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진 인생길에서 - 기독뉴스
모바일보기
기독뉴스 개편사이트 안...
2024년 04월 29일
 
뉴스 오피니언 방송사진 커뮤니티 2세뉴스
기사등록 I 독자마당 I 광고후원 로그인 회원가입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김종필칼럼
2011년12월28일 00시52분
글자크기 기사내용 이메일보내기 뉴스프린트하기 뉴스스크랩하기
빚진 인생길에서
선교사가 갖는 특권이 하나 있다면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입니다. 쉽지 않으나 이방의 객이 가기에 결코 예사롭지 않으며 흔치 않은 그 길을 간다는 것이지요.
선교사의 길엔 고난과 아픔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동반되는 영혼 구원의 기쁨과 추수의 열매와 천국 소망의 기대가 있습니다. 더불어 받는 은총이 있다면 선교사의 가는 길에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숨겨진 비경들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분명 축복의 길을 달려 왔다고 봅니다.
화산이 터지는 광경을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되었고, 해질녘 끝없이 타 들어 가는 산하를 보며 복음 전했던 감격을 잊을 수 없습니다. 깎아지르는 비경이 드러나는 산길을 달릴 때에는 영화 속에서도 볼 수 없는 천하절경들이 하나 하나 눈앞에 펼쳐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장면을 아이맥스 영화관의 편안한 의자에 앉아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좁디 좁은 산 비탈길을 달리는 지프니 위에서는 숨죽이며 바라 보아야 했습니다. 의지할 것이라고는 단 한 줄의 밧줄이 전부인 채, 달리는 지프니(마차같이 생긴 트럭 형 뚜껑 달린 필리핀 전통 자동차) 꼭대기에 매달리며 바라보는 정경을 보노라면 잠시도 눈을 감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실 저희 부부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면 제주도 한 번 가 보는 것이었습니다. 신혼의 단 꿈을 안고 기뻐해야 할 저희 부부가 신혼 여행도 갈 수 없었고, 신혼 여행지가 기도원이 되어 금식하며 통곡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아픔이 있었기에 비행기 타고 제주도를 한 번 돌아 보는 것이 꿈(?)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결혼 한지 20여 년이 지나서야 어느 권사님의 헌신을 통해 저희 부부는 제주도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꿈에 그리던 제주도는 더 이상 저희 부부에게는 꿈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하루를 택시를 빌려 제주도를 돌아 다니다가 지치고 힘든 우리 부부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들어가서 호텔에서 쉬는 게 최고구려, 제주도에 별로 볼 것도 없구료!”
선교사로 고생만 한 줄 알았는데 고생이 아니라 제주도의 절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많은 비경들을 그렇게 많이 보고 왔던 것을 깨닫고 지금의 제주도를 돌아 보아도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관광지로서의 제주도는 손색이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저희 부부는 제주도보다 더 좋은 절경들을 이미 다 보아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선교지에서… 도저히 관광객이 갈 수 없는 오지 중의 오지에는 사람이 감히 생각할 수 없는 경치와 자연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선교지에서 2000미터가 넘는 산악 지역을 여행하면서 고작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경이” “놀라움” 이라고 해야 하니 표현의 한계를 느낍니다. 마닐라에서 필리핀 최북단인 투게가라오시로 가서 거기서 다시 여러 시간을 걸려 따북(Tabuk)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또 다시 지프니를 타고 산꼭대기를 타고 하루 종일 걸려 도착한 곳에 하루를 묶게 됩니다.
그곳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역으로 지하강이 흐르고, 울창한 원시림에 야생생물들이 즐비합니다. 몇 개의 산을 넘으면 구름도 헉헉거리기에 중턱에 앉아 숨 고르기를 해야 할 정도입니다. 구름을 이불 삼아, 알맞은 돌을 베개 삼아 잠을 청하면 하늘에 숨겨 두었던 별들이 한 밤중에 쏟아져 내리면 별 싸라기 우박을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깊고 깊은 산 한 가운데 온 산을 불태우는 동녘이 밝아 오면 먼 구름 사이를 가르며 차고 오르는 새 날개 짓에 하늘도 덩달아 올라가고, 멀었던 시냇물 눈 속에 가깝게 밟히면 귓전에는 맑고도 고운 시냇물 흥겨운 찬양 소리 절로 납니다. 얼음물 깨는 듯 차가운 개울가에 세면을 하면 가슴까지 시원해 주시는 순간에 등쌀 아래 신선한 공기로 몰아서 쏟아지는 듯 합니다. 
열대 섬들을 돌아 다니며 전도하러 다니다 보면 배를 타고 가는 지역마다 생애에 볼 수 없는 일들을 만납니다. 배가 달리는 속도에 맞추어 열대어들이 점프하며 함께 달려 갈 때에는 어떤 영화에서도 본적이 없는 광경에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달리는 배 아래에 손 흔드는 산호초들은 유리 아래 비추는 전시관의 모습보다 선명하게 몸짓하고 열대 우림 아래에 쏘다니는 열대어들은 제각기 뽐내는 휘황찬란한 색깔들 비추느라 나그네의 눈을 떼지 못하게 합니다. 열대어들의 찬연한 색상은 세상의 물감들의 초라함에 대비됩니다. 뱃고동 소리 높여 노트 속도를 높이는 뱃사공을 비웃기라도 하듯 앞지르기를 하는 열대어들의 날렵함에는 노을 진 바닷가에 붉게 태우는 정열의 석양이 동조하듯 홍조 띤 미소로 수평선 잔잔한 물결 위에 반짝거립니다.
고난의 길, 복음 전도의 길, 영혼 구원의 길을 가는 선교사에게 이런 축복과 은총이 어디 있을 수 있을까요?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미얀마의 구석구석을 다니며 보아 왔던 절경들, 아시아의 허파 같은 칼리만탄(보르네오) 섬 정글을 비행기로 6시간을 달려도 끝이 없이 펼쳐지는 원시림의 향연에 넋을 잃을 것 같았습니다. 사람 발길의 흔적이 없을 것 같은 오지에도 마을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쏟아지는 별들을 천정 삼아, 지평선 너머 스러지는 달빛을 시계 삼아 살아 왔던 나날 속에 셀 수 없이 보아 왔던 풍광과 운치 그리고 절묘하고도 변화무쌍한 해와 달과 별들의 조화는 생애 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이것을 화가가 담으면 천하절경의 그림으로, 사람 사는 모습으로 그리면 소설과 문학으로, 이것을 마음으로 그려 나가면 시가 되었으련만 사실은 남은 것 하나 없이 전도하고 교회 개척하느라 빈털터리 빈손으로 돌아 온 것 같습니다. 
눈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그 지역에서 사역에 몰두하느라 목회자 세미나, 연합전도 집회와 기도회와 사역자 훈련과 교회 개척 사역, 그리고 제자 훈련에 몰두하느라 책상에 앉아 붓을 들 여력이 없었습니다. 아니 그런 와중에 글을 쓴다는 것이 호사스러운 일로 비쳐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에게 축복의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60여 개 나라를 다니며 이곳 저곳을 다니며 복음 전하던 어느 날 지난날을 상기하며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온 것입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기 전 사진기 하나 갖는 것도 호사스러운 그 시절, 변변찮은 사진기 하나 갖고 있지 못한 저에게 절호의 기회가 다가 온 것입니다. 바로 공항 터미널입니다.
보스톤에서 가방 꾸리고 다른 곳으로 달려 가기 위해 검색대를 통과하여 비행기를 타기 직전 숨 고르기 하는 유일한 장소가 공항의 대합실입니다. 일단 터미널 안으로 들어 오면 30분에서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저 단조롭기 그지 없는 터미널이 저의 작업장이 되고 옛 추억을 되살리는 그런 장소로 안성맞춤이 됩니다.
전기를 꽂을 수 있다면 노트북을 열고 글을 쓰는 것입니다. 옛일을 기억하기도 하고, 못다한 사연들을 적기도 하고, 지금의 심경을 글로 남기기를 노트북 배터리가 다하기까지 합니다. 만약 쓰다가 중단하면 나머지 글을 상공에서 쓰기도 합니다.
이곳 저곳을 다니며 여행한 일들을 회상해 보니, 산길, 들길, 바닷길, 하늘 길을 다니는 의미가 다름을 보게 됩니다. 자동차를 타고 달릴 때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산하를 바라보며 걷는 길입니다. 은고 김삿갓의 시에 “주마간산(走馬看山)”이라는 고사성어에서 뽑은 “간산(看山)”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간산(看山)

倦馬看山好 (권마간산호) 게으른 말 타고 아름다운 산하 구경하니
執鞭故不加(집편고불가) 걷는 말 일부러 채찍질 할 이유없네
岩間纔一路(암간루일로) 바위 사이 열린 외길에는
烟處或三家(연처혹삼가) 연기 피는 집 서너채 보이네

花色春來矣 (화색춘래의) 알록달록 꽃이 피니 봄은 이내 달려 오고
溪聲雨過耶(계성우과야) 지나간 비 시냇물 소리 몰고 오네
渾忘吾歸去(혼망오귀거) 집에 돌아 갈 것 황망히 잊고 있으려니
奴曰夕陽斜(노왈석양사) 머슴이 날 저문다 재촉하네

휙휙 비행기 타고는 볼 수 없는 자연산하를 굼벵이 걸음으로 걸어 가는 말 위에 앉아 주마간산(走馬看山) 풍류 즐기는 김삿갓의 여유를 한껏 볼 수 있음이 “간산” 에 나타납니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해학과 시심 그리고 빼어난 글 솜씨는 조선 말기의 어떤 사대부와 견줄 수 없는 문필가임을 알려 주지만 한시의 형식을 타파하고 우리말의 의미를 그대로 풀어서 쓴 시들을 읽노라면 가히 천재적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지금의 입장에서 읽으면 낯 뜨거운 언어들이 많이 있기도 하여 차마 옮기기도 부끄러울 정도이지만, 김삿갓이 갖고 있는 걸음마다 남은 것은 삶의 궤적을 그려낸 그의 “시”입니다.
어렸을 적 어린 저를 안으시고 동양고전 들려 주던 선친에 대해 저는 많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통행금지가 해제되자 마자 술을 드시지 않으시면 손이 떨려 해장술을 마시러 나가셔서 다시 통행금지가 되는 시간에 들어 오시는 부친이셨습니다. 왜정 시대에 소학교 내내 수석으로, 남부럽지 않은 만석지기 집안에, 6대 장남에, 여러 학교들을 두루 공부하시고도 한 나라의 장군으로, 나라를 위해 삶을 드릴 수 있는 도량과 학문과 인품과 식견을 가지신 아버님이 왜 그리 술독에 빠져 사시는지 어린 저는 알 길이 없었습니다.
빨치산 토벌 가셨다가 허리에 차는 눈에 빠진 이야기며, 대구 경리 참모학교, 해방 후 진주의 경찰 학교를 다니신 이야기며, 육군 사관학교 생기기 전 방위 사관학교를 다니신 말씀들을 들으며, 왜 그런 좋은 기회를 다 놓치고 선친께서는 술에 취해 사셔야 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늘 상 보아 온 것은 아버님의 술 드시는 모습이었고, 그런 아버님을 봉양한다고 저는 산에 가서 쑥을 캐서 쑥 즙을 만들어서 보양을 해 드리곤 했습니다. 입에 동양고전을 줄줄 달고 다니신 아버님을 보면서 왜 나는 저렇게 동양고전을 공부할 수 없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가족사이지만 해방 후 격동기에, 그리고 6.25 동란 이후 이장을 하시면서 그 많은 가산을 다 탕진한 후 당시 살아계신 할아버님에 대한 죄책감을 잊기 위해 술을 드시기 시작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재담과 학식 그리고 문재가 뛰어났던 은고 김삿갓(1807-1863) 이 팔도를 유랑하며 술과 기행과 걸식 생활을 해야만 했는지 궁굼할 것입니다. 본명이 김병연인 김삿갓은 천부적인 글 솜씨뿐 아니라 사물을 해학적으로 그려 내는 뛰어난 재치를 갖고 있었던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 여정에는 남에게 쉽게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서려 있기 마련입니다. 안동 김씨의 세도가의 후손으로 조부 김익순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하여 역적으로 몰리게 되고 그의 부친은 이곳 저곳을 유랑하다가 김삿갓이 여덟 살이 되던 해에 조정으로부터 사면을 받은 후 정착한 곳이 영월입니다.
시골 산촌에서 어머니의 강권으로 어릴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한 지 나이 20세에 시골 백일장에서 응시하여 장원 급제합니다. 시골 백일장은 지금으로 치면 지방 행정고시와 같은 것으로 뛰어난 문재를 지닌 김삿갓의 글 솜씨가 단연 돋보일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가 영월도호부의 과거인 백일장에서 장원급제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그의 운명을 가르는 계기가 됩니다. 7언 절구 36 행시에 달하는 장문의 글을 쓰게 되는데 시제는 “우천(于天)” 입니다. 불과 20의 나이에 그런 문장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이 시대에도 경이롭게 보입니다.
그의 글 가운데 "論鄭嘉山 忠節死(논정가산 충절사) 嘆金益淳 罪通于天(탄김익순 죄통우천)”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의 시구의 “우천”이 바로 시제가 된 셈입니다. 즉 “정가산의 충절의 죽음을 논하고, 역적 김익순의 죄가 하늘까지 이르렀음을 통탄하라”는 패기만만한 탄핵조의 글입니다.
빼어난 글씨로 장원에 급제한 그에게 돌아 온 것은 예기치 않은 운명의 소용돌이요 가계의 금기사항이었습니다. 장원 급제의 기쁜 소식에 아들의 시구를 읽은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졸도해 버립니다.  
아들이 역적으로 논하고 있는 김익순이 바로 김삿갓 즉 김병연의 할아버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순조 11년인 1811년인 신미년 12월에 홍경래는 전국에 반란군을 일으킵니다. 홍경래는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를 자칭하며 파죽지세로 전국을 점령해 갑니다. 당시 선천방어사(宣川防禦使)였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은 무관으로 홍경래 군대에 항복합니다. 반란군을 다시 진압한 조정은 김익순을 역적으로 몰아 참형에 처하고 그의 집안은 폐문을 당합니다.
겁쟁이의 대명사로 붓을 휘둘렀던 인물이 바로 자신의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다시 깨어난 어머니는 상세히 설명합니다. 역적으로 몰린 할아버지가 술에 취해 주무시다가 갑자기 공격해 온 반란군에 미처 저항할 기회마저 잃은 채 포로로 잡히게 된 사실을 듣게 된 것입니다.  
충격을 받게 된 병연은 한양으로 떠납니다. 한양에서 신분상승을 위해 과거를 보려 하지만 과거제도에 실망하여 세도가의 집에 얹혀 살게 됩니다. 그런 그의 생활도 잠시 그의 출신이 알려지자 그는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조상을 욕되게 한 자손으로 그리고 폐가 망신한 집안의 자손이라는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된 그는 전국팔도를 떠도는 방랑자가 됩니다. 자신의 이름조차 차마 부를 수 없어 머리에 쓴 삿갓 하나 의지하며, ‘김삿갓’으로 고치고 머루를 꾸리는 죽장(竹杖)과 짚신 한켤레 친구삼아 눈물로 삶을 지새는 어머니 등지고 방랑길을 떠납니다. 위로는 함경도, 아래로는 제주도까지 그리고 전라도 동북 땅에 생애를 마감하기까지 그가 남긴 것은 그의 시입니다.  
한 사람의 삶은 글로 표현되기도 하고, 삶의 발자국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저는 어렸을 적 아버님을 뵈면서 “나는 결코 커서 저런 삶을 살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수 없이도 했습니다. 제가 부러웠던 것은 아버님이 가지고 계신 해박한 동양고전에 대한 식견과 역사와 사회를 보는 안목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다 갖고 있으면서도 왜 저렇게 밖에 살 수 없을까?”라는 질문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지나 한편으로는 격동의 우리 민족의 절망스런 환경을 이해하기도 했고, 나아가서 그런 암울한 민족사 가운데서도 저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을 그런 가정 환경에서 저를 구출해 주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늘 어디를 가든 아버님이 어릴 때 들려 주시던 한시들이 생각납니다. 우리 말의 깊고 깊은 의미를 곁들어 풀이해 주면 “나도 커서 유학자가 되어야지!”라는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저는 한시를 쓰는 것도, 유학자의 길을 간 것도 아닌 영혼을 구원하는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이 길을 결코 후회해 본적도 없고 앞으로도 후회할 수 없는 길이라고 봅니다.
가난했던 가정, 가난한 조국에서 이제는 많은 나라를 두루 다니게 되었고, 이제야 해학과 풍자와 재치와 풍류가 있는 옛 선인들의 글귀가 생각나면서 아버님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지나간 작은 발걸음이라도 글에 담아 내는 작업들을 합니다.
그곳이 어디이든, 대합실에, 비행기 위에서, 또는 기거하는 다른 지역의 숙소에서 글을 씁니다. 글은 사람의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지만 제 글을 읽고 늘 부족함을 느낍니다. 작고 작은 자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또 이 작은 종을 생각하고 사랑해 주신 많은 분들의 헌신과 기도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또 다시 어느 곳으로 잠시 다녀 오게 됩니다. 올해만 해도 지구촌을 몇 바퀴를 돌았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여행을 떠나려면 챙겨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강의할 내용과 자료들, 비행기 위에서 읽어야 할 도서와 논문 그리고 따로 복사한 내용들, 그리고 컴퓨터에 정리한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가방의 부피는 크게 달라지진 않지만 양말과 나머지 부분들은 여행하는 기간과 비례합니다. 예를 들어 10일 정도 체류하면 10켤레 정도의 양말과 속옷들을 챙깁니다. 거기에 설교와 강의 횟수에 따라 양복의 수도 정하게 됩니다.
처음에 멋 모를 때에는 창가에 앉았으나 이제는 복도 석을 선호합니다. 캐빈에 올려 놓은 자료들을 수시로 꺼내야 하고 비행기 안에서 자료 정리하고 글을 쓰게 될 경우에 노트북 컴퓨터를 꺼내 보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떠나는 여행은 장거리 여행이 많습니다. 밤에 떠나면 보통 밤에 도착하고, 낮에 떠나면 낮에 도착합니다. 항공기의 출발과 도착 시간을 그리 만든 것으로 봅니다.
 미국은 워낙 넓어 보스톤에서 LA까지 6시간 반이 걸립니다. 한국에서 필리핀이 고작 3시간 반, 인천에서 북경이나 중국의 기타 도시들이 2시간, 그리고 일본 어디나 한 시간 정도, 보스톤에서 런던이나 암스텔담이 6시간 반 정도 걸리는 것을 보면 미국이 참으로 넓다고 하는 것을 항공 여행 가운데 늘 느낍니다.
잦은 여행을 하다 보니 짐을 꾸리는 것, 짐을 푸는 것, 짐을 나르는 것, 가방의 무게를 재는 것, 그리고 항공권과 여권 챙기는 것, 자료를 섞지 않고 도착지마다 읽을 자료를 구분하는 것, 비상시에 읽어야 할 USB 자료 디스크 챙기는 것, 노트북 배터리를 터미널에 충전시키는 것, 컴퓨터 Power Point에 연결한 어댑터, 전기 코드가 다른 경우를 대비해가지고 다니는 유니버설 어댑터 등 매우 많습니다.
그곳에 도착하면 양복과 셔츠가 구겨지지 않게 방에 들어 오는 즉시 풀러 다시 입을 수 있도록 옷장에 걸어 두는 일을 해야 합니다. 가방을 꾸리고 풀 때마다 하나 하나에 많은 분들의 사랑의 손길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아끼는 가방을 선물해 주신 분, 저에게 양말과 속옷까지 챙겨주신 장로님 가정, 항공기 소음을 줄이라고 헤드폰을 선물해 주신 주의 종, 비행기 위에서 허기를 채우라고 말랑말랑한 절편을 가져 오신 장로님, 이 작은 종이 무엇이 관대 따뜻한 음식 대접하고자 친히 음식을 지어 대접해 주시는 수많은 분, 건강 챙기라고 약품들을 보내 주신 분들, 심지어는 글을 쓰라고 노트북 컴퓨터와 공책, 서적들을 보내 주시는 분들 보며 마음에 복받치는 감격에 주님께 감사를 드리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받을 수 없는 놀라운 사랑과 헌신에 늘 목이 메입니다.
선교지에서 대접해 주는 가정 없어도 마땅히 복음 전할 일꾼이 받을 상급은 주님 나라에 있기에 달려 왔던 자가 이런 대접을 받게 되니 “이래도 되는 것인지?’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제가 받은 상급은 하나도 없고 주님 나라 가면 꾸지람을 들을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번 여행은 저에게 일단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전의 모든 여행은 말씀을 증거해야 하는 집회 때문에 가는 여행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여행은 매우 중요한 분들을 만나러 가는 여행입니다. 양복도 꾸릴 필요없고, 넥타이도, 셔츠도 없이 간편히 다녀 올 수 있는 여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방을 꾸리려니 여전히 수많은 분들의 사랑이 묻어 나네요. 지면을 빌어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늘어만 가는 빚
 
태어나서 또개보니
가득한 어머니 사랑
빚으로 시작한 인생이라오
 
뭇조린 죄 세어보니 태산
홀로 내 짐 지신 그 분땜에
나도 빚쟁이가 되었구료
 
빈몸에 늘어만 가는 사랑의 빚
갚으면 갚을수록 더 늘어나는 은총의 빚
그 빚 때문에
주머니 더 비우고
가진 몸까지 다 드려도
여전히 갚지 못한 빚 하나
그것은 순교의 길이라오
 
육신의 빚 다 갚고
지나갈 하늘 나루턱
따라 올 인파 보며
내 빚 탕감해 주신 그 분 앞에
하염없이 흘릴 눈물
다시 없을 슬픔 보며
나는 가겠소
순교자의 길
 
관련기사가 없습니다
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뉴스스크랩하기
김종필칼럼섹션 목록으로
 

이름 비밀번호
 67161222  입력
댓글콘선택 : 댓글 작성시 댓글콘을 클릭하시면 내용에 추가됩니다.
[1]
뉴스홈 > 오피니언 > 칼럼 > 김종필칼럼
다음기사 : 책과 하나님의 말씀 (2011-12-28 00:52:39)
이전기사 : [김종필 목사 기고] 놀랍고도 놀라운 2010 마닐라 국제 선교 대회 (2011-12-28 00:51:55)

해당섹션에 뉴스가 없습니다

회사소개 보도지침 저작권 규약 이용약관 사업제휴 직원채용 광고후원 기사제보 연락처 don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