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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2시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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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주는 교훈

              
오해가 주는 교훈           
이성은 그리스어로 '로고스'지만 라틴어로는 비례나 균형을 뜻하는 '라티오'란 뜻이있다. 이성은 우리에게 사물을 전체적으로 균형있게 보도록 도와준다.  이에 반하는 오해란 사물을 전체적으로 균형있게 보지못하고 부분적으로 편향되게 보게하는 것이다.
인생살이에서 문제와 사건과 불행을 낳는 주범인 이 오해란 과연 무엇때문에 생기는 것 일까? 대답은 우리의 무지나 선입견 혹은 감정의 불안정 때문이다. 사실적 의미나 사실적 사건을 모르거나 왜곡하는데서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순수한 오해는 이해를 만나면 화해가 된다. 그러나 독선이나 감정이 앞선 나머지 이성이 마비될 때는  우리도 모르게 굳은 오해가 생겨난다. 이런 오해는 애당초 이해를 배제한 오해이기 때문에 '눈먼 오해'라 부를만 하다.
'눈먼오해'는 '이성의 아나키즘'이나 '돈키호테적 이성'이라 표현하고 싶다. 필자는 전편의 칼럼에서 '신앙의 아나키즘'이란 은유적 표현을 쓴바 있다. '아나키즘'이란 기존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무질서'나 '혼란'의 의미로 여러분야에 다양하게 적용되는 용어이다.
'신앙의 아나키즘'은 부분적 사안에대한 염려를 넘어선 교회사회 전체의 질서를 흐리거나 위협할만한과격하고 극단적인 표현이나 의문과 비판등 항(抗)권위적인 성향을 경계하고자 사용한 은유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살아가면서 인생의 다양성에 대해 경이를 느낄 때가 많다.  때때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예기치않은 저항은 전후문맥(콘텍스트)을 떠나 부분적으로 얼토당토않은 적용을 하는 경우를 만날 때처럼 매우 망연자실하고 곤혹스러움을 느끼게도 한다.
예를 들면, 두부를 '밭의 고기'라고 하는 것은 두부의 높은 영양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밭에서 나는 것은 '채소'나 '곡류' 뿐인데 '고기'가 난다니 아닌 것은 아니다!"하고 누가 전투 태세를 갖추고 항의를 해온다면 대경실색할 일이 아닌가?
스페인이 낳은 최고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불후의 명작인 소설 돈키호테 속에는 자기 신념에 빠진 주인공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거인인줄 알고 창을 앞세우고 돌격하는 유명한 장면이 나온다.
 
정의의 전투, 이 지구상에 널려 있는 악의 씨를 근절시키는 것만이 하나님에 대한 위대한 봉사인 것이라고 믿고 있는 돈키호테에게는 풍차가 멸망시켜야 할 악의 화신들로 보인 것이다.

돈키호테의 굳은 자기신념은 말리는 하인 산초의 말도 소용없고 풍차에 가까이 다가가서도 확인도 하려하지 않았지만 공격전 기도 만큼은 두손모아 비장한 각오로 올렸다.
  
이 소설은 우리속의 자기 몰입적 사고가 가져오는 인생의 우여곡절한 스토리들에 대한 신랄하고도 해학적인 풍자이기도 하지만 신앙인인 우리에게도 선악의 이원론적 사고가 가져다주는 모순과 폐해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한편, 이런 우리 속에 있는 '의외의 변수'로 인해 인생은 단조롭지만은 않다. 정말 어디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손에 진땀이 난다.
대개 돈키호테식 오해는 자신의 생각에 온통 사로잡혀 있을때 많이 일어난다. 자기 이론이나 선입견이 강하고 감정이 상해 있을때 일수록 심각도가 커진다. 자의식이 극대화 될때도 이런 오해가 벌어질수 있다.
필자는 전칼럼에서 '성구 제비뽑기'라는 금시초문의 주제에 대해 여러가지 가정을 시도해 보았다. 실행자와 인터뷰를 한적이 없으니 데이터도 없고 이것의 의도와 성격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만 교회사회 전체의 덕을 위하여 극단적인 과격한 비난에 앞서 진상을 신중히 검토해보자는 제안을 한것 뿐이었다(암송성구의 성격인지도 모르므로). 그런데도 어느 한편에서는 돈키호테식 이해를 하는 일이- 오해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다 한다.
순수한 오해든 눈먼 오해든 대개 오해는 심각한 불화와 불행을 낳는다. 그러면 이것을 방지할 방법은 무엇인가? 인간 관계에서의 오해는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인생 채찍이요 인간 막대기일 수있다.
그러므로 오해를 받을 때는 자기성찰의 기회로 삼고 묵묵히 참고 견디는것이 가장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고 영적 성숙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다. 또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절호의 귀한 기회이기도 하다.
한편 오해를 지적 받는 자는 자기속에 돈키호테식 신념이 없는가를 진단해 보아야 한다. 나의 신앙의 명분을 위하여 정작 우리가 섬겨야 할 '주님'을 도리어 '돈키호테'가 부리는 말, '로시난테'처럼 마구 채찍질하고 부리어 상처 투성이로 만들어 드리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인류 역사상 오해로 인한 인류 최대 비극의 전형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한 사건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인간의 무지와 독선과 편견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16:15)" 
당시 주님의 물음에 온전히 답한 자는 베드로 외엔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1:46)"는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었고, 예수는 평범한 자기 고향사람이요 자기집안 사람일 뿐이라는 선입관(마13:57)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물으시는 이 물음은 오늘도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주어지는 질문이다.  우리는 주님을아는가?
우리에게 주님을 아는데 방해되는 독선은 없는가? 혹 우리는 자주 이분법적인 정죄의 영에 사로잡혀 사물을 굴절된 시각으로 오독하고 오판하지는 않는가?
성령의 이름을 빙자해 시도 때도 없이 향방없는 '베드로의 검'을 뽑아들고 있지는 않는가? 은밀히 기도하는 대신 '기도해주자'는 말을 상대에 대한 분풀이나 공개적으로 모욕하는 수단으로 삼은 죄는 없는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주님께 입을 맞추는 유다가 우리 속에는 없는가?
우리속에 있는 '견고한 진'은 무엇인가?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고린도후서 10장 3~5절) "
우리 안에 있는 돈키호테식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충성된 군사가 될 수있다. 주여,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셔서 우리 속의 모든 생각이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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