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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2시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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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번째 증인 마리아 (요 20:11-18)

 


우리  한인여성목회자들이 함께  모여 협의회를 만들고  임원들이 선출되고  오늘 임원취임예배를  드리게 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은  가장 먼저 부활하신  주 예수그리스도를  만나 보았고, 주님에게서  메시지를 받아 제자들에게  전달한 마리아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우리 주님께서  여기 모이신 모든  목회자님들과 임원  되신 여러분에게 주신  의미가 무엇인지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얼굴을 직접 만나  뵙고 “마리아”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들은 복되고  선택받은 여성으로  제자들에게 “가서  전할 말씀을 명령받은”  첫 번째 분입니다.

주님은  부활 후 모두 11번  보이셨는데 일등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도  아닌 11제자를 남겨두고  하필이면 당시 그  사회에서 멸시와 천대받은  여성이었을까라? 생각했습니다. 가부장시대의 남성들이  판치는 곳에서 7귀신이  들렸던 여인 마리아는  그 당시의 문화로 볼 때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여성이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에  대하여 잠시 알아  보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에게서  구원에 이르는 만남을  갖인 여성이었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났고, 구원자 주님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므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열정적인  신앙을 가진 여성이었는데 7귀신이  들린 채로 가버나움에서 3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살다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병을  고치고 변화되었습니다. 7귀신은 현대 해석으로는 정신병이나 광기에 가까운 우울증 또는 간질질환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합니다.

“마리아”라는  의미는 비통, 괴로움, 쓴  맛을 의미하는데 마리아는  그의 전 생애를  예수님께 바친 여성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를  지켰던 여인들 중의  한명으로 골고다의  가장 삭막하고 외로운, 주님이 마지막 고통을  당하던첫그녀는 예수님께서 시돈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감히 들어갈 수 없는 그곳에 들어가서 주님 앞에 앉아 눈물로 발을 씻고 300데나리온 비싼 향수를 깨어 주님에게 부운 여성으로 주님의 칭찬은 들었으나 경제적인 마인드를 가진 제자를 시험들도록 만든 여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에는 마리아는 7귀신 들려 고생하던 병든 양이었습니다. 주님에게서 병을 고친 후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극진한 사랑과 헌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말씀대로 “주님이  부활했으므로 무덤이  비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했음에도  마리아는 무덤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 정도의 약한 믿음을 가진 마리아였으나 주님을 사랑하는 그녀는 다시 또 무덤에 와서 울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대신에 믿어야  할 때 두려워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웁니다. 우리들도 참으로  많이 울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여성들에게  자유롭지 않고 불편했던  환경이 여성들을 좌절하게  했고 눈물을 흘리도록  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좌절감을  느끼고 아마 주  앞에서 눈물을 흘린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눈물을 단지 속에 채운다고 생각하면 눈물단지가 차고 넘쳤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천사가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오로지  이곳 본문에서만 마리아가  무덤 안에 앉아있는  천사를 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집에 갔다가 다시  와서 사라진 주님의  몸으로 인하여 울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슬픔은 예수의 죽음과  시신의 도난이라는  절망이 겹쳐 슬픔의  정도가 매우 심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슬픔의 정도가 매우 심했기 때문에 두 천사, 예수님 모두 그 눈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천사가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랑이 가득찬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천사들은  주님의 부활을 말하지는  않았으나 마리아의  슬픔에 알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주님의 몸을  데려가고 없습니다.”  라고 마리아가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야!”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저는  성서에서 말해진 스토리  중의 가장 아름다운  스토리는 바로 주님이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고  마리아가 그에 대답하는  장면이 아닌가 합니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는 주님!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선한  목자들은 자기의 양을  알고, “이름을 불러”  부릅니다. 마리아는 목자이신  주님의 한 마리  양이었고 그래서 그  양은 주님을 알았습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양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아시고, 저희들은  그 분이 우리의  주님인고로 우리를  부를 때 “예”하고  마리아 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부르는 주님의 이름을  듣고 마리아 같이  그 분이 누구지  압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이름이 불렸던 적이  있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나는 너를 이름으로  안다”고 말한 것  같이 여러분은 주님이  부르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전달할 말을 듣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눈을 갖기를 바랍니다.

아들과  같이 하루치의 양식을  가지고 집에서 쫓겨나서  뜨거운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마실 물과 먹을  양식도 다 떨어져  죽음 밖에 남지  않았을 때 충격  속에서 앞에 있는  우물도 볼 눈이  없었던 하갈과 같이  마리아도 부활하신  주님이 거기 계시는데도  볼 눈이 없었으므로  그곳에 예수님이 계신지  몰랐습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가 찾는  것이 손에 이미  쥐어져 있는데도 없다고  슬퍼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사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손 안에 쥐고만 있습니다. 손안을 펼쳐보십시오. 그러면 쓰지 않고 그냥 있는 은사들이 있는 것을 발견할 것 입니다.

왜  이 여성 마리아를  선택하였을까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의  첫 소식은 이 여성  마리아를 통하여 들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위해 기름을  발랐던 마리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  것도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마리아는 마음으로  주를 찾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마음에  상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언제나 마음입니다. 마리아는 진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전념했던 분이었습니다. 이 여성은 정말 복을 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그녀가 보여준 행동 속에서 우리는 마리아의 성품을 생생하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받은 마리아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 여성과 무엇이 같은가 생각합니다.

빈  무덤은 희망의 근원입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빈 무덤, 사라져 보이지 않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절망 속에서 몹시  울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사람들은 억제할 수  없는 절망이나 슬픔에 잠기면 마리아와 같이 육안에 보이는 것만 봅니다. 구부려 빈 무덤 속을 드려다 보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영적인 눈과 귀가 열렸다면 마리아는 그녀를 위로하는 하늘에서 온 두 천사, 하늘이 보내준 증인의 말을 듣고 주님이 부활하셨음을 알았을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비통과 절망의 상태에서  부활의 기쁨을 찾거나  영안이 떠져 부활하신  주님의 빈무덤을 보는  것이 아닌 오로지  육신의 눈으로만 빈  무덤을 보려고 했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아서, 눈물로 눈이 흐려져 잘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마리아야” 하고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 까지는. 그리고 만났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누구를  찾느냐?

흘러넘치는  슬픔의 근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찾았을  때 정지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의 마음이  상한 자를 찾아오셨고, 마음이 상한 모든  백성의 눈물을 씻겨  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25:8; 계21:4)

비통하여  아무 희망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아도  우리는 모든 일이  합하여 우리에게 평안, 기쁨을 주는 것을  압니다. 한인여성들은 그동안 그렇게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 상태, 잡을 수 있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채 새벽마다 애통하고, 눈물로 기도하며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아무 것도 앞으로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암담한 마음으로 살아 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분이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들 한인여성목회자를 사랑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울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뿐 아니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이 지난 후 기쁨은 오게 되어 있습니다.

아들을 오래 만나지 못한 요셉의 아버지 야곱도 “모든 일이 다 나를 괴롭게 한다”고 말했으나 그는 오래 살아서 고관이 된 잘난 아들 요셉을 만났고, 과거 경험한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감사드린 사실을 압니다.

주님은  마리아에게 제자들에게  전할 기쁜 말씀을  주었습니다.

살아나신  주님의 육신을 보고, 전달할 말씀을 받은  마리아에게 변화가  생겼음을 봅니다. 더  이상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어졌고 슬픈  눈물은 슬픔은 기쁨으로  충만해졌습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주님을  직접 뵙고 가서  전할 말씀 “주님이  부활하셨다”를 받은  마리아로 인하여 세상의  변화는 시작 된  것입니다. 만일 그  자리에 마리아가 없었다면, 울다가 지쳐서 가버렸다면  어떠할 뻔 했나... 라고  생각해봅니다.

마리아의  말씀의 전달로 인하여  주님의 약속은 지켜졌습니다.(요16:20-22)

“20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22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주님이  이 시각에 우리  여성목회자들에게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도  같은 말을 하시는  것을 듣습니다. 마리아가  부활 후 첫 번째  주님의 명령인 말씀의  전달을 명령받았던  것 같이 여러분도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여성들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첫 번째 증인, 복음을 전달한 첫 증인입니다. 마리아의 믿음이 최고의 절정에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녀를 첫 증인으로 삼으셨고 제자들에게 그의 부활을 전달할 의무를 명했습니다.

우리가  몇 가지 그날 새벽의  상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새벽에 다시 묘지를  찾아갔다는 것은 마리아가  주님을 사랑했다는  증거와 동시에 주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 주위에 무장한 군사들이 지키고 있는 위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무덤을 가장 먼저 찾아갔던 것입니다.

모든  열한 제자들이 다  도망할 때 마리아와  이들 여성들은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마리아는  이른 아침 어두울  때에 주의 무덤에  찾아갔으며 병정들만  지키고 있는 곳에  동반자도 없이 혼자서  갔습니다. 빈 무덤을  발견한 그녀는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무덤이  비었다”고 말했으나  자신이 또 다시 빈 무덤을 찾았고, 슬픔 가운데 울었으나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고 그래서 결국에는 주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모세는 호렙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모든  고난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마리아의  주님을 만난 기쁨은  그의 고통이 컸던  만큼 더욱 더 컷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삶이 죽음 이전과는  질적으로 달라진 것을  인식하면서 그분의  부활의 소식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음을 깨달았고,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이 주님을 뵈온 것과 주님께서 자신에게 일러주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와 문화는  주님이 마리아에게  주었던 첫 산증인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녀의 공을 공식적으로  제외시켰습니다. 초기  교회가 제도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여성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박탈했는데  교회가 가부장적인  성격의 위계사회에  타협의 수단으로 수용하려고  한 결과입니다. 그후  여성들은 교권에서  소외되었고, 이단으로 몰렸으며, 마녀로 취급되었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하는 등 수난의 역사를 겼었습니다. 이 시대는 다릅니다. 지금은 여성들의 역량과 지도력이 힘을 모아 발휘되도록 할 때입니다. 그 의미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첫 번째 주님의 부활의 복음을 전한 사도였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선한  목자들은 자기의 양을  알고“이름을 불러”  부릅니다. 마리아는 목자이신  주님의 한 마리  양이었고 그래서 그  양은 주님을 알았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양입니다. 그분은 우리들을 아시고, 우리들은 그분이 우리의 주님인고로 우리를 부를 때 “예”하고 마리아 같이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이름을 듣고  마리아 같이 그  분이 누구지 압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나는 너를 이름으로  안다”고 말한 것  같이 여러분은 주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는  음성을 듣습니다. 아무도  여러분의 이름을 알아도  부르지 않거나 무시하고  지나갔더라도 주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알고, 불러 주의 종으로 세우시고 전달할 말씀 “주님이 다시 사셨다.”라는 “최초의 부활소식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은 여성에게 영예를  주셨습니다.

둘도  없는 영예가 고독한  믿음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 개인적으로 본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가장 중대하고  교훈적인 부활사건의  최초의 증인이며 주의  제자들에게 “이것을  전하라”고 복음의  소식을 위임받은 최초의  사자였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여성의 지위와  위치가 남서와 동등한 것을 보여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한인여성들은 가부장적  환경과 사회로 인하여  그들의 삶에서 차별을  경험했고 그로인하여  고통을 받고 쓴맛과  억울함, 분노를 느꼈으며  한국민들의 표현으로는 “한(恨)을 경험해” 왔습니다. 기도하는 여성들은 그들의 삶에서 고통과 곤경에 직면했을 때 불의와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과 위로와 강력한 개입을 원하고, 참아냈으며 고통을 치료받으면서 변화되었고, 상처는 치유를 받은 분들이십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주님을 만났는데도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울던 마리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전할 메시지를 받은  마리아들입니다. 황폐한  땅에 들어가서 여러분은  약하지만 강하신 주님을  붙들고 주님이 먹여주시는  떡을 먹으며 목회의  여정을 잘 헤쳐  나갈 것입니다.

아직도  많은 우리 여성목사님들이, 목회자들이, 선교사들이, 목회를  준비하는 신학생, 전도사들이  어디선가 힘들다고 부르짖고, 누구는 아무도 모르는 고통, 괴로움 속에서 힘들어 눈물 흘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의사결정권을 가지는 교회지도자의 위치나 당회원이 되거나, 목사나 장로, 안수집사로 피택되거나 안수를 받지 못하는 곳들이 아직 있습니다. 병원에 못갈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든 분이 있는가하면, 목사안수를 받지 못해 만년 전도자로 사역하시는 분도 있고 봉급도 많지 않아 생활이 곤란한 여성사역자들도 많은 것을 우리는 주위에서 보고, 압니다.

그래서  우리 여성목회자들은  우리 주님이 생전에  그러셨던 같이 봉사자(server), 지키는자(파숫군/keeper), 돕는자(helper), 후원자(supporter)가 돼서  주님이 그러셨던 것과  같은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미국의 수도를 보스톤으로  옮긴 것 같았던  에드워드케네디상원의원의  장례예식을 보며 왜  이렇게 애도하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한 말은 미태복음 5장의  말씀을 행동으로 행한  사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민자, 가난한자, 정신취약자, 사회의 약자들의 건강과 이익을 위하여 수많은 법을 만들었던 그는 911으로 사망한 보스톤 거주 118명의 가족에게 일일이 위로 전화를 했고, 그의 자식이 암으로 고생할 때 매일같이 자신의 장례식을 치룬 같은 성당에 들려 기도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스토리를 가졌습니까?

여러분들은  오늘까지 목회를 통하여  경험한 것들, 내가  나 되기 위한 노력과  사랑과 경험들, 하나님이  원하였던 일들을 하고  계십니다. “...가서 복음을 전하는 여성목회자들”로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돕는자, 지킴이, 후원자, 봉사자로 뒷받침이 되어 사랑을 전해주시고 있습니다.

"Tell the Story and Be a Witness of Jesus"

여러분이  주님이 주신 모든  일을 행한 후 어느  날 주님이 손수  여신 문을 들어가  주님을 대면하여 만났을  때 여러분은 그분에게  “일어나 모든 일들을  말하고, 목회자로서 경험하고  증인되었던 모든 일들,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즐거움 등 세상사는  동안 일어난 것들을  눈물과 더불어 말했을 때, 주님은 “잘하였다”말하시고 주님께서 “쉬라”고 말하시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안 보인다고  마라아 처럼 서서  울지만 말고,

빈무덤  안을 보고 좌절하지  말고,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는, 여러분을 아시는  그분, 주님의 음성을  듣고 “선생님”하고  주의 부르는 여러분이  되시고, 주님이 주시는  “가서 전하라”라는  메시지를 받고 전하는  첫 번째 여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본문: 요한복음 20:11-18

11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 니  12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15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18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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