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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1시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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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나선이론

여론이 살아 있는 사회가 민주주의가 살아있는 사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여론이라는 다수에 숨어 개인의 확실한 목소리도 없이 방관자로 남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자신의 의견을 숨기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자세도 옳은 자세는 아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개인이 있을 때 사회는 발전한다.

현대사회는 여론이 그 사회적, 정치적인 이슈를 만들어 나가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현대사회를 여론사회라고도 한다. 그런데 여론이 어떤 한 의제에 대한 다수의 공통적인 생각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쉽게 합의하면서도 , 과연 어떤 것이 진정한 여론인가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여론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그 사회 다수의 공통적인 의견을 정확하게 대변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1974년 독일의 여성 커뮤니케이션 학자 엘리자베스 노엘레-노이만이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에 관한 ‘침묵의 나선 이론’을 발표하였다.
그녀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상황과 사회적 환경에 민감하기 때문에 홀로 남겨졌을 때 고립되었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기의 생각이나 판단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래서 인간은 고립상태에서 벗어나 자신과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들로부터 위로를 받고 확신과 자신감을 갖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고립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그 사안이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것이 다수의 주장이냐 아니냐를 주의 관찰하게 된다. 만약에 자신의 의견이 지배적이거나 상승세에 있다면 자유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하지만, 열세 내지 하향세에 있다면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의 의견을 숨긴 채 침묵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에는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실제와 달리 약하게 표현하거나 아예 표현을 감추게 된다. 이것은 다시 다른 사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게 하거나 침묵하게 함으로써 소용돌이 현상을 일으키게 된다. 이 현상은 마치 나사의 소용돌이 모양과 비슷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침묵의 나선 이론’이라고 명명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6.2 지방선거의 결과에 모두가 놀랐겠지만 여당이 여론상 상승세였기에 여당지지세력은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표현했지만 하향세라고 판단한 야당지지세력은 자신들의 의견을 표출하지 않았기에 여론은 마치 여당이 대승할 것이라 예상했다. 반면 상대적으로 열세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투표로 자신들의 의사를 소용돌이치듯 표출함으로 ‘침묵의 나선 현상’이 적나라하게 나타난 결과를 만들었다.

이처럼 침묵의 나선(소용돌이)속에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매스 미디어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여론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그 사회적 책임도 막강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론이 한 후보의 당락을 좌우할지 모르지만 사회적으로 “양식있고 책임있는 시민의 판단”이 되도록 그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과 1여 년 전에 일어났던 매스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진 미국산 소고기 파동으로 시작된 촛불시위는 정치적으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초등학생부터 중. 고등학생을 여론의 희생자로 만들었다. 판단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부추켜 다수의 여론에 편승시켜 그 진위는 고사하고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책임과 그 국가적 낭비는 매스 미디어의 책임이 얼마니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현대가 아무리 여론사회로 흘러간다 해도 똑똑한 개인이 살아 있는 한 여론이 사회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 최근 몇 년 전에 개봉되었던 영화 “300”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대변해 준다.

BC 480년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끄는 페르시아 100만 군대가 그리스를 침공한다. 그리스군의 연합이 지연되자 스파르타의 왕 레오디다스(제러드 버틀러 분)는 스파르타만이라도 페르시아와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전쟁에 나서기 위해서는 의회의 군대 동원령의 승인을 받아야한다. 그가 의회를 설득하는 연설을 하지만 의회는 감히 100만 대군과 싸우는 것은 막대한 희생만 따르는 것이라고 거부하고 만다. 다수의 의견은 화해를 택하지만 살아있는 개인의 의견은 자신이 길러온 용사 300명의 사병을 이끌고 죽음의 계곡 테드로필레 협곡으로 나간다. 100만 대군과 맞서는 무모한 싸움, 그러나 스파르타의 위대한 300명의 용사는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불가능한 이 전투에 맹렬히 자신들의 최후를 건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하자 바리새인들과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밖아 죽인다. 그러나 참 진리는 예수를 죽인 다수의 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믿는 12명의 제자들과 120문도의 편이었다. 

여론이 살아 있는 사회가 민주주의가 살아있는 사회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여론이라는 다수에 숨어 개인의 확실한 목소리도 없이 방관자로 남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자신의 의견을 숨기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자세도 옳은 자세는 아니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개인이 있을 때 사회는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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