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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0시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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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마무리 그리고 극복하기

시작과 마무리 그리고 극복하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크게 기뻐하며, 성탄의 놀라운 은총이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가득하시기를 충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활기차게 시작했던 2010년이 어느새 저물고 성탄절이 지나면 2011년이라는 새해를 맞이합니다. 올해에도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수많은 일정들을 마무리하면서 한편으로는 주님께 드리는 감사가 끊이지 않고 또 한편으로는 제대로 충성하지 못하고 늘 부족함만이 앞서는 부끄러움이 앞을 가림으로 회개의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당서(唐書), 문예전(文藝傳)의 방여승람(方輿勝覽)에,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들 정도로 불가능한 일조차도 인내심을 갖고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마부작침(磨斧爲針)’라는 한자성어가 생각납니다. 시종일관 중심을 잡고 한 길을 달려 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다짐으로 들립니다. 회남자 무칭훈(淮南子ㆍ繆稱訓)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尋常之溝,無吞舟之魚(심상지구 무탄주지어)
根淺則末短 本傷則枝枯(근천측말단 본상측지)
도랑물 어디에도 배를 집어 삼킬 물고기  없고
얕은 뿌리에 열매 맺을리 없는 이치처럼, 나무 줄기 상하면 가지가 마르게 된다

일의 시작이 있으면 마무리가 있습니다. 한 해의 시작이 있으면, 한 해의 끝이 있습니다. 유대력으로 새해는 로쉬 하샤나(Rosh Hashana)인데 이는 이 때 나팔(shofar)을 부는 날로 욤 테루야(Yom Teruyah)라고 부릅니다. 이 날을 유대인은 “기념하는 날”이라는 의미를 지닌 욤 하지하론(Yom Hazicharon)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는 과거를 기억할 뿐 아니라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 일어날 일을 말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로쉬 하샤나  절기 가운데 이날을 욤 하딘(Yom Hadin) 즉 “심판의 날”로도 부르는데 이는 지난해 행했던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좌에서 내려 오셔서 우리의 행위데로 심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가오는 해가 인봉되기 전까지 우리는 속죄일까지 우리의 죄를 속죄받을 수 있다는 의미도 내포됩니다. 날이나, 주, 달과 해(Year)까지도 히브리어에는 심오한 의미를 두고 있습니다. 이 모든 시간의 의미는 메시야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정점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하는 신명기 11장 12절의 말씀에는 새해와 연말까지를 포함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단순히 새해와 한 해의 마무리만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놀랍게도 이 단어에는 시작과 끝이라는 놀라운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어 성경 신명기 11장 12절에는 분명히 "from beginning (mereishith) the year even to end (acharith) of year" 라는 구절에 한 해의 시작에는 mereishith  라는 단어와 한 해의 끝은 마지막 이라는 acharith 이 쓰여져 있습니다. 즉 시작과 끝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는 것입니다.
 
한 해의 시작이 단순한 시작을 의미하지 않고, 한 해의 끝이 단순한 마무리가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의미를 말해 줍니다. 그러기에 한 해라는 시간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시간이라는 은총을 주신 주님의 부르심에 걸맞는 충성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같은 한 해를 맞이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을 위해 일해야 하고, 중도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오직 십자가의 길 한 길을 달려 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작은 언제나 이전의 역사를 마무리 하는 선상이고 끝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Rashi 라는 학자는 한 해의 시작과 한 해의 끝에 나오는 mereishit 와 acharit 을 창세기 1장 1절과 연결해서 설명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의 첫 구절은 히브리로어 bereishith 로 시작합니다. 그는 “베레쉬트의 단어는 ‘첫번째’ 또는 ‘머리’라는 의미인 ‘레쉬트 (reishith, beginning of; head of)’라는 단어에 히브리어 beth 가 첨가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단어가 “태초에(in beginning of)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에 등장합니다. 라쉬(Rashi) 는 말하기를 “성경은 창조의 일련과정을 가르치고자 함이 아니라 어떤 것이 먼저 왔음을 말하고”자 함이라고 지적합니다. “먼저(여기에서 히브리어, bari'shonah 를 말함)’ 그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음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Scripture did not come to teach the sequence of the Creation, to say that these came first, for if it came to teach this, it should have written: 'At first (bari'shonah) He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for there is no reishith in Scripture that is not connected to the following word, [i.e., in the construct state]).

여기에 쓰이는 시작의 의미는 렘 26:1, 27:1, 28:1, 42:34, 창 10:10, 신 18:4, 11:12, 시 111:10, 잠 1:7, 미1:13 2절에 나오는 bereishith 와 reishith 인데 이는 마지막을 말하는 archarit 과는 반대의 의미를 지닙니다. 

놀랍게도 성경에는 시작이라는 단어 보다는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시작”이라는 단어가 동시에 나옵니다. 이미 언급한 신명기 11장 12절에 언급된 연초와 연말에 언급된 단어입니다. 일의 시작과 일의 마지막을 동시에 의미하는 mereishith 와 acharit 이라는 단어를 통해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이러한 성경적 용법은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그 뜻이 매우 심오합니다. 이사야 46장 10절에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I make known the end of ['acharith] [time] from the beginning of [mereishith] [time])라고 말하며 ‘시작’과 ‘마무리’를 지칭합니다.

전도서 7장 8절에도 말하기를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The end of ['acharith] a matter is better than the beginning of it [mereishito])”라고 말합니다. 한 해의 시작이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우리에게 하늘과 땅을 지으시기 시작하신 하나님의 timing 을 기억하게 하며, 한 해를 마무리를 할 때, 개인에게는 우리 인생의 마무리를, 인류에게는 구원 역사의 마무리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잠언 8장 22-23절에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라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22절의 ‘태초’는 여성 명사인 reishit 로 되어 있고,  ‘만세전부터’는 남성 명사의 접두어 merosh 를 붙여 남성형으로 쓰고 있고,  ‘상고부터’는 qedem 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모두 ‘시작’이라는 단어에 절묘한 변화를 주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이 단어가 주는 의미와 그리고 메시야의 도래를 연결해서 설명하려면 얼마나 많은 지면이 필요하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에는 심장의 박동을 격동시킬만한 열정과 도전 정신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모든 일의 시작에는 에베레스토 고봉도 낮은 언덕 뛰어 넘을 듯 하는 자신감이 넘쳐나지만 시종일관 그 열정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선교지에 달려 가는 초임 선교사들에게는 온 국가를 뒤집을 만한 선교 역사를 이룰 것 같은 열정이 초기에는 차고 넘칩니다. 하지만 수십년 사역을 하고 계시는 선임 선교사님들은 어떤 일을 시도하기 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주의사항에 대해 더 많은 고언을 아끼지 않습니다.

새해에 목회 일정을 세워 시작할 때에는 세계 온 지역이 자신의 목회지 교구가 될 것 같은 기대감이 풍부합니다. 그러나 한 해를 마무리하거나 목회를 마무리 할 시기에는 제대로 하지 못한 사역에 대한 회한이 넘쳐 흐릅니다.
 
이를 두고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즉 줄여서 발산개세(拔山蓋世)라는 단어가 적절히 대변해 줍니다. 그 힘이 산을 뽑아서 던질 정도이며 그 기개는 세상을 다 덮을 만큼 웅대하다고 말하지만 그 단어의 의미는 사실은 그렇지 못함을 역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산을 뽑을 만한 열정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식어지고 점점 많은 장애물과 난관과 훼방거리를 만납니다. 적은 앞에서 가로 막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적은 내부로부터 침투해 들어 옵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화려한 결과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실의 열매는 고통과 눈물 그리고 역경 가운데 조개가 고통을 이겨내는 진통 가운데 배태시킨 진주처럼 맺게 됩니다.

빌립보서 3:12-14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주신 말씀처럼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장애물과 복병을 만날 때에 이것을 피해 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들을 극복해 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 번은 보스톤으로 돌아 가려는데 수십년에 만에 내린 폭설로 보스톤으로 가는 모든 항공기가 취소되어 다음날 돌아 가야 했습니다. 보스톤 시내에는 외길처럼 쌓아 올린 눈들이 성곽처럼 둘러저 있었고, 택시를 타고 지나가는 길은 흡사 눈길 터널 뚫린 도시 같았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예기치 않은 장애물과 공격 그리고 긴장과 스트레스를 주는 복병들을 피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런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당면한 많은 문제들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해 가느냐 하는 점입니다.

많은 여행을 하다보면 비행기가 연착되어 다음날 설교를 해야 하는데 비행기를 놓치게 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10여 시간이면 갈 항로를 30시간에 걸쳐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일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시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의 티켓이 사라져서 런던에서 미아(?)처럼 기다리면 참으로 길고도 긴 수난 극복의 시간을 보낸 적도 있습니다. 여행 중에 볼모로 잡히다시피 해서 앞길을 조금도 가늠해 볼 수 없는 위기도 있었습니다. 편안하고 안전한 여행을 예상하고 다 준비한 줄 알았는데 언제나 문제는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서 생깁니다.
그러기에 긴 여행을 하노라면 아주 긴장되고 호텔 방에서 다음 일정을 위해 기도하다가 밤을 꼬박 새기 일쑤였습니다. 한 번은 항공기 기장석에 컴퓨터가 작동하지 않아 기내에서 꼼짝없이 여러 시간을 기다리라는 안내 방송만 듣게 된 적이 있습니다. 기내에서는 전화도 못하고,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결국에 다 내려서 다음 비행기를 기약없이 또 다시 기다린 적도 있습니다. 항공사에 항변할 수 없지만 내린 대부분의 승객(미국인)들도 불평도 하지 못하고 먼 나라로 가는 비행기를 놓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때론 너무 눈이 내려 항공기가 아예 뜨지도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한 번은 긴 여행을 마치고 뉴욕 JFK 공항을 경유하여 마지막 보스톤으로 돌아 가는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예상치 않은 폭설이 내려 항공기가 아예 뜨지 못하는 것입니다. JFK 공항은 우선적으로 국제선 항공기의 눈을 치웠고 대부분의 국내선 비행기는 취소를 시켰습니다. 제가 탄 비행기는 마지막까지 기다리다가 결국은 눈을 치우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역을 하다보면 도저히 풀 수 없을 것 같은 난제들을 만납니다. 반근착절(盤根錯節)이라는 말처럼 모든 일들이 다 얽힌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뿌리 반 섞인 마디 절반 너무 얽히고 얽혀 있어서 해결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입니다.

반근착절이라는 말은 후한 안제 때 우허가 한 말에서 유래합니다. 당시 대장군이던 등줄은 낭중벼슬 우허를 시기해서 그에게 비적토벌을 명령하게 됩니다. 비적토벌도 어렵고 또한 명령에 불복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우허는 말합니다.
 
‘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盤根錯節)’를 부딪쳐 보지 않고서야 어찌 칼날의 예리함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호탕하게 말하고 적전에 당도한 우허는 뛰어난 전략으로 비적을 토벌했다고 합니다.
 
문제가 일어날 것을 미리 예측하고 각본대로 일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한 치 앞을 못보는 상황이라 해도 그 때 그 때 실마리를 풀어 나가는 용단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여기에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은 난관을 만난다 해도 중도하차 하지 않고 앞으로 향하여 달려 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푯대를 향하여 달음박질 하는 사도 바울이 끝까지 달려 갈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가야할 지점이 분명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있는 곳에서 머무르지 않고 달려 갈 지점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JFK 공항에서 계속 쌓이기만 하는 눈을 치우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상념에 잠긴 적이 있습니다. 어떤 역경이 와도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에 활력을 주는 진정한 도전 정신입니다. 항공기에 눈이 쌓이면 추력도 얻을 수 없고 특히 양력을 얻어 활강을 해야하는 비행기는 치명적이기에 결빙 시키는 모든 작업을 막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항공기에  제빙(De-icing)액이나 또는 방빙(Anti-Icing)액을 마치 소방차 분무기로 분사하듯 뿌려댑니다. 자동차 세차장에 세척제 뿌리듯 뿌려되면 기내의 느낌은 항공기 세차장에 들어 간 느낍니다. 

 

출처: http://www.travelpod.com/travel-photo/alifebeinglived/3/1247948427/de-icing-the-other-plane.jpg/tpod.html

이렇게 눈을 치워야 하는 작업은 많은 노력을 요청합니다. 날개 끝, 항공기 위 심지어는 항공기 꼬리까지 모든 눈을 제거해야 만 비행기가 뜰 수 있습니다. 목표를 향해 쉽게 날아 갈 것 같은 항공기에 조금의 눈만 쌓여도 날 수 없는 치명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항공기라는 거대한 고체 덩어리는 바람(즉 공기)이라는 유체 속에서 기계적인 힘을 발생시켜 움직이게 되는데 이를 두고 양력(揚力, lift)이라고 부릅니다. 양력은 항공기라는 기계적 물체를 통해 나아가는 외부 유동(즉 바람의 움직임)의 방향을 이용하여 수직으로 움직이도록 하는 유체 역학적 힘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바람이 흘러 가는 방향을 다르게 하여 그 물체가 뜨도록 하는 것입니다. 고래 모양의 곡선은 위와 아래의 흐름의 차이로 떠오르게 됩니다. 항공기 날개가 위의 곡선 모양과 아래의 평면으로 되어 있음은 위의 공기의 흐름과 아래의 공기 흐름을 다르게 하여 그 항공기가 뜨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래 모양의 항공 원리를 에어포일(airfoil) 원리라고 합니다. 위와 아래로 흐르는 공기의 흐름을 다르게 하여 다양한 형태의 항공 물체에 양력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언급한 바와 같이 항공기의 양력의 핵심은 날개에 있습니다. 납작한 형태로 되어 있는 항공기의 날개는 항공기의 뜸을 일으키는 매우 세밀한 기계적 작동을 일으키는 즉 양력을 일으키는 기능들을 갖고 있습니다.

눈에 보기에는 비교적 납작한 형태를 갖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는 것 같은 모든 기능들이 날개에 있습니다. 이는 항공기의 뜸(양력, lift)과 내림(중력, weight)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추력(drag)과 비행기가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방해(저항)하는 항력(thrust)에 있어서 항공기에 눈이 쌓이면 그 세밀한 기능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바람의 방향에도 영향을 주어 양력 발생에 엄청난 지장을 초래합니다. 항공기가 결항되거나 또는 지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항공기 비행원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양력이 실행하기까지는 베르누이의 원리(Bernoulli’s Principle)가 있습니다. 1738년 스위스의 과학자인 다니엘 베르누이가 발견한 것으로 단면적이 다른 관(管)내의 유체의 흐름은 항상 전압(total pressure) 즉, 정압(static pressure)과 동압(dynamic pressure)을 모두 합쳐서 고르게 일정하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에서 베르누이는 단면적이 다른 관 (벤츄리관 등)을 흐르는 공기가 "속도가 증가하면 압력이 감소하고, 속도가 감소하면 압력이 증가한다."라는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원리를 통해 에어포일의 윗 부분과 아래의 압력차를 통해 압력이 큰 쪽에서 작은쪽으로  발생하게 함으로 뜨게 하는 그 원리가 바로 양력(lift)입니다다.
 
양력의 원리 뿐 아니라 항공기를 운항하게 하는 것에는 추력(T: thrust), 항력(D: drag) 그리고 중력(W: weight)이 있습니다.  수평 등속비행 중 항공기는 양력과 중력의 크기가 같고, 추력과 항력의 크기가 같습니다.  수평 등속비행 상태에서 엔진 출력이 증가하면 추력이 항력 보다 커져서 항공기는 가속비행을 하게 됩니다.
 


자료: http://scdolinski.weebly.com/

양력과 추력을 얻는데 있어서 눈이 오면 좋을 것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바람(Wind)은 항공기가 뜨고 내릴 때 맞바람(정풍), 그리고 비행할 때는 뒷바람(배풍)으로 항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눈은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공기 표면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은 양력이 급격히 줄게 되어 비행기가 뜨지 못하기 때문임은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이유가 있는데 이는 항공기에 쌓인 눈이 날개와 각 이음새 부분을 얼어 붙게 하여 추력과 양력에 영향을 주어 항공기 운항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항공기 운항에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눈 때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공항이 알래스카에 있는 앵커리지 공항입니다.

앵커리지 공항은 눈 치우는 방법들을 오랫동안 연구해서 제빙(de-icing), 방빙(anti-icing) 작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특수 용액을 사용하거나 또는 합리적 기계 장비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특수 용액들이 환경 오염의 주범이라는 지적때문에 요즘 개발된 것 중 하는 뜨거운 열선을 이용하여 눈을 녹이는 방법도 있습니다.

마치 싸우나에 들어가서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방법과 같습니다. 하지만 장소와 구조물 그리고 비싼 비용으로 아주 극소수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날아갈 지점이 있는 항공기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자연 기후나 경미한 기계 작동의 실수라 할 때 항공기 좌석에 앉아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창문 너머로 지켜 보면서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 주저않고 말아야만 하는 것인가 라는 상념에 잠기는 것은 당연지사인지 모릅니다. 

항공기나 계절, 그리고 자연재해나 교통 사정 등은 삶의 경주를 해 나가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외부적 장애물입니다. 외부적 장애물은 비교적 쉽게 극복하며 달려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부적 장애물은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것중 하나는 역시 긴장입니다.

집회를 인도하기 전에는 아무리 맛이 있는 음식도 쓰게만 느껴지고, 아무리 좋은 경치를 보고자 해도 도저히 발걸음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잠을 자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 바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됩니다. 한 영혼 한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이 집회로 인해 주의 종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는 책망을 듣지 않기 위해 늘 경외함으로 주 앞에 조아리게 됩니다.

최근에 어찌된 일이 자주 화장실을 갑니다. 너무 긴장되기에 교감신경계가 민감해지면서 생긴 현상입니다. 긴장과 책임감에 대한 부담으로 신경이 곤두서면 몸 안에 있는 많은 신체 에너지가 동원되고, 침과 소화액의 분비가 억제되어 위장의 운동이 줄어들게 됩니다.

집회 중에는 통 밥맛이 없다가고 집회만 끝나면 입맛이 살아나 마음껏 먹을 수 있습니다. 때론 집회가 다 끝나다는 행복감에 이른 새벽에 식당을 찾기도 합니다. 때론 집회와 집회 그리고 또 집회가 연속될 때면 자주 뒷골이 아프고 온 몸이 화석처럼 굳어집니다.

이때 대뇌와 대뇌 주변의 혈관이 지나치게 수축됨으로 느끼는 편두통을 경험합니다. 불규칙적인 혈관의 과도한 수축과 팽창은 신경조직을 자극하여 독소 물질을 분비시키는 통증을 유발시킵니다. 이때 근육통, 다리 저림, 쥐나는 현상들을 경험합니다. 집회 마치고 잠자는 시간에 다리에 쥐가 나도 한참을 주물러도 펴지지 않는 일들을 경험합니다.

의학적으로 이러한 스트레스는 우리 몸에 에피네프린과 코티졸이라는 호르몬 분비를 촉진시킨다고 말합니다. 이 호르몬이 근육에 사용할 지방과 콜레스트롤을 동원하여 이것들이 혈관속을 다니기 시작합니다. 에너지의 근원으로 사용되야 할 지방과 콜레스트롤 중 일부가 혈관벽이 달라붙어 프라그를 만들어 냅니다. 프라그가 혈관벽에 달라 붙으면 혈관은 신축성을 잃고 딱딱하게 굳어지게 되고 더러는 동맥경화증을 유발시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 몸에서는 에피네프린 과 코티졸 이라는 호르몬이 근육에 사용할 지방과 콜레스테롤을 동원하여 이것을 혈관 속으로 순환시킵니다. 지방이나 콜레스트롤 중 일부가 근육활동의 에너지원으로 사용되지 않고 혈관벽에 침착하여 프라그를 만듭니다.

그러한 프라그들이 혈관벽에 달라붙게 되면 혈관은 신축성을 잃고 딱딱하게 굳어져서 동맥경화증을 일으킵니다. 동맥경화증이 생기면 동맥이 탄력성을 잃기 때문에 혈압이 상승하며, 혈압상승은 고혈압뿐만 아니라 다른 심장질환을 유발시키기도 합니다. 마음껏 달려 가고 싶은데 복병처럼 찾아오는 여러가지 장애물을 만날 때 그 지점까지 달려 가기에 벅찬 일들을 만납니다.

옛 선인들은 외부적 장애물과 내부적 복병을 만나더라도 이것을 극복하는 힘은 사람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있다고 갈파했습니다. 조선시대에 서당에서 천자문(千字文)을 마치면 공부하는 계몽편(啓蒙篇) 끝부분에 구용(九容) 즉, 아홉 가지  몸 가짐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1. 족용중(足容重): 발걸음을 무겁게 하라. 이 말은 사람의 처신을 가볍게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2. 수용공(手容恭): 손을 사용함에 공손히 하라. 사람의 손을 단정히 하면 마음가짐도 단정하게 됩니다.
3. 목용단(目容端): 눈 가짐을 단정히 하라. 눈은 마음의 창이며,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는냐에 따라 그의 생각이 결정됩니다.
4.  구용지(口容止): 입(말)을 절제할 줄 알라. 야고보 사도도 혀를 재갈 물리듯 사람 언어 사용에 대하여 주의할 것을 말합니다.
5. 성용정(聲容靜): 말을 함에 늘 고요함으로 하라. 큰 목소리로, 다툼을 내는 말보다는 유순한 말로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6. 기용숙(氣容肅): 기운을 엄숙히 하라. 자신의 의지를 넘치지도 않게 그러나 너무 억누르지도 않고 중용과 절제 가운데 균형을 잡을 수 있음이 필요합니다.
7. 두용직(頭容直): 머리를 바로 세워라. 목표를 잃어 버리면 우리는 뒤를 돌아 보거나 또는 땅을 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장애물이 있다해도 달려 갈 길이 있음에 앞을 향해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8. 입용덕(立容德): 그대가 있는 그 자리에서 서 있는 모습에 덕이 있게 하라. 지장(智將)도 중요하고 용장(勇將)도 중요하나 우리 시대에는 덕장(德將)이 필요합니다. 가야 할 자리와 가지 않아야 할 자리를 아는 덕이 있는 몸가짐이 중요합니다.
9. 색용장(色容莊): 환한 얼굴빚을 갖게 하라. 사람의 진면목은 위기를 만날 때 볼 수 있습니다. 위기 가운데 그의 진실함과 장애물을 극복하는 진정한 지도력을 볼 수 있습니다.

발걸음, 손가짐, 눈가짐, 입가짐, 말씨, 호연지기, 머리가짐, 덕스러움, 그리고 환한 얼굴가짐의 아홉가지 자세를 위기 가운데서도 바르게 함이 매우 중요합니다.

솔로몬은 일의 시작과 마무리를 말하며 극복할 것도 말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13-14)

한 해가 오고 이제 있는 한 해를 마무리 하는 가운데 난관과 장애물을 극복하는 길에 역시 솔로몬의 지혜가 요구됩니다.
 
잠언서 6장 16절부터 19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위의 말씀을 계몽편으로 구용의 발, 손, 입, 말, 얼굴처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1. 교만한 눈을 갖지 말라
2. 거짓된 혀를 갖지 말라
3.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을 갖지 말라
4.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
5. 악으로 달려가는 발을 갖지 말라
6. 거짓을 말하는 증인을 두지 말라
7. 형제 사이를 이간하지 말라

한 해를 마무리할 때 우리의 눈과 혀와 손 그리고 마음과 발과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은 일들을 회개함으로 청산하고 새 해를 통해서 바른 몸가짐 그리고 마음 가짐으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은총이 성탄의 기쁨 속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Merry Christmas to you all.
작고 작은 자 김종필 올림
Rev. Elijah JF Kim,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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