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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2시3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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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기근시대

말씀의 기근시대     

말씀의 홍수 속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말씀의 기근 시대가 도래했다.  2700여년전 일찌기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셨던 심판의 말씀이 적용되는 위기의 시대를 맞이했다(암8:11).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큰 번영을 이루었던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는극도의 종교 도덕적 타락 현상이 나타났다. 현세지향적이며 극단적인 인본주의적 이기심이 팽배해 공법과 정의가 내팽개쳐진 그때에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촉구하시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 시대에도 떨어지고 있다. 

말씀이 지천이건만 생명력이 없는 모양과 악세서리로 이용돠는 마른 뼈들이 되고 말았다.  말씀의 기갈은 영적 기갈로 이어져 영적 무능력과 무감각을 초래해 급기야는 영적 타락으로 치닫고 있다.  왜 그런가?  세상의 거짓 신에게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말씀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우상들에 붙잡혀 있는 것이다.  말씀의 권위보다 자신의 사상이 관습이 자신의 명예와 권위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말씀의 진의보다 현세적인 이권과 평판과 집단이익과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말씀의 장식화, 말씀의 가공화, 말씀의 도구화의 시대가 열리고있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여성과 관련한 많은 한인 남성 목회자들의 자의적이고 편파적이고 왜곡된 말씀 해석 현상이다.  본래적인 말씀의 의미와 가르침을 떠나 말씀 해석의 주안점이 특정 성을 두둔하거나 특정 성을 비하하는 것에 맞춰져 있는 현실이 대세를 이룬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한국 교회 사회의 탈 윤리화와 더 나아가 이에 대한 합리화와 무감각의 방패로 이용되어지고 있다.  오늘날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싸움은 더 이상 교회 밖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믿음의 성숙의 과정에서 주어지는 분별의 문제도 아니다.  영적 지도자의 기본적인 교회 내 말씀 해석에서부터 이미 주도권 쟁탈전이 시작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다윗왕과 밧세바 사건을 들수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다윗 왕의 범죄의 원인을 밧세바의 유혹으로 돌려서 주일 예배 시간에도 표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사무엘서의 역사적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적 메시지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전달된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삼하11:26-27;12:1) "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나단을 보내었고  다윗은 깨닫자마자 곧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부복하였다.  성경엔 결정적인 선과 악의 행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관여한 심리적인 내면의 묘사가 꼭 들어있다.  그러나 밧세바에 대해서는 다윗의 행악의 동기에 영향을 미친 단 한 귀절도 나오지 않는다. 대신 "우리아의 처가 그 남편 우리아의 죽었음을 듣고 호곡하니라(삼하11:26)" 고 밧세바의 슬픔을 자세히 표현하고 있다. 만약 밧세바에게 고의성이 있었다면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분명 밧세바에 대해서도 책망을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통하여 우리는 밧세바가 남편 우리아의 둘도 없이 사랑받고 딸처럼 돌봄을 받는 유일한 아내였으며 자녀들에게는 정다운 자매 같은 어머니로서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의 행복한 여인이었음을 알 수있다 (삼하12:1-4).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의 많은 복음 전달자들이 절대 왕권 제도하에서 왕의 신하의 아내로서 왕명에 순응하였던 힘없는 피해자인 한 여성에게 동정은 고사하고라도 왕의  실책을 전가하려는 억지마저 부리는 모습은 차라리 비 양심적 횡포에 가깝다고 할수 있다.  단지 뿌리 깊은 한국인들의 재래적  이기적 사고의 유산이라고 표현 하기엔 너무도 견고한 진이 자리잡고 있어신앙 양심이 실종되어 있는 인상을 준다. 이들은 어쩌면 다윗 왕조로 인해 영원한 기업의 족보가 기록된 역사적 현실에 의존하여 다윗왕을 어떻게라도 두둔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심리는 동기와 과정이 중요시되는 신앙의 진수를 망각하고, 나타난 결과에만 무임승차하려는 알맹이 없는 껍질 신앙의 단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신정왕국의 통치자로서 자신의 신앙적 도덕적 양심을 포장하기 위해 양심을 판 모습과 행동을 감행했던 다윗이었지만 엄위한 하나님의 말씀앞에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 놓았다.  여기에 다윗의 위대성이 있다.  이제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눈과 평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한 분이 되었던 것이다.  시편 51편의 고백을 빼놓고는 우리는 다윗의 진면목을 결코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육신의 혈통에 따라서가 아니라 영적 혈통에 따라 이뤄져 왔다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민수기 5장에는 정결의 법과 손해 배상법과 의심의 법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 의심의 판결법은 인간 공동체의 기초 단위인 가정의 신뢰 회복과 나아가 전 공동체의 신뢰의 중요성을 교육하기 위한 율법이다. 이의 근본 정신은 하나님의  방법만큼 완전하고 정당한 것은 절대 없다는 믿음이다.  그러기에 이 법은 문제 해결의 열쇠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있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법이다.  약하고 한계가 있는 인간이 풀수 없는 문제를 최고 권위의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공의의 판결에만 의지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이다.  그러나 제사장이 하나님보다는 사람과의 관계에 더 치우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를 들면, 제사장이 의심스럽다는 핑계로 아내를 데리고 온 남편의 의중을 읽고 평소 남편의 사회적 신뢰도나 평판 혹은 자기와의 이권적 관계에 치우친다면 여성의 인격과 권리를 존중한 이 법이 매우 답답하고 불만스러울 것이다.

 일반적인 삶에서 보듯 이 법도 경우에 따라서 수년 혹은 수십년 생애에 걸쳐 드러날 수 있는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이다.  급기야 이런 차별적이고 실리적이고 편견에 가득찬 세상적인 제사장은 자기 속의  욕심때문에 불만을 느끼고 이 불만은 의심을 낳아 하나님의 법의 권위를 훼손하는 죄악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제사장에게 먼저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믿음의 확신이 없다면 그를 리더로 세운 백성들의 형편은 어떠하겠는가?  믿음의 공동체의 생명력은  자연 쇠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신앙인들의 영적 해이는 자연 그들을 도덕적 해이한 생활로 안내할것이다.

어느 시대나 신앙의 절대성과 순수성이 사라지면 그것은 반드시 도덕적 부패와 성적 타락을 가져오게 된다.  하나님을 마음 속에 왕으로 모시지 않는 신앙인들은 자기의 생각을 왕으로 모시게 된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21:25)."  사사기 19장 1절에는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우거하는 한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였다가 그 첩마저 바람이나 가출후 윤간을 당하여 죽게되자 극도의 방법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부끄러운 이야기가 나온다. 

이 가공할 이야기는 당시의 만연된 종교적 사회적 부패상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으로써 물론 이 시대에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사무엘이 성장하던 때는 영적으로 쇠퇴한 시대였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삼상3:1)". 

제사장 엘리는 하나님의 영적 관계를 체험해야 할 사람이며 분별력을 가지고 백성을 정결케 해야 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식들을 더 우상화하였다.  자신의 소유와 관계를 더 중요시 했다. 이 결과 말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죄악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는 영적 무지와 제사장들의 윤리적인 타락을 가져왔다. 제사장이라는 타이틀을 무기로 성전을 간음의 소굴로 만들었다. 

개인윤리, 가정윤리, 사회적 윤리가 무너지며 성적 타락과 불륜이 팽배한 시대였으며 바르게 교훈해야 될 제사장이 어두워짐으로 모두가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꼭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는 듯 하다.

말씀의 기근을 가져오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무엇이겠는가?

  첫째로,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으로 두는 말씀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회복되어야 한다.  말씀을 의심하고 변개하려는 유혹은 태초부터 등장한 사탄의 미혹술에 그 정체가 이미 드러나있다. 창세기 3장에 간교한 사탄은 인류 최초의 어머니에게 다가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하나님의 말씀을 겨냥하여 접근하였다.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2:17)"는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과 판결의 말씀을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3:3)"는 어떤 모호하고 의심할만한 가능성이 개입된 인간적인 구미에 맞춘 말씀으로 변개시켜 가다가 결국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3:4)"는 불신앙의 확신으로 몰고갔다.  이렇게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정면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오늘날 신앙의 지도자들은 성경의 영감과 권위와 무오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고 이면에는 세상적인 신 - 즉 자기의 우상이 자리잡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또성경의 역사적이고 사실적인 진술을 하나의 구전된 이야기거리로 여기는 사고가 우리 속에 있지 않나 반성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의 주체로서 변개함이 없으시며 반드시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고 실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임을 믿어야한다(시12:5; 베드로전서 1:23-25).

둘째는, 하나님의 관점보다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여 대중의 호응에 편승하거나 눈가림하거나 진리의 말씀을 희석하거나 가공하여 실리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세속주의적 풍조를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순종, 죄의 정직한 고백, 진실한 회개와 용서, 심판등 성경의 본질적 진리수호와 전파의 사명을 망각하고 세속적인 기호나 현세적 관계성에 맞추어 자의적인 유사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교묘히 변개하고자 하는 사탄의 미혹에 놀아나는 죄악임을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그를 두려워 하는구나(욥2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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