약
앞에 소개한 칼럼의 필자가 위대한 과학자의 비판을 계기삼아 종교가 맹목성을 버리고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합리적 윤리규범으로 무장한 도덕운동으로 거듭날 것을 촉구하게 되기까지엔 우리는 그동안의 영적인 흐름의 배경을 간과하면 안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초자연적 신성과 초자연적 역사를 인정하는 데서 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말 자체에 맹목성이 들어있는데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언어도단일 뿐이다. 믿음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리차드 도킨스가 아인슈타인에 대해 "그의 삶은 신에 대한 부정, 신을 아예 처음부터 고려하지 않는 과학자의 인생이었다"고 회상했다고 위의 칼럼자는 소개하고 있다.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과학자는 증명으로써만 물리적 존재를 설명하는 신분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신(神)은 어떤 개념이 시시각각으로 적용 되어지는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증명되어질 필요가 있는 물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성질의 존재로서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지닌 분이시기 때문이다(롬1:20).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는 성경상으로 반자연적인것(antinatural)이 아닌, 자연의 법칙을 거스리지 않는 순수하게 초자연적(supernatural) 혹은 외자연적(外自然的, extranatural)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하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이성의 근원이 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과 이성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부분임을 겸손히 인정할때 이성의 한계도 인정하게 된다. 믿음은 이성의 자살이나 이성의 포기가 아니라 이성을 겸손히 내려놓는 것이다.
        반성
한편 위의 칼럼 기고자의 일침과 함께 우리 한인 기독교인들이 반성해야 할 것이 있다면 교회 사회내 신앙 이성의 낮은 수준과 함께 사회법에 비해 윤리도덕 규범의식의 상대적인 빈약을 꼽을 수 있다.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는 우리가 일반 사회의식과 규범의 기준에도 못 미친다면 이는 참으로 슬픈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지 않은가?
위의 칼럼 기고자가 민중 신학에 근거를 두고 온 세계의 떠돌이 소외계층을 보듬어 안는다는 이른바 '떠돌이 신학'을 대안으로 제시한 사실이 흥미롭다. 사회 자연인의 안목으로 기독교인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내적 도덕운동과 외적 개혁운동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 다른 방향에서, 오늘날 예언은사 개발과 사도적 신앙의 명맥을 이어나가려는 교회사회 안의 어떤 흐름에 대해서도 우리는 비판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덥지도 차지도 않은 자유주의의 모호한 회색 신앙이 만연된 교회사회의 해이한 위기적 풍토에서 어쩌면 이런 현상도 신앙의 아나키즘에 대한 반동으로 도래하게 된 필연적인 영적 조류의 한 현상이 아닐까 주시할 필요가 있을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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