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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2시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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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체적 신앙을 가지자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요즘 사람들은 이름을 붙이기 좋아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번영 신학'이니 '기복 신앙'이니 '고난 신학'이니 하면서 손쉽게 명명하며 비평하는 추세이다. 

그런가하면 교회의 목회자들을 정치인이나 사회 저명인사들의 회동이나 사건의 시각으로 분석하는등  교회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사사건건 뉴스거리로 삼아 강한 비판의 목소리로 여론몰이를 하는 문화가 당당히 자리를 잡고 있는 현실이다. 

많은 이들이 신앙의 안에 있는 진수를 맛볼 틈도 없이 피상적인 기독교 문화에 중독된 듯 하다. 단편적인 사견(私見)을 공론화하는 말, , 말의 홍수속에서 길잃은 양들처럼 부회하고 있는 교회사회의 현실이 참으로 마음 아프다.   

살아가면서 점점 우리가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것을 깨닫게 된다. 평소에는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어떤 고난이 오면 새삼 자신의 믿음 없음을 발견하고 크게 놀라게 된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믿는 것은 겨자씨만한 믿음이나 황소만한 믿음이나 근본은 동일한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믿는 것엔 다소나 대소의 개념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의 일반적인 믿음의 표현과 달리 구원을 얻는 기독교의 믿음은 결정적으로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겨자씨만한 작은 사이즈의 물건을 비유로 우리의 믿음을 권고하실 만큼 표현의 선택에 있어서 여유로우셨던 것 같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의 고난이 해결되었다는 믿음이나  요한3 1:2 "사랑하는 자여 영혼이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의 삼중복음으로 명명된 믿음을 우리가 기복 신앙이니 번영신학이니 거론하며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육체적인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 혹은 인간관계의 문제의 해결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할때 그는 우선 먼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주님께서 우리의 질고를 담당하셨다는 확신은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예함으로서 경험적으로 얻어지며 이에 의해 치유와 회복에 대한 전적인 소망과 믿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소망과 믿음은 온전히 결과를 하나님의 뜻에 맡긴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주시는 분임을 믿어마지 않는 것이다.  이의 가장 극명한 모본은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기도에 나타난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14:36)"  인간적으로는 가장 극심한 고통의 잔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장 귀한 영광의 잔이었던 것이다.

즉 어린 아이와 같이 전적으로 부모를 의지하는 순수한 믿음으로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수 있고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좋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순수한 것이다.  아이의 사정을 가장 잘 아는 부모는 아이의 상태를 가늠하여 가장 좋은 응답을 아이에게 하여 준다. 때로는 그 응답이 아이에게 백 퍼센트의 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하여도 부모는 여전히 전적인 신뢰의 대상일수 밖에 없다.

기복신앙이니 번영신학이니 이름 붙이는 것은 아이의 순수한 마음을 폄하하는 순수하지 못한 마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틴 에이저에게서 종종 볼 수 있듯 교만한 인본주의적 사고가 기저에 있는 것이다.  연약한 인간이 하나님에게 바라는 보호와 행복의 소원은 극히 겸허하고 소박하고 양순한 마음이며 신앙의 출발이고 근본이 되는 것이다.  위기에서 이러한 믿음은 더욱 도전이 되어 빛을 발하게 되며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원동력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런 믿음은 고난신학을 통과하여 나오는 산물인 동시에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한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전 4:7)" 이 생명의 능력으로 우리는 연약한 형제의 짐을 담당할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를 넓혀 갈수 있는 것이다. 

요컨데 복음의 진리는 유기적이고 총체적인 것이다.  기복과 고난, 이기와 이타, 받음과 나눔, 번영과 희생, 개인과 사회, 현세와 내세가 함께 어우려져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리하고 따지는 것은 신앙의 속살에 들어가지 못한 소치일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정식으로 점검해 보아야 한다.  매일 고난에 참여 하지 않는 믿음과 주님께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는 전적인 확신이 없는 믿음은 믿는다는 착각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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