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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0시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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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여기 꿈꾸는 자가 오고 있다! (창 37:19)
 
요셉의 형들이 자신들의 도시락을 가지고 오는 동생을 두고 부른 호칭입니다.
 
꿈이 있어서 보디발 부인의 유혹, 칙칙하고 음습한 감옥도 영어의 몸이 아닌 꿈을 펼치는 훈련장으로 사용한 요셉을 좋아합니다.
 
그 꿈이 이루어지기까지 당한 연단과 훈련은 인내의 세월이며, 좌절과 아픔의 시간이지만 그 속에 배태되어진 숙성된 것들은 정직과 세계 경영, 진실과 하늘과 통하는 영성, 그리고 모든 사람을 포용하는 심지어는 자신을 팔아 버린 형들까지 용서하는 포용력을 낳게 했습니다.
 
전 어릴때 요셉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요셉의 꿈을 동경했습니다.
 
그 꿈에는 댓가가 있습니다.
 
꿈이 크면 클수록 꿈의 댓가는 크기만 합니다.
 
꿈은 나의 꿈이 있고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습니다.
 
내 꿈은 한 여름 밤의 감미로운 로망스로 끝날 수 있어도 하나님의 꿈은 중단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인류는 하나님의 꿈의 성취를 보고 있습니다.
 
다니엘에게 주셨던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셔서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꿈, 요엘에게 주셨던 세상 모든 족속이 꿈과 환상과 예언하게 되는 그 놀라운 일들을 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그 환상이 지금 우리 눈 앞에 이루어짐을 보며 주님의 꿈을 꾸는 사람 그리고 그 주님의 꿈을 성취하는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아주 어린 나이에 매일 새벽 기도와 철야 기도를 하던 저는 불타는 꿈을 기도 가운데 부어 주시는데 황당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하고 담배 봇짐 장사 나가신 어머니가 한 달만에 때로는 몇 개월만에 오셔서 끓여 주시는 수제비 기다리는 어린 소년의 눈에는 지울 수 없는 꿈이 있었습니다.
 
위인 전기를 읽으며, 신문 배달을 하면서 그 꿈 때문에 뛸 수 있었습니다.
 
나의 동료들은 자전거를 타고 휙휙 신문 뿌리듯 던지며 배달하는데 전 뛰면서 다리에 쥐가 날 정도로 신문 돌리며 그 꿈을 키웠습니다.
 
뛰면서 걸으면서 매일 하루에 두번씩 기도하면서 민족을 놓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점점 커지지 시작했습니다.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복음화를 위한 기도가… 북한 동포를 위한 기도로… 죽의 장막 중공(지금의 중국)으로, 철의 장막 소련(지금의 러시아)으로 가더니, 태평양으로, 아시아로, 유럽으로, 미대륙으로, 아프리카로 그리고 이스라엘까지 가는 거대한 꿈이었습니다.
 
세계를 품고 기도하는 어린 소년의 눈에는 꿈이 있었습니다.
 
그 꿈을 품고 달리며, 국민학교 때에는 2000권의 책을,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는 도합 6,000권의 책을 대학교 때에는 도서관에 파묻혀서 영어책으로 5천권의 책을 숙독했습니다.
 
그 책들은 실존하는 꿈의 애기가 어떻게 사실로 성취되는 과정을 확인해 주는 과정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신문배달 소년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이로서 꿈을 먹고 자란 꿈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환상 중에 보게 된 한 여인에게 전화가 오게 되었고 그 여인은 꿈에 본 그대로였으며 그 아름다운 여인은 제 아내가 되었습니다.
 
똑같은 꿈을 세번씩이나 꾸게 된 아내의 꿈 때문에 필리핀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필리핀에서 꿈을 주셨습니다.
 
“네가 세계에 있는 선교사들을 깨울 것이며, 교회와 지도자들을 깨울 것이다!”
 
슬럼가의 잊혀진 무명의 선교사에게 꿈을 주신 분은 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영화나 TV에서 볼 법한 꿈의 나라 영국 그리고 꿈의 대학 영국 대학 그리고 꿈에서 볼 법한 선교사들의 친필을 제 눈으로 보고 읽을 때, 꿈 같은 현실이 영국 대학 도서관에서 일어났습니다.
 
사진으로나 보던 영국 교회를 187 교회나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꿈으로나 가능한 엄연한 현실이었고 저는 역사의 현장을 제 발꿈치로 분명히 밟고 있었습니다.
 
꿈에서나 가능한 요한 웨슬레의 초판본을 손에 쥔 순간 제 코끝을 울린 것은 퀘퀘한 그 냄새가 주는 역사의 현장이었습니다.
 
매일 매일 꿈 꾸는 것 같았습니다.
 
하루에 두시간 자고도 낮에 걷고 강의를 청강하는 것은 꿈을 현실로 보는 성취의 모습이었기에 따로 꿈 꾸는 잠자는 시간이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PhD 마치고 꿈꾸던 세계 지도자들을 세워 이슬람권 힌두권 그리고 불교권 복음화를 앞당기는 일들을 하고 싶어서 마음이 필리핀으로 달려 가던 때였습니다.
 
제 아내가 또 꿈을 꾸었습니다.
 
필리핀이 아닌 보스톤으로 가는 꿈이었습니다.
 
아 이럴수가… 나의 꿈은 필리핀인데… 보스톤이라니….
 
난감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주신 꿈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사실은 쉽지 않은 제 생애를 가를수도 있는 결단이었습니다.
 
이 꿈을 따라 허허벌판 같은 (영적으로 그렇다는 뜻임) 보스톤으로 달려 왔습니다.
 
주님이 주신 꿈은 너무나 컸습니다.
 
“아들아! 지구촌 최대의 부흥을 보스톤에서 일으키리라! 너는 보스톤으로 가라! 그곳에서 역사상 전무후무한 부흥이 일어나리라!”
 
그 꿈은 황당한 것 같았습니다.
 
사실 보스톤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하바드, MIT, BU, BC 그리고 청교도들의 본고장에 Universalist 들이 삼위일체도 부인하고 Humanism, Secularism, Rationalism, Intellectualism 과 동성 연애 합법화를 통해 살아 있는 기독교 공동체의 힘을 무장해제 시킨 곳입니다.
 
그런데 그런 보스톤에 대해 주님께 주님의 꿈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꿈의 현장에서 2004년 11월 당시 18년 전 환상 중에 만났던 백인을 만났습니다.
 
Douglas Hall 박사입니다.
 
그의 꿈은 서구권 부흥이었고, 작게는 보스톤의 부흥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꿈이었고 그는 저의 환상 가운데 자신의 도시의 부흥의 꿈을 애기하며 저를 와 달라고 불렀던 “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보스톤에 백인 교회의 부흥이 아닌 다인종 교회에서 일어나는 작은 부흥 즉 조용한 부흥(Quiet Revival) 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제게 말합니다.
 
더 큰 부흥을 기다리고 있다고…
 
바로 그 사람을 찾았다고…
 
Elijah Kim! 당신에게 하나님이 그 꿈을 주셔서 이 도시에 보내 주신 것이라고….
 
그리고 몇 년전 하나님께서 보스톤과 미국의 부흥을 위해 40일 금식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30여일이 지난 어느날 주님은 저의 몸을 우주 가운데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사람의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마지막 시대에 관한 것을 저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이땅으로 다시 보내시면서 사람의 생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도시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도시의 생생한 모습은 지금도 눈 앞에 선명할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한 도시에 주님의 영광의 임재가 가득하고 그 안에는 너무나 놀라운 대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시의 중앙에는 너무나 큰 올림픽 주 경기장과 같은 돔이 있었고 그 위에는 중보 기도 타워가 있어서 수천명이 매일 열방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경기장 안에는 무려 10만명이 넘는 좌석이 있었고, 그 규모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큰 것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매일 10만명의 인원이 그곳에 기도하며 하루에 다섯번에 걸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예배의 모든 모습은 생방송으로 전세계에 중계되고 있었습니다.
 
이 중계된 것은 TV 와 인터넷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모바일을 통해서도 선명한 화면으로 중계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구촌 곳곳에 중계된 예배 실황은 밤이나 낮이나 이란 이라크 파키스탄 북아프리카 등등 수많은 나라에 전파되었습니다.
 
마을 어귀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에게도, 밭을 가는 농부들에게도, 바다의 선장과 승객들에게도, 사막과 산악의 오지에도 셀폰이 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생방송의 모습은 전달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운데 그들의 그런 모습을 본 제가 놀랐다는 사실입니다. 
 
카메라 앵글이 클로즈 업 해서 부흥의 생생한 현장을 전달 할 때 아이들도, 어른들도, 무슬림도 유대인도, 힌두교인들도 불교인들도 보고 그 기적의 현장을 아주 우연히 그러나 자연스럽게 생방송으로 보면서 자신의 삶을 결단하게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방송의 현장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것은 보스톤 기도의 도시에서 일어나는 예배의 모습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드려지는 예배 자체는 어떤 의사도 과학자도 그리고 어떤 수사관도 부인할 수없는 기적과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가 가득 넘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드려지는 모든 예배는 지구상의 모든 언어로 통역되어 생방송으로 전송되었습니다.
 
그 모습만을 보고 전혀 복음을 접해 보지 못했던 수많은 영혼들이 즉각 즉각 예수를 믿게 되는 기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많은 무슬림 가운데 남편 모르게 부모 모르게 아이들도 장년들도 시간만 되면 전화기를 들고 주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것이구나!
 
마지막 시대의 대 부흥은 미디어에서 오는 것이구나!
 
하지만 전 미디어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내 눈에 생생히 보여지는 그 예배의 실황을 중계하는 팀은 대부분 백인들이었습니다.
 
그 방송국의 규모는 CNN 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고 케이블 인터넷 미디어의 영역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으며 이미 아프리카 사바나에도 중동권에도 그 가난한 힌두권과 불교권에도 복음의 메세지는 생생하게 실시간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방송국 안에는 세계의 모든 언어를 커버하는 통역관들이 실시간으로 통역하였으며 자막으로 음성으로 심지어는 문자 파일까지 받아 보게 하는 놀라운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은 월드컵을 생중계로 볼 때의 그 스릴(Thrill) 과 흥분(excitement)을 능가하는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월드컵이나 스포츠의 박진감 넘치는 모습이 수많은 현대인들을 바보 상자 앞으로 묶어 버립니다.
 
우리 기독교 안에는 스포츠를 능가하는 예배의 감격, 전국민을 시선을 사로잡는 대통령의 명연설처럼 복음 증거의 살아있는 메세지는 증거할 수 없는 것일까?
 
스포츠의 매력은 승부를 지켜 보면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과 기대감입니다.
 
예배 가운데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런 기도의 능력과 질병과 저주로부터 해방되는 그런 감격적인 예배를 드릴 수는 없을까?
 
오늘날 많은 교회가 구원의 감격의 dynamic 을 잃어 버리고, 단지 예배는 형식을 잘 꾸며서 드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생기 넘치는 연어를 냉동했다가 해동시켜 맛보는 그런 밋밋한 예배와 같습니다.
 
이런 예배 가운데 스포츠, 향락에, 철학과 세속주의 물든 영혼들이 기독교 예배에 Dynamic 한 것을 느끼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고 있는 것이 엄연한 작금의 실태입니다.
 
전달되는 메세지가 현실과 동떨어져서 찬양은 그런데로 따라 하는데 설교 시간은 유일한 “잠의 휴식(Dream rest)”의 시간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자던 영혼 벌떡 일어나고 죄악에 묻혀 사는 영혼 각성되는 부흥의 현장인 예배를 드릴 수는 없을까?
 
그런 저에게 보여진 그 예배의 현장은 마치 “살아 팔딱 팔딱 뛰는 연어의 활력”이 넘치는 모습이었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차고 올라 가는 그 연어의 기개와 도전은 온 몸에 경련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10만명이 예배를 드리는 현장에는 그런 연언의 생기와 같은 살아 있는 복음의 메세지가 철철 차고 넘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고, 그 복음이 능력으로 나타나고, 모든 과학자들에 의해 그 치유와 기적과 기름 부으심이 검증되고 그럼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기로 작정하는 놀라운 일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그 모든 것을 전달해 주는 것은 바로 미디어 그 중에서도 방송매체였습니다.
 
그 부흥의 현장에 저의 동료인 Brandt Gillespie 가 Headset 을 끼고 지휘하는 모습도 보이고 지금과 같은 카메라가 아닌 훨씬 더 육중한 카메라(전혀 지금 제가 본 것과 다름, 현재의 추세는 카메라 소형화로 가고 있는데…) 가 움직이는데 그 첨단 기술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습니다.
 
카메라 앞쪽이나 좌측(방향은 정할 수 있음)에 달린 화면은 단순히 보는 기능만이 아니라 캡션, 믹서, 심지어 위성중계와 중계인끼리 주고 받는 자막 신호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며 이는 생방송의 모든 장점을 그대로 살려 내는 technology 가 그 안에 다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생생한 현장으로 제 눈으로 40일 금식 중에 보면서 참으로 감격해 하면서도 큰 혼동이 왔습니다.
 
나는 방송에 대하여 아는 바도 없고 이러한 메카니즘을 이해할 만한 지혜도 없는데…
 
주님께서는 앞으로 세계 최대의 방송국을 세워 복음 전파를 하는데 사용될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복음의 메세지와 놀라운 현장력을 실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순간 그 영혼이 전율을 느끼며 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미디어 팀을 구성하자!
 
설교 방송만 보면 채널을 돌려 버리는 현대인들에게 지나가다가도 그 놀라운 모습을 보며 영혼이 클릭되는 컨텐츠를 제공하자.
 
정보의 전달이 아닌 마음의 전달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이 전달되는 그런 방송팀을 만들자!
 
카메라멘도 기도하고 디렉터도 전율을 느끼는 성령님의 임재의 현장을 만들자!
 
전 그 이후 매우 작은 미디어 팀을 만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정말 맨주먹으로 말입니다.
 
맨주먹의 결과 낳은 것은 참담한 좌절과 어려움이었습니다.
 
지난 2년 가운데 첫해는 아무것도 모르기에 그저 바라만 보다가 작년에 한 형제를 영입해 작업하다가 그 형제가 떠나가게 되었고 남긴 자리는 황량한 모래 사막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과정이 공부하는 과정이었음을 보았습니다.
 
문학과 시 그리고 남녀 간의 사랑도 전기가 짜릇하게 오는 데 하나님의 사랑이 온 몸에 강물처럼 임하는 그런 예배를 드릴 수는 없을까?
 
냉동실에 차가워진 생선같은 너무나 지성적인 예배가 아닌 감성적이고 영적인 예배를 드릴 수는 없을까?
 
메세지를 듣다가 영혼들이 회심하는 그 모습을 생기를 다 빼버린 기계적 메세지와 기계적 기능으로 전달하지 말고 기계도 춤을 추듯 영혼을 흔드는 방송 컨테츠와 방송팀을 구성할 수는 없을까?
 
지난 1년의 설교 일정 가운데 한 형제와 함께 카메라 메고 미대륙을 다니면서 말씀을 증거하고 촬영한 경험을 통해 앞으로 한 1년은 이러한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    조회수가 아무리 적어도 단 한개의 DVD, CD 또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도 Quality 가 뛰어난 것을 만들자!
2.    메세지의 내용, 방송 앵글에 담아 가는 기술, 전달자의 동선과 이를 표현한 촬영, 연출, 편집 그리고 방출 또는 판매에 이르기까지 professional 이 아닌 것은 아예 만들지도 말고 내보내지도 말자!
3.    싸구려로 만들 바에는 시작도 하지 말자!
4.    제가 전하는 메세지 하나 하나에는 철학과 신학과 말씀의 깊이를 담아 청중이 당장 이해하지 못해도 어느 순간에 한번 두번 … 열번을 반복해서 듣고 보는 순간 영혼의 전율이 임하는 깊은 메세지를 전하자.
5.    싸구려 메세지에 현혹되어 순간의 조회수를 올리는 것이 아니라 한 영혼이라 진정 복음의 진리를 찾다가 만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도저히 그 메세지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그런 메세지를 전하자!
6.    신학적으로 학문적으로 성경적으로 어느 누가 문의해도 단 한구절도 빠트릴 수 없게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메세지를 전하자!
7.     이러한 기초 작업은 웹사이트, 웹 방송국, 그리고 방송 팀 구성을 하자! 비록 더디 갈지라도!
8.    그러나 어떤 것도 인위적으로 시도하지 말고 그 어떤 것도 강압적으로 하지 말자!
9.    성령님이 주시는 감동이 없이 단 1달라고 어느 누구에게도 손 벌리지 말고 요청하지도 말며 오직 기도와 간구로 주의 쓸것을 구하자!
10. 그러나 단 한사람 한 사람이 붙어도 복음에 생명을 건 사람들하고 평생을 같이하자!
11. 지구촌에 단 한사람이라도 quality 의 메세지를 증거하는 분이 있다면 함께 가기 위해 먼저 작은 것을 시도해 보자!
12. 이슬람 강좌, 이스라엘 회복, 부흥 강좌, 종말론, 성령의 기름 부으심 등 등 그 누구도 감히 흉내낼 수 없는 메세지를 quality 를 높여 전달하자!
13. 복제품이 넘쳐 나고 싸구려 plagiarizing 과 paraphrasing 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이 때에 어누 누구도 복사하기 힘든 골방의 기도와 연구 가운데 나오는 메세지를 전달하자!
14. 작은 공동체인 한국 공동체가 통하면 영어로 전달하며 세계로 나아가자!
1.    그러나 아무리 급해도 주님의 보폭에 맞추어 따라가자!
 
저는 이 원칙에 따라 사역을 예비하고 진행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러기에 쉽고 쉬운 편한 길을 택하기보다는 단 한번을 해도 지울 수 없는 진리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대장정을 떠나고 싶습니다.
 
우리가 제 아무리 뛰어난 장비를 지금 구입해도 불과 2년 지나면 옛 유물이 되듯 현대 기술과 장비는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때 가면 그러한 장비에 맞는 규모와 여건을 주셔서 구비하면 되면 지금은 지금의 흐름을 따라가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현재 누구하나 도와 주는 이 없고, 스튜디어도 없고 심지어는 가진 것 하나도 없는 보스톤의 황량한 땅에 피터스부르그(옛 레닌그라드)의 습지 겨울에는 꽁꽁 얼어 붙은 그 땅에 여름 궁전을 지은 피터 대제의 손에 쥔 삽 한자루 쥔 마음으로  이곳 미디어 팀을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피터 대제(러시아 로마노프왕조 제4대 황제(1682∼1725)의 깡마른 눈동자에 그 훤칠한 키는 하늘로 곳추세우고 그 매서운 북극 찬바람을 뚫고 나가는 반면 고개를 옷깃에 파묻은 궁정의 수많은 귀족과 관료들은 추위에 떠는 겁쟁이들 같은 그 그림을 응시하며 언제가는 그 삽자루(단 한대의 카메라로…) 하나로 기어코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새 일을 개척해 보겠다는 결의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이곳에 그의 꿈대로 유럽의 창이 되는 엄청난 도시에 세워질 줄 누가 알았을까요?

 


제가 갖고 있는 화보집이 너무 커서 작은 파일의 사진을 올립니다.
저 엄청한 추위에도 미동도 않고 바람을 치고 나가면 그 지팡이로 “바로 이곳에 도시를 세우노라” 할 때에 추위 때문에도 얼굴도 못드는 대신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동토의 궁전과 다리와 운하가 세워지고…

불가능하다고 보여진 지구상 가장 아름다운 도시 가운데 하나가 세워졌습니다.
 
 
저는 피터 대제의 공과를 논하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그 분에 대한 역사적 논란과 수많은 공격과 비판을 이 지면에 닮고 싶은 의도도 없습니다.
 
간신과 아첨꾼 그리고 계교와 술수가 난무하는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을 떠나 아름다운 도시를 꿈을 꾸며 성취한 한 사람의 “꿈”을 말하고자 할 뿐입니다.
 
세상 사람도 도시의 꿈을 꿔서 꿈의 도시를 현실로 수백년 전에 만들었는데…
 
청교도의 꿈, 윈트롭의 꿈, Darwie 의 Zion City 의 꿈, John Lake 의 남아프리카 Zion 의 도시의 꿈들이 현실로 다 이루어졌는데….
 
기도의 도시, 꿈의 도시 그 현장에 영혼들이 구원되는 그 꿈을 꾸고 싶습니다.
 
전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은 아예 시작하고 싶지 않습니다.
 
남들이 편하게 가는 일은 런던에서 보스톤으로 오는 대서양을 건널 때 이미 바다에 장사지내고 왔습니다.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단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쓸데 없는 일에 시간 낭비하고 속좁은 마음으로 사람 관계나 살피는 일은 접어 두기로 했습니다.
 
Quality 가 떨어지는 일은 아예 손도 대지 않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시작하는 것에는 단 두개 밖에 없습니다. 무릎과 삽자루(카메라 한대)
 
자 무릎 꿇고 삽자루 하나 들고 대서양과 태평양 그리고 인도양의 물의 떠 보자는 심정으로 출발하고자 합니다.
 
사실은 몇 개월 뒤의 일은 모릅니다. 하지만 소아시아  Prayer Walk 을 통해서 이 작은 꿈이 현실로 실현되는 작품하나 만들고 싶군요.
 
보고 또 보아도 또 보게 되는 그런 작품…
 
그 작품이 예루살렘으로…
 
유대 광야로…
 
카이로로….
 
영국 부흥의 현장으로….
 
미국으로…
 
그리고 세계 만방으로 그 지경이 넓혀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봄날의 환희가 봄바람 되어 창문을 치는 이 날에 차고 오르는 벅찬 감격으로 이 땅에 심기어질 복음 전파를 위해 작은 꿈의 시작을 기도에 실어 올려 보내 드립니다.
 
동토의 땅에 지구상에 가장 아름답다고 꼽히는 여름 궁전을 건설하고 도시를 건설한 피터 대제에게 있었던 것은 오직 그의 “뜨거운 심장과 손에 쥔 삽자루(사실은 지팡이지만)”였습니다.
 
오늘 그 심장으로 지팡이든 삽자루든 아니면 덜렁 카메라 한 대이든 쥐고 봄날의 꿈의 나래를 펼치고 싶습니다.
 
꿈을 꾸는 자는 결코 늙지 않는다.
 
그 꿈을 성취하기까지 그에게는 열정과 젊음 그리고 도전만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분들에게 주의 은총을 빕니다.
 
작고 작은 자 김 종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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