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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1시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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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대한민국
1866년 대동강에서 순교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1839-1866) 이래 한국의 근대화는 기독교적 바탕위에 세워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민족적 자긍심의 구현임을 온 세계에 알린 삼일운동의 민족 지도자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삼일만세운동의 도전정신을 이어받은 한국교회는 패배주의와 숙명론에 함몰되어 있던 사회,문화, 역사 전반에 걸쳐 거대한 도전정신을 불러 넣었고 일제 강점기를 통해 신사참배 등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을 주도할 뿐만 아니라 민족계몽과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하였다.
 
 해방 이 후 정부수립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으면서 폐허와 절망 속에 몸부림치는 한국사회에 유일한 힘과 소망의 화두를 던짐과 동시에 권위주의적 군사독재정권에 자유와 민주화의 고귀한 가치를 사회전반에 고취시키는데 공헌하였고 기독교적 도전과 헌신은 근대화의 정신적 근간이 되었다.
 
*한국 근대화의 시작이 된 새마을 운동의 정신적 모태이자 농민운동의 시발인 가나안 농군학교는 출애굽 후 이스라엘이 꿈꾸던 나라를 모태로 하여 시작되었다.
 
1) 약속과 희망의 땅,
2) 잃은 곳을 회복함,
3) 하나님의 감독하심,
4) 젖과 끌이 흐르는 복지 정착,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우리의 농촌을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의 땅으로 만들자고 노력해온 이 운동은 창시자 김 용기 장로가 1954년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에서 농장을 일구면서 시작되었다. 1962년 제1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운 이래로 반세기가 넘도록 약 70만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근로, 희생, 봉사의 정신을 심어 주었다. 1988년 1대 교장 김 용기 장로는 타계했지만 노동의 거룩함을 강조한 그의 숭고한 기독교적 정신은 근대화를 이룩한 오늘날의 한국사회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교육 목표는 뚜렷하다. 그것은 민족의 주체성 확립과 ‘효’ 교육을 통한 바람직한 윤리규범의 생활화에 기반하고 있다. 스스로 책임지고 나가는 민주적인 지도자의 자질 배양과 더불어 올바른 국가관, 사회관 및 인생관의 확립을 지향하고 자기극복을 통한 개척정신의 생활화와 근검절약으로 건전한 경제생활을 실천함에 그 의의를 둔다.  가나안 농군학교는 2005년부터 해외교류도 활발히 하여 동남아시아를 시작으로 전 세계 11개국에 그 정신을 수출하고 교육하고 있으며 세계 빈곤퇴치에 앞장서고 있고 아프리카 등 많은 저개발국의 지도층들이 한국에 와 훈련을 받고 한국의 선진화경험을 배우고 있다.
 
*새마을 운동의 창시자 유태영 장로는 전북 임실에서 더 들어가는 산골마을 청웅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8남매나 되었으며 아버지는 남의 집 하인으로 일하였고 위의 형과 누나들은 학교의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들이다. 형제들 중에 그래도 똑똑한 유 태영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에게 태영이라도 학교에 보내라고 하였다. 그래도 집안에 한 사람이라도 까막눈을 면해야 한다고 권고했기 때문이었다. 학교에 들어 간 어린 태영은 학교에서 보낸 시간보다 지게를 지고 산에 올라가는 시간이 더 많았다. 5학년이 되던 해에 동네에 조그만 교회가 들어섰다. 초가집 교회는 가난에 찌든 소년의 유일한 기쁨의 장소가 되었다. 어린 나이었지만 그는 새벽기도회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움에 대한 열망은 그가 기르던 토끼를 내다 팔아 ‘중학교강해’라는 책을 샀다. 이 책을 독학하여 실력을 쌓은 태영은 시내에 나가 가정교사로 일하며 중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무작정 서울로 상경한 해는 1954년 이었다. 매일 굶다시피 하며 구두 닦기를 하고 밤에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며 가난을 이겨내기 위한 끝없는 몸부림이 시작된다. 어느 날 그는 미군 근처에서 구두를 닦다 동료로부터 유학이란 말을 듣게 된다.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유학이란 것을 안 그는 매일 새벽에 교회에 나가 하나님께 유학을 보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어떻게 하면 유학을 갈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유 태영은 농업으로 부를 이룬 덴마크에 가서 공부하기로 작정하고 덴마크 왕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작정한다. 무조건 편지 겉봉에 ‘프리드릭 9세 국왕, 코펜하겐, 덴마크라고 써서 편지를 띄웠다. 40일이 지나자 덴마크 외무성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모든 경비는 국왕이 대어주겠다는 것이었다. 1968년 덴마크 유학길에 오른 유 태영은 덴마크에는 구른드비 목사와 달가스 대령의 희생과 헌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배우고 다시 이스라엘로 가서 키브츠를 공부하게 되었다.  1971년 당시 건국대학교 교수시절 , 그의 농촌운동이 박 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되면서 청와대 비서로 발탁이 되었다. 3년 동안 청와대의 새마을 담당관으로 일하면서 새마을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고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한국의 독특한 지역사회발전운동, 근면, 자조, 협동을 기본정신으로 하여 이의 실천을 통해 국가발전을 꾀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1971년부터 전국적으로 확대된 이 운동은 생활태도 혁신과 환경개선, 및 소득증대를 통한 낙후된 농촌의 근대화를 취지로 일어난 국가 주도 운동이었다.
 
*‘잘 살아보세’라는 기치를 들고 전국적으로 실시된 이 운동은 당시 가나안 농군학교에 새마을 지도자를 보내어 위탁교육을 시켰고 자연히 기독교적 근로와 희생, 봉사 정신이 이 운동의 정신적 기반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9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해방된 50여 개국 중 한국은 최빈국 중에 빈국이었다. 더구나 육이오 전쟁을 치루고 남은 것이라고는 만신창이가 된 국토와 그 속에서 굶주리고 살아가는 가난한 국민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나라가 50년 만에 선진화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루었으니 세계 역사상 대한민국 같은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며 앞으로도 일어날 수없는 대 기록을 작성한 것이다. 이 근간에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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