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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2시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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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아나키즘

    수년 전의  일이다.  학문적으로 우수하다고 인정받는  한 신학교의 강의 시간이었는데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담당 교수가 한국 교회의 새벽기도 제도를 옛날 선조들이 새벽 일찍 일어나 정화수 떠놓고 빌던 무속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 일갈하는 것을 듣고는 마음에 번민이 생겨 영 정(情)을 붙이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는 그런 가르침에 나의 영(靈)이 상처받은 듯 매우 아팠었다.  뭐랄까...본질이 비 본질에 의해 매도되고 신성이 세속에 의해 유린당하는 느낌이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 당시 나는 그 윤리 교수에 대해 인간적인 연민을 가졌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이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말 속에서 그가 기성 교회의 생활중 겪었을 정신적이고 영적인 상처를 감지했던 것이다.
어느 조직과  기관이고 그것이 설립되고 운영되는  기본 취지와 목적을 담은 정신이  있기 마련이다.  바른 기업 정신이  모범적이고 성공적인 기업을 만들어  내듯이 바른 신앙관은 모범적이고 균형잡힌 신앙인으로 성장시킨다. 

바른 신앙관이나 신학을 갖기 위해서는 세계관에 대한 바른 인식과 통찰력있는 안목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급속한 경제 성장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인문학 같은 순수 학문보다는 실용적인 학문에 중점을 두어왔다.  그래서인지 분석하고 종합하는 논리력과 객관성에 있어서 서구인들보다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신앙생활의  현장에 있어서도 어떤 현상에 대해  근본을 고수하면서 전체를 다치지 않도록  사안별로 비판하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어떤 세태나 소속  단체의 기류에 편승하여 자기 여과없이  유행처럼 우-하고 대중을 몰아가고 몰려가는  현상이 비일비재한 것 같다. 요새 이슈를  삼고 있는 듯한 송구영신 예배때의 말씀 제비뽑기의 예도 예외가 아니다. 

제비 뽑기의  유래는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맡기실때 이들을 위해 거룩한 옷을 지어 입혀 직분을 행하게 하셨는데, 제일 겉옷인 에봇에 붙인 판결흉패 안에 넣어두게 하신 우림과 둠밈에서 비롯된다(레8:8).

우림은 '빛들'이란 뜻이고 둠밈은 '온전함들'이란 뜻인데 속죄 제물 결정등(아사셀 염소 결정: 레16:7-10) 이스라엘의 민족적 중대사를 판결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아 제비 뽑기의 도구란 해석이 유력시 되고있다.

제비 뽑기는 그 후에도 하나님께서 출애굽 후 가나안 땅 분배시 모세에게 명하신 것으로 (민26:52-56; 수14:2)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기업의 분배 방식이었으며, 전쟁등 국가의 대위기시 (삿1:1-3; 20:27), 범인을 찾을 때(수7:14; 삼상14:41- 42; 욘1:7), 사무엘이 사울왕을 뽑을 때등 특별 인물 선출이나 레위지파의 직분 배치시(대상24:5), 신약시대엔 가롯 유다를 대신할 사도 맛디아를 선출시(행1:26) 행해졌다.

가나안 땅 분배시 땅의 크기는 인구비례제로 정해졌으나 그 위치는 제비뽑기로 결정(민26:52-56)하게 하신 것은 특정 지파에 특혜를 주는 것을 막고, 각 지파의 기업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각 지파의 특성등을 고려하여 당신의 주권에 의해 나누어주는 것임을 드러내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서로 분쟁이나 시비없이 감사함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또 다윗이 아론의 자손의 두 가문에게 성소의 직임을 맡길때 제비 뽑기로 결정한 것은 각 가문의 수(數)에 관계없이 성소의 직임만큼은 동등한 입장에서 결정하도록 한 것이었다(역상24:5).  

그러면 제비뽑기의 근본 정신은 무엇인가?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는 말씀이 나타내듯 제비 뽑기는 그 결과를 온전히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돌리는 신앙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이 제비 뽑기는 고대 근동의 여러 국가들에게서도 행해졌던 것인데 그들의 제비뽑기 정신은 운명에 맡긴다는 의식에서 출발한 것이지 하나님의 주권의식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면 요사이 비판당하는 말씀 제비 뽑기는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보자.  필자는 확신컨대, 송구영신때 말씀의 제비 뽑기를 창안한 목회자가 운명론에 입각해서 이 아이디어를 고안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위에 열거한 성경적 제비뽑기의 사례중 말씀을 '하나님의 기업'의 의미에 적용하여 고안한 듯 싶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시 119:89);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마24:3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  그리고 또 하나는, 성경의 어느 말씀이든 하나도 예외없이 다 우리에게 적용된다는 믿음에서 행한 것이라 보여진다. 

적어도 어느 목회자가 양들을 위하여 제비뽑을 말씀을 정할때는 전체 교인들을 생각하며 기도하는중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말씀을 골랐을 것이라고 믿고싶다. 우리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음성은 스스로 기도나 말씀 묵상중 또는 삶속에서 직접 감지되지만 때에 따라서는 목회자를 비롯한 타인이 기도하여 주는 동안 간접적으로 듣게 되는 경우도 많이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기도중 전체 회중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경우 설교 말씀의 본문을 정하듯이 그 주제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 성경말씀을 정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보는 것이다.

이런 제비뽑기 방법에서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전지 전능한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신앙의 자세를 키울 수 있는 점이다. 즉 뽑은 말씀이 꼭 나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믿으며 감격할수 있는 순수하고 설레는 경험을 맛볼수도 있겠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은 이로 인해 초보 신자들이 일상적인 말씀생활을 게을리하고 말씀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 한다던지 스스로 신앙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 보다 타인에게 의존하려는 경향이 생길수도 있겠다.

그러나 요사이 더 위험한 것은 극단적인 편견과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함부로 교회 사회를 공략하고 질서를 허물어 뜨리려는 어중간한 자칭 기독교 리더들이다. 이들은 연말에 행해지는 말씀 제비 뽑기를 "신년 운세"에 비유하거나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상혼, 그동안 무속신앙에 젖어 살던 우리 민족들이기에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부추기는 교묘한 악의 축이 교회 안에서도 형성되고 있다"고 비난을 퍼붓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스스로 자신이 정말  성경의 깊이를 알고 주님의 사람인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적어도 어떤 사안에 대해 공적으로 비판하기 전에 본인이 직접 가서 해당 목회자와 대화하고 확인해야 하지 않을까?

심중에 진정성이 있다면 방법에도 진정성이 드러나는 법이다.  만인 제사장 시대요, 평신도 사역자 시대라고 하지만 어느 사회에나 세워져야 할 질서가 있듯이 교회 사회 안에도 말씀을 전하는 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법이 있다. 질서와 직임을 존중하는 양식과 겸손함이 없다면 신앙인 이전에 야만적인 시민으로 전락되고 말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6:6)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우리에게만 있는 송구영신 예배라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 따진다면 새벽 예배도 마찬가지다. 한국인들이 가진 특유한 정성은 민족적인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귀한 가치로 여겨야한다.

일요일 예배와 성탄절을 태양신과 연관지어 비판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큰 문제다. 이들에게는 왜 예수님보다 태양신이 앞서는 것일까?  왜 쓸데없는 다른 신(神)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예외적으로 주일에 예배를 볼수 없는 부득이한 사람들을 위한답시고 공적으로 정해진 주일에 시비를 거는 행위는 교회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위험한 일이다. 

내용없는 형식은 부패하지만 형식없는 내용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을 유념해야 한다.  바가지가 있어야 물을 담지 않겠는가? 필자는 요즈음의 이런 현상을 신앙의 무정부주의(anarchism)라 부르고 싶다.

우리에게 낮과 밤, 하루 하루와 달, 한해, 한해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새해와 묵은 해의 개념도 매우 중요하며 각 절기도 그러하다. 

이것은 우리의 체질과 성정을 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창1:14) 

문제는 우리의 예배 정신이다.  하나님께서 싫어 하시는 것은 회개의 열매가 없는 형식적인 예배 자세이지 절기와 성회를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니다(사1:13-17). 바울의 염려도 믿음을 저버리고  율법주의에 빠진 동족들에게 향한 것이었음에 유념해야 한다(갈4:9-11; 골2:8b). 

세상에서 생일과 기념일과 제일을 지키듯이 기독교인들이 사순절과 부활절을 지키고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을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매일 생명을 기뻐하고 매일 신혼의 기쁨으로 살아가며 매일 돌아가신 부모님의 은혜와 추억을 간직하는 자에게 이런 날은 더욱 기쁘고 의미있는 날이 될지언정 방해가 되는 날이 결코 될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혹자는 영원의 시간 개념을 도입해 구체적인 시한(時限)을 무시하는 뉘앙스로 신앙 생활에 관조적인 무드를 조성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태도는 현실적인 신앙생활에 마이너스가 될 위험이 많다. 하나님편에서 보는 초월적인 영원한 시간성에 대한 명상은 우리의 개인적인 묵상과 영적 체험으로 족하다.

이런 생각이 파급되면 자칫 신앙생활의 타성화와 나태와 무기력에 빠질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여기 (here), 지금(now) 이 시간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순간(瞬間)에 전념하는 것이 바로 영원(永遠)성과 연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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