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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0시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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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하나님의 말씀
깊어가는 가을 밤에 사색의 시간도 깊어짐을 봅니다. 적시듯, 변화하듯, 타오르듯, 흐느적 거리 듯, 스러지듯, 움직이듯, 스며들듯, 떨어지는 낙엽 속에 자신의 몸도 함께 지는 가을 나무들을 보며 매해마다 맞는 가을이지만 여전히 올해의 가을 상념 그 음미하는 맛이 다릅니다.
같은 사물을 보아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생각의 폭도, 넓이도, 그리고 깊이도 달라지겠지요?
가을 나무를 보며, 봄빛의 만산홍엽과는 다른 타오르며 꺼져가듯 그리고 물들이며 석양빛에 스러지는 가을 숲은 고독과 고향, 민족과 열방, 구원과 선교,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넘치는 가을 뜨락에는 낙엽 지는 모습만 보고도 그 정취에 취해 그림과 음악 그리고 아름다운 시가 얼마나 양산되었던지요!
가을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취하면 인간에게 주신 미학적 관점도 증가하게 됩니다. 옛 선진들의 고풍스런 미학은 밀도 깊어 그 깊은 속내를 들여다 보기까지 읊조리고 생각해 보아야 하지만 현대의 젊은이의 솔직 담백함은 직선적이고 적극적이어서 또 빠르게 읽고 알 수 있는 색다른 묘미를 줍니다.
현대 젊은 세대의 의견을 반영한 “가을 나무 그리고 겨울 나무”라는 시는 이 시대의 감각으로 가을을 읽어 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가을나무 와 겨울나무”
(편의상 작자 미상, 블로그에 있어서 이름을 알 수 없기에)
풍성한 머리를 풀어 헤친 가을나무는 ~
황금빛 염색 약의 신비한 마술~
멋 내기 용 금발 잎 파리는 벌써 우수수 날리네요 ~
새들은 낙엽 숲 속으로
자맥질하여 헤엄치고~

온몸에 낙엽 냄새를 피우며
파란 하늘물속에 솟구쳐 올라 ~
하늘에 올린 편지 한 통 입에 물고 ~
누구의 서러운 사연인가~

비바람 속에서 밤새 떨고 있는 ~
가을나무 너는 ~
산새 떠난 빈 둥지에~
잡다한 상념들을 잘라내며
다가올 겨울을 준비 하네 ~
 
이하 생략(더 읽고 싶지 않으신지요?)
위의 시는 옛 시인들의 상념과 인생관과는 다른 비교적 현대적 감각을 지닌 젊은 층의 생각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가을의 단면을 잘 표출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에게 가을은 긴 겨울을 준비하는 기간이며 여름과 추수를 마무리는 하는 상념의 계절입니다. 고난의 축적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생각이 잉태하고 그 잉태한 씨앗은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되고 그 모든 열매를 다 주고 나면 또 다시 기나 긴 침묵의 겨울을 보내며 준비하는 것과 같은 것이 자연의 이치임을 봅니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 생각의 이치도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법칙이 곧 인생에게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휴식-씨 뿌림- 성장- 추수- 휴식이라는 삶과 죽음의 긴 패턴 사이에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 휴식이라고 봅니다. 하루에도 그러하고, 일주일도 그러하고, 한 달이 그러하고, 일년이 그러하고, 안식년이 그러하고 또한 희년이 그러합니다.
삶과 사역 그리고 휴식과 재도약은 인생을 활기 있게 만드는 창조의 순환주기인 셈이지요. 사역이 시작되는 첫해에는 정열적으로 일 하다가 4년 5년 6년을 보내면 숙성하게 되고 7년 째 휴식의 시간을 갖고 다시 삶과 사역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더 크고 깊은 성숙의 시간을 갖게 되는 안식년은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입니다.
저도 목회 사역을 시작한지 24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2개월 지나면 목회 25주년이 됩니다.
전도사로, 교구담당 목회자로, 부목사로, 주일학교로부터 학생회, 청년부, 성가대, 그리고 교구 심방과 부목사 그리고 교회 개척으로부터 담임 목회까지 한국에서 6년의 꽉 찬 사역을 마치고 7년이 되던 해에 미국으로 오기 위해 한 일년을 기다리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필리핀 선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필리핀에서도 6년을 꽉 차게 사역하고 7년이 되던 해에 본격적인 성전 건축에 들어 갔습니다. 성전 건축으로부터 영국 박사 과정까지 6년이 꽉 차고 7년째 되던 해에 미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2004년 2월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온지 내년 2월 7년째를 맞이합니다.
6년 지나고 7년째마다 계속 안식년을 갖게 되었다면 모두 28년이 되는 해가 되겠지만 실제로 안식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식년을 해야 할 해에 또 다른 사역을 하게 되어 실제 저의 사역 기간은 24년이 됩니다. 즉 6년 사역의 4번 Term이 지나가게 된 셈입니다.
저는 한국과 필리핀 사역 이후 영국과 미국이라는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 조건에 있었기에 시간의 안식년이 아닌 공간의 안식년을 누린 셈입니다.
하지만 제 아내는 선교지에 남아서 줄곧 사역에 정진하였기에 공간의 안식년은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로 온 몸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아프고, 수술을 여러 번 하고, 아직도 온 몸이 건강치 못한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즘 주변에서 자꾸 안식년을 가지라는 말씀들을 많이 주십니다. 저의 입장은 괜찮지만 휴가 한번 제대로 갖지 못한 제 아내가 홀로라도 안식월이라도 갖게 되면 좋겠습니다.
이하 생략(더 읽고 싶지 않으신지요?)
위의 시는 옛 시인들의 상념과 인생관과는 다른 비교적 현대적 감각을 지닌 젊은 층의 생각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가을의 단면을 잘 표출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에게 가을은 긴 겨울을 준비하는 기간이며 여름과 추수를 마무리는 하는 상념의 계절입니다. 고난의 축적된 시간이 지나면 사람의 생각이 잉태하고 그 잉태한 씨앗은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되고 그 모든 열매를 다 주고 나면 또 다시 기나 긴 침묵의 겨울을 보내며 준비하는 것과 같은 것이 자연의 이치임을 봅니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 생각의 이치도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법칙이 곧 인생에게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휴식-씨 뿌림- 성장- 추수- 휴식이라는 삶과 죽음의 긴 패턴 사이에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 휴식이라고 봅니다. 하루에도 그러하고, 일주일도 그러하고, 한 달이 그러하고, 일년이 그러하고, 안식년이 그러하고 또한 희년이 그러합니다.
삶과 사역 그리고 휴식과 재도약은 인생을 활기 있게 만드는 창조의 순환주기인 셈이지요. 사역이 시작되는 첫해에는 정열적으로 일 하다가 4년 5년 6년을 보내면 숙성하게 되고 7년 째 휴식의 시간을 갖고 다시 삶과 사역을 정리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더 크고 깊은 성숙의 시간을 갖게 되는 안식년은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입니다.
저도 목회 사역을 시작한지 24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2개월 지나면 목회 25주년이 됩니다.
전도사로, 교구담당 목회자로, 부목사로, 주일학교로부터 학생회, 청년부, 성가대, 그리고 교구 심방과 부목사 그리고 교회 개척으로부터 담임 목회까지 한국에서 6년의 꽉 찬 사역을 마치고 7년이 되던 해에 미국으로 오기 위해 한 일년을 기다리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필리핀 선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필리핀에서도 6년을 꽉 차게 사역하고 7년이 되던 해에 본격적인 성전 건축에 들어 갔습니다. 성전 건축으로부터 영국 박사 과정까지 6년이 꽉 차고 7년째 되던 해에 미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2004년 2월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온지 내년 2월 7년째를 맞이합니다.
6년 지나고 7년째마다 계속 안식년을 갖게 되었다면 모두 28년이 되는 해가 되겠지만 실제로 안식년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안식년을 해야 할 해에 또 다른 사역을 하게 되어 실제 저의 사역 기간은 24년이 됩니다. 즉 6년 사역의 4번 Term이 지나가게 된 셈입니다.
저는 한국과 필리핀 사역 이후 영국과 미국이라는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누리는 조건에 있었기에 시간의 안식년이 아닌 공간의 안식년을 누린 셈입니다.
하지만 제 아내는 선교지에 남아서 줄곧 사역에 정진하였기에 공간의 안식년은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로 온 몸은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아프고, 수술을 여러 번 하고, 아직도 온 몸이 건강치 못한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요즘 주변에서 자꾸 안식년을 가지라는 말씀들을 많이 주십니다. 저의 입장은 괜찮지만 휴가 한번 제대로 갖지 못한 제 아내가 홀로라도 안식월이라도 갖게 되면 좋겠습니다.
읽기증에 빠질 법 했던 제가 숙독, 정독, 다독, 선독, 묵독, 속독, 재독 등을 스스로 깨닫게 되었고 전체를 읽고 그리고 부분을 빠트리지 않음과, 부분을 보되 전체의 문맥에서 파악하는 법을 많은 시행착오 가운데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다음부터는 하나님께 “지혜를 주셔서 책을 잘 이해하고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고 책을 읽을 때에도 기도 드리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물론 이 점은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부분과 전체, 거시적 안목과 미시적 섬세함, 독수리의 눈과 개미의 부지런함을 조화롭게 하여 읽는 습관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책 가운데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너무나 중요한 글들은 제 뼛속에 새겨 넣듯 전 그렇게 음미하고, 되새기고, 그리고 감동으로 기억하며 읽습니다.
이는 마치 짧은 옛 글을 반복해서 읽고 생각했던 김득신이 반복과 사색이라는 균형의 독서를 깨달은 것과 같고 단순히 독서가 독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얻어진 지혜를 통해 마음과 생각을 다스렸던 이덕무처럼 이는 의미 있는 독서가 주는 삶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천 권의 책을 저술했다고 하는 솔로몬이 지혜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는 솔로몬이 쓴 잠언, 전도서, 아가서 만을 읽고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솔로몬과 같은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기를 수없이 했습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소화하지 못하면 그것은 문자에 불과하고 소화했다 해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남의 머리 속에 있는 것이요, 그것을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지혜”가 없다면 한갓 지식에 그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고백처럼 “많은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느니라”(잠 12;12)는 말씀처럼 그가 깨달은 것 즉 “하나님을 경외함이” 인생의 근본임을 세상의 모든 지식은 말해주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특히 칼빈이 애기한 사람을 아는 지식이 종국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러 전적으로 타락한 자임을 고백함으로 그리스도 예수만을 아는 지식의 충만한 데까지 이를 것을 권면한 것은 바울의 고백과도 상통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대학 졸업 논문을 이러한 모든 학문을 집대성해서 인류의 두 가지 보고, “사람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하는 “학문 통합의 이론과 실제”라는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미 세월이 많이 지난 그 논문을 다시 읽게 된다면 참으로 어설프고 부끄러운 부분들이 많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성경 주석가인 바클레이, 나폴레옹, J F 케네디, 몽테뉴, 링컨 등도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독서가였음을 책을 읽다가 알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법, 몽테뉴의 독서법, 존 스튜어드 밀식 독서법등도 모두 다 사색과 균형을 잘 잡은 독서법으로 자리잡은 것이지요.

영국의 대표적인 침례교 설교자였던 스펄전 목사님은 그의 서재에 가득히 모으기까지 수많은 책들을 섭렵한 분입니다. 지금도 그 정도의 책을 모으기 어려운 시절, 조지 뮬러와 디엘 무디와 동시대인 그가 130-110년 전에 서재에 가득한 책을 모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의 학문적 경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신학교의 문턱에도 가지 못한 스펄전이 목회자 대학(Pastors College)를 설립하여 후학을 양성하셨는데 그의 배경에는 놀라운 독서가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스펄전의 집을 방문하고 그 모든 책들을 보고 할말을 잃은 의사, 변호사, 그리고 전문가들이 스펄전을 테스트한 것은 매우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들이 무작위로 뽑은 그 많은 책을 뽑아 질문하여도 막힘이 없이 책의 정확한 내용을 기억할 뿐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한 본인 나름대로의 분석과 평가를 함께 말하는 그의 놀라운 지식과 지혜에 모두 다 경이에 찬 모습으로 대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어떤 전술가와 전략가와 역사가 그리고 문학가도 따를 수 없는 전문 영역에 해박했던 나폴레옹의 이야기는 끝이 없겠지요. 저는 정복자 나폴레옹은 존경하지 않았지만 그의 독서법에는 경이로운 눈으로 보고 닥치는데로 나폴레옹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수만권의 책을 섭렵하고 말씀에 정통했던 바클레이는 말씀 풀이 강해에서 탄탄한 독서가 말씀의 핵심을 파헤치는 지혜의 배경으로 작용했음은 지당하다 하겠습니다.
링컨과 에디슨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문 책벌레들의 이야기는 어린 저에게 꿈을 확인해 주었던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는 5감조차 구성되지 않은 헬렌켈러가 점자판으로 책을 읽고 그녀의 꿈을 키운 이야기는 저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 가기도 전에 막내였던 저를 유달리 귀여워해 주셨던 아버님은 한자를 친히 가르쳐주시고 또한 동양고전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를 고시, 한시, 그리고 고전에서 자유롭게 인용하시면서 풀어 주었습니다. 어린 저는 이해할 수도 없는 한시들을 접하면서 “아버지는 참 박식하시구나”라는 정도로 탄복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아버님께서 주님 나라로 가시고 저의 나이 이제 중년이 되어(연세가 60,70이 넘으신 분들에게 죄송합니다) 이제는 앞으로 15-20년 정도의 사역으로 마무리해야 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유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지나 이제 중년으로 들어 왔는데 책을 대하면 소년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소년의 때에 받은 독서의 감동이 참으로 크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해한 줄 알고 읽었던 그 많은 책들 (“읽었던 책들을 다 합치면 20-30만권이상 읽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이 사실은 소화도 하지 못한 채 꾸역 꾸역 두뇌의 깊은 창고에 집어 넣기만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불과 2주, 3주 정도의 시간을 가질 수 없지만 공항에 내리면서 상공에서 읽고 지나갔던 어릴 적 동양고전과 여러 서적들의 진 국물을 마시는 마음으로 되새기는 생각의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긴 여행에서 돌아 와 첫날 밤 잠을 자려고 하면 우선 시차로 인해서, 그리고 너무 피곤하여 깊은 잠을 잘 수 없게 됩니다. 긴장이 풀려서이기도 하고, 지친 육신이 깊은 잠에 빠질 수 없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큰 요인은 생각이 많기 때문입니다. 비행기 속에서, 공항에서 그리고 집으로 오는 과정에서 생각의 고리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을 생각해 보니 제가 예수를 믿기 전 읽었던 우암품에 이런 대목이 기억납니다.
 
不寐夜長 (불매야장) 길어라 잠 못이루는 자의 밤은
疲倦道長(피권도장) 멀어라 게을러 피곤한 이의 길은
愚生死長(우생사장) 생사의 길은 끝이 없어라
莫知正法(막지정법) 바른 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이에게
 
보스톤에 도착해서는 의도적으로 시차 적응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몸이 움직이는 데로 휴식을 취하려고 합니다. 이때 긴 밤을 홀로 지새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이때 밤은 길고 낮은 금방 지나갑니다.
신기하지요? 일상적인 삶을 사는 분들에게 깊은 잠을 잘 수 없는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낮에 일하지 않고 게을러서 피곤하지 않은 자는 깊은 잠을 잘 수 없겠지요. 이는 전도서 5장 12절에 깊은 단잠을 잘 수 있는 비결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는 이치와 같음을 봅니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저의 삶 가운데 구원의 확신으로 들어 온 이후 전 영생을 주시는 이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진리가 없음을 보았고 진리는 오직 예수 안에만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자연인이 느끼는 삶의 단상은 신앙의 유무를 떠나 인간이 공통적이라고 봅니다. 인간이 느끼는 자연과 인간과 학문에 대한 생각은 인류 가운데 보편적으로 산재해 있기 때문이지요. 똑같이 사색하고, 행동하고, 살아 가나, 예수 안에는 생명이 있고, 예수 밖에는 생명이 없음은 분명합니다.
이전의 선조들이 살아 왔던 처세술과 사색의 잔상들을 읽으면 그들은 예수를 모르기에 썼던 글이라도 저 나름대로 그러한 교훈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읽기”하는 법을 시도합니다. 책을 읽는 것도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살아 가는 삶도 복음의 증거자로, 생각하는 것도 복음의 효과적 사역을 위해 사색합니다.
지난번 “추야우중(秋夜雨中)”을 썼던 최치원(孤雲崔致遠, 857~?)의 이야기를 잠시 나누었습니다. 신라의 뛰어난 문인이었던 최치원도 어릴 적 저에게 독서와 사색이라는 균형감각을 주었던 인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가 쓴 “가야산 독서당”이라는 7언률 사행시는 사색이 독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상기시켜 줍니다.

伽倻山 讀書堂(가야산 독서당)

狂奔疊石吼重巒(광분첩석후중만) 빼꼭한 산중 협곡 바위 미친듯이 울리는 소리
人語難分咫尺間(인어난분지척간) 코 앞에 사람 말소리도 알아 듣기 어려워라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옳고 그름 따지는 싸움 소리 내 귀에 들리기 두려워
故敎流水盡籠山(고교유수진롱산) 온 산을 돌고 다 돌아 일부러 흘러 온 것이더냐

제가 번역해 보고도 한시로 읽는 그 맛을 제대로 내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제 입장에서 해석해 본다면 그 깊고 깊은 가야산 계곡을 다 돌고 돌아 흘러 내려온 강물이 바위에 부딪히며 내는 그 물소리가 소소하며 쓸데없는 논쟁으로 떠드는 소리 듣지 말고 오직 자연이 주는 진리의 음성만을 듣고, (비록 문구에는 없지만 당시 독서당이라는 정황에 비추어) 독서를 통한 진리 추구에만 정진하겠다는 시인의 다짐으로 읽게 됩니다.
문제는 의역도 중요하지만 이 시를 구성하는 7언률시의 압운법입니다. 이는 마치 시편이 기가 막힌 압운법으로 운률에 맞추어 읽기 즉 소리내기에 적합하다는 것입니다. 최치원이 쓴 7언절구의 한시는 ‘평성’과 ‘측성’을 번갈아 대입하는 “평측식(平仄式)”을 사용하였습니다. 지난번 소개한 “추야우중”이라는 시도 평측식을 잘 사용한 예입니다.
 
秋風唯苦吟 평평평측평
世路少知音 측측측평평
窓外三更雨 평측평평측
燈前萬里心 평평측측평
 
“가야산 독서당”의 시에서 최치원은 압운법을 잘 사용합니다. 기승전결에서 기승결구인 만,간,산(巒, 間, 山)이 평에 해당하고 “이(耳)”는 측에 해당하는 기가 막힌 압운법을 사용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말씀들이 최치원 당시보다 2300년 앞서서 이러한 압운법을 사용합니다. 출애굽기 15장 1-19절과 민수기 21장 17-20절이 이러한 압운법을 사용한 실례입니다. 출애굽기 15장 2절의 경우 둘째 소절의 첫 글자는 첫 소절의 첫 글자와 같거나 비슷한 소리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이점이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경이 낭송, 응답송, 그리고 찬양과 기도하기에 매우 적합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을 “소리 적합성(sound matching)”이라고 합니다. 이미 언급한 출애굽 15장 2절의 끝 부분에 소리 “hu”를 내는 "anwehu" 와 "aromemenhu" 가 들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압운이지요. 이는 말씀의 끝절 부분에 어미로 붙어서 같은 소리를 내도록 합니다.
히브리어는 우측에서 좌측으로 읽기에 아래의 글을 보시면 맨 왼쪽으로 가면서 끝 글씨에 새긴 압운법의 묘미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읽으시는 분들의 편의를 위해 자구를 왼쪽에서 오른쪽 읽는 법으로 재배치해서 한 단어 한 단어를 읽도록 했습니다.  첫단어는 עָזִּי으로 시작하고 그리고 맨 마지막 단어는וַאֲרֹמְמֶֽנְהוּ׃ 가 바로 끝 단어입니다.
עָזִּיוְזִמְרָתיָהּוַֽיְהִי־לִילִֽישׁוּעָהזֶהאֵלִיוְאַנְוֵהוּאֱלֹהֵיאָבִיוַאֲרֹמְמֶֽנְהוּ׃ ( 15:2 후반절)
출애굽기 15잘 2절의 맨 마지막 두 단어를 잘 살펴보면 중국의 한시나 우리나라 한시보다 더 기가막힌 압운법의 묘미를 보여 줍니다. 이 두단어는 다음과 같습니다. וְאַנְוֵההֵי אֱאָבִי _ וַאֲרֹמְמֶנְה그 중에서도끝소절 וְאַנְוֵה (u·anu·eu: 여기에는וְ용법을 넣어 “anwehu”에서 “uawehu” 가 되면 문맥으로 “uanueu”가 됩니다.)와 וַאֲרֹמְמֶנְה단어가 같은 “hu” 소리를 똑같이 내는 압운에 해당합니다.
구약 성경의 대부분의 구절들이 소리와 형태와 수사학적 구조에 따라 불규칙 형태(Unusual forms), 평행주의 (Parallelism), 양적 운률 (Quantitative rhythm), 사성 운률 (Accentual rhythm), 비가(Dirges), 전사 반복 (Anadiplosis), 이합체(Acrostics)등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시편 150편과 잠언 그리고 아가서에 담김 운률, 압운법은 저의 개인 생각으로는 그 누구도 만들도 없는 아름다운 시와 찬양과 기도와 말씀과 예배가 담긴 놀랍고도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렇게 된 히브리어 성경을 매일 낭독하고 기도하는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자체에 대한 자부심과 그 언어를 통해 매일 매일 읽고 묵상하고 찬양하고 기도함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이 말씀의 능력이 곧 하나님의 능력임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모세에게 환란에 대한 말씀을 가나안에 들어 가기 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 (신 4:30)” 그리고 그 말씀을 마음에 새김이 큰 축복이 된다고 하십니다.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 6:6-7)” 그 하나님의 말씀은 완벽하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않을지니 나의 한 말이 이루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겔 12:28)
 
가을 새벽
 
낙엽 두엄진 풀벌레
별 빛 받아 밤새우면
촛농에 기운 선비
먹가는 소리에 피는 가을시

길라래비 길바람에
바시락대는 삶의 언저리
낙엽도 달빛따라 기울면
무거워지는 추억의 무게

흐벅진 여름에 갇힌 밤하늘
부승긴 가지에 풀린 큰 하늘
새벽 다가와도 우련한 마음
피는 여명 오직 말씀으로
 
이 가을에 말씀 묵상과 깊은 기도로 주님께 더욱 더 가까이 나가시는 계절되시기를 충심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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