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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8일 00시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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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목사의 대하드라마 유대광야 중보기도회(8)

 
이른 아침 5시 30분에 우린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 모였다. 이른 아침이 되면 예루살렘 성안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기에 차분히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이란다. 지혜로운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어젯밤 늦은 시간까지 집회를 마치고 호텔 방에 들어 오니 자정을 훨씬 넘겼다. 새벽 한시가 넘어선 시간이다. 이것 저것 정리하니 두 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게 된다.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잠깐 눈을 붙이니 가야바의 뜰도 아닌데 야속한 자명종이나 되듯 새벽녘을 알리는 암탉이 동녘을 일찍 부르듯 부산을 떤다.

지도자가 게으르면 안되지! 침대에서 밀리듯 일어나 부시시한 눈 비비고 묵직한 고개, 뻐근한 어깨 흔들어 피곤함 몰아내는데 시야에 들어오는 시간, 새벽 4시! 조금 더 잘 수 있는데…. 어찌하리! 저 멀리 달아나버린 가나안의 최상품처럼 달콤한 꿀맛 같은 단잠이여! 추운 겨울 군대 막사에서 얼음 깨어 칫솔질하듯 힘찬 군가 맞추어 옷 갈아 입듯 주섬 주섬 챙겨 입는 옷 차림새 전쟁터에 진군하는 군병 같구나!

황급한 발걸음으로 달려 내려가니 호텔 로비에 웅성거리는 소리, 나보다 훨씬 부지러한 분들 기다리고 계시네. 밤잠도 없으시나? (사실 시간도 안주면서…) 부지런하고 단련이 잘된 육사 교관 같으신 분들이다. 차림새도 유격대 호랑이 조교 같으시다! 기죽는 순간? 이른 새벽에 출발하는 이유? 언급한대로 아침이 되면 사람이 바글거려 제대로 볼 수 없고, 상업화된 순례를 피하기 위함이란다! 여긴 지혜로운 솔로몬 같은 분들만 있나 보다!

기독교에 있어서 십자가를 빼면 무엇이랴?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지 않은가? 아무렴….그렇지… 우리의 죄를 홀로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억만의 일을 더듬을 수만 있다면 이런 영광이 어디 있는가? 친히 유월절 어린양이 되사 단번에 우리로 하여금 지성소로 나아가는 길을 여신 대제사장 된 우리 주 예수님…. 내가 따라가야 할 그분의 길, 십자가의 길, 그 길을 따라가고자 여기까지 우린 달려 왔다.


우리가 가는 길은 Via Dolorosa 이다. 비아 돌로로사는 라틴어의 Via Dolorosa 에서 온 것으로 ‘along the way of suffering’ 즉 ‘고통의 길을 따라서’라는 뜻이다. 우리는 통상 ‘슬픔의 길’이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지신 이 길은 한번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인류의 슬픔을 그 몸에 담당하심으로 하늘 길을 여셨다. Via Dolorosa 가 Via Salutis(구원의 길), Via Caelestis(하늘의 길)가 되는 순간이다.

해변도로는 Via Maris, 왕의 길은 Via Sebastian 이라고 부르듯 슬픔의 길은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까지 가는 십자가의 길을 지칭한다. 이 길은 로마총독 집무실부터 골고다 언덕까지 이어진 1.5㎞정도 거리이다. 비아 돌로로사는 첫째 채찍교회가 있는 곳에서 시작되어 마지막 무덤교회에서 끝난다. 우리가 가는 모든 교회마다 일련 번호를 친절하게도 다 붙여 놓았다. 모두 14개의 지점(station)으로 되어 있다.

그 시작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채찍에 맞으신 곳이다. 그래서 이름도 채찍교회로 명명했다 한다.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은 출발부터 곤비하신 모습이다. 아무리 건강한 Mr. Universe 라도 그 모진 매 맞은 살가죽이 찢기어지고, 핏자국 범벅이 되어 걷는 걸음도 성치 못할 것이다.

십자가가 생명을 단축시키려면 이토록 모진 고문을 그 몸에 담당시켜 쉬는 시간 앞당기려는 간악한 로마 군병의 몹쓸 짓이 아니런가? 주리시고, 목마르고, 고달프고, 애처로운 주님 최상의 몸 상태로도 지기 힘든 십자가 최악의 그 몸으로 십자가 지시고 골고다 언덕 길을 천리길 가듯 오르셨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 다음 장소가 선고를 받았던 곳, 첫 번째 넘어지신 곳,마리아를 만난 곳,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곳,베로니카를 만난 곳,두 번째 넘어지신 곳,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신 곳,세 번째 넘어지신 곳,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옷을 벗기신 곳,형틀에 못박히신 곳,그리고 운명하신 곳,아리마데 요셉이 시체를 내리신 곳,잠시 묻히신 곳, 동산으로 옮기신 곳 등으로 이어진다.

지구상 가장 긴 길, 영원히 하늘 아버지 흐느끼게 하는 형벌과 고통을 홀로 담당하신 글이다. 폭이 2m정도 되는 좁은 길은 넓고 편안한 길 가지 말라고 손짓하는 무언의 메시지를 주는 길이다.


오늘 우리가 가게 될 이 길은 옛 십자가의 길과 동일하다는 확신은 결코 없다. 흥망성쇠를 거듭한 예루살렘 역사를 보면 제대로 된 건물이 하나라도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구입한 예루살렘 폐허를 보여 주는 고고학 자료들을 보니 “그 황폐함이 이 정도일까?” 하는 놀라움이 새삼스럽다! 뒤집혀지고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 2천 년의 세월 속에 골고다 십자가 길도 파헤쳐지고 무너지고 세워지는 영욕의 세월을 간단없이 지나왔음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 모든 부침을 다 견디고 그나마 이 길이라도 남아 기억하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따라 갈 수 있음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를 인도해 주신 박 목사님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길이 아랍 건물들에게 막히고 또 그 위에 세워진 여러 건물에 의해 막힌 것을 탁월하게 설명해 주셨다.

난 들어도 사실 power point 로 보여 주면 시각화가 되어 금방 알텐데 말씀만으로 들을 때는 심령에 새겨놓고 picturization(내가 만든 사전에도 없는 말, 사실은 visualization 또는 imagination, 이럴 때 영어가 고생한다니까?) 을 해 놓고 보자. 나중에 다시 기억하며 생각해 보면 이해될 것이기에. 사실 지금 그것을 기억하며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박목사님의 친절한 설명과 안내가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다. 이 길을 따라가면서 생각해 본다.

예루살렘을 순례했던 많은 사람들도 나처럼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으며 약 800m 에 이르는 그 길을 순례했다면, 이 길을 오고 가는 무슬림 그리고 유대인에게 알릴 방법은 없을까? “에그 선교사의 속성을 못 버렸다니까?” 훈수가 길어졌다.

이 모든 경로는 에체 호모 수도원에서 시작하여 아랍권의 옛 예루살렘 골목길을 따라 성묘 교회까지 다다르면 마치게 된다. Via Dolorosa 라는 길이 확정된 것은 순례자들의 발걸음을 돕기 위해 정한 14세기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에 의해서라고 한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지금 우리가 걷게 되는 각 지점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1번부터 14번까지이다. 물론 일부의 유적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이점에서는 예루살렘 전체가 고고학적 유물로 구성되어 있으니 딱히 무엇을 짚어 말하는지 하나 하나 짚어 가야겠지만, Ecce Homo 같은 장소 하나만 보더라도 논쟁이 많았던 부분들이 조금씩 정리되고 역사성도 발굴에 의해 더 분명해졌다.

매주 금요일이면 프란시스코 수도사들이 이 길을 따라가며 기도 행진을 한다고 한다. 성지 어디를 가도 개신교적인 분위기를 찾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다니는 이 시간은 모든 수도원과 교회들이 문을 닫고 오직 성묘 교회만이 문을 열수 있는 시간이기에 더 깊게 의미를 묵상하며 아무런 방해 받지 않고 기도하며 갈 수 있어서 은혜로웠다.


익히 말한 바와 같이 지금의 예루살렘은 예수님 당시의 예루살렘이 아니다. 예수님 당신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설령 책으로 우리가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 보아도 이 땅의 그 누구도 당시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다. 탁월한 상상력에 정확하고 예리한 고고학적 발굴이 일어난다 해도. 이는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훼파되고, 옮기어 지고 무너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투탕카멘의 유적을 도굴범이 없어 완벽에 가깝게 보존된 것이 아닐까를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돌 위에 돌이 쌓여 수없이 그 위에 건물이 세워지고 다시 무너진 일들이 역사상 여러 번 반복되었다.

가만히 놔 두어도 그 후에 흙이 쌓여 흔적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데 전쟁의 폐허 더미 위에 세워지고 또 세워져서, 어떤 곳은 높이 올라가 버린 곳도 있고, 들추어 내어진 곳도 있으니 격랑이 어디 바다에만 있었으랴?

역사학자들에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역사적 사실이 있는 장소를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것이다. 고대 3대 항구의 하나였던 에베소를 가면 바다가 오랫동안 토사에 쌓여 뭍이 되어버린 모습을 볼 것이다.

고대의 그림에는 분명 배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이 있는데 지금의 에베소는 바다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바로 앞에 있는 언덕의 토사가 오랜 세월 바다를 메우었기 때문이다. 그 땅을 밟고 눈으로, 손으로 확인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하다.


자! 현금의 예루살렘이 그러하다. Dan Bahat 라는 분이 쓴 Carta’s Historical Atlas of Jerusalem 이라는 책에 32 페이지에 보면 과거의 현재의 예루살렘의 차이를 고고학적으로 그리고 건축 공학적으로 잘 묘사 분석해 놓았다.

우리가 가는 Via Dolorosa 중 Ecce Homo Arch은 본디오 빌라도가 “Behold the man”(Ecce Homo)라고 부른데서 기원한다. Via Dolorosa 와 관계된 이야기는 1번부터 제14번 지점을 설명할 때 다시 언급할 것이다.

지금 내가 이 부분을 조금 언급하는 것은 고고학적 관계된 부분이다. 에체 호모가 있는 이 자리는(첨부 사진 파일 번호 IMG_6441.JPG)는 제2 성전이 있었던 자리가 아님이 밝혀진 것이다. 놀랍게도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100년 뒤에 하드리안 황제가 세운 개선문의 연결로 세운 것이다. 원래 있던 이 자리에는 서문(western entrance)에 있는 시장이라고 추정되기도 한다. 혹자는 안토니아 요새(Antonia Fortress) 에 관저가 있었던 빌라도의 관저와는 어떤 관계도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하드리안의 개선문이 일부가 바로 안토니오 요새와 연결되어 있으니 빌라도의 법정과는 아주 깊은 관련이 있다. (아래의 사진은 예수님 죽으신 뒤 백년 뒤에 하드리안이 세운 벽의 원형의 모습이, 다음 이어지는 사진은 아치가 일부 남고 수도원 벽으로 파고 들어가듯 연결된 모습이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에체 호모의 원래 흔적을 추적해 보면 후대에 주변 벽들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Martin Gilbert 의 보고를 보자. 그는 The Rutledge Historical Atlas of Jerusalem 이라는 책에서 증언하기를 Auguste Salzman 이라는 사람이 찍은 사진에는 선명하게 그 지역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1856년 당시의 사진이 그의 책 32페이지에 나오는 그림이다.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요한 19:17).


기독교의 가장 성스러운 곳.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 그리고 그의 무덤이 있는 골고다 언덕에 위치해 있다. 십자가의 사건은 성 밖에서 행해졌다. 이점이 우리의 이해를 요구한다. 당시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부정한 시신을 묻거나 죽이는 일을 거룩한 성전이 있는 곳에 가까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말하기를 골고다가 “성에서 가까운 고로” (요한 19:20)라고 적고 있다. 324년에 첫 번째로 이 성벽도 건축된 이후에는 골고다 성벽으로 둘러싼 시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게 된다. 이점 때문에 사람들의 뇌리에는 골고다는 예루살렘 중심부에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좀 더 상세히 그 부분을 살펴본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11년 후에 골고다 언덕은 주후 44년에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새롭게 새운 성벽으로 인하여 성안에 위치하게 된다.

20세기 중반에 러시아 호스피스 부근, 교회의 동쪽과 북쪽에서 고대 성벽의 유적을 발견하였다. 교회 안에서 발견된 유대인의 무덤은 이 지역이 당시 성 밖이었다는 중요한 증거이다. 다시 말하지만 당시 유대인의 법으로는 거룩한 예루살렘 성 안에는 아무도 매장될 수 없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장소는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하였기에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한 즉시부터 기억되고 순례했을 것이다.

AD 135년 하드리안 황제가 유대교와 기독교의 흔적을 말살시키기 위하여 이방 신전을 세웠다. 그곳이 바로 갈보리 언덕과 예수님의 무덤이 있던 곳으로 쥬피터와 비너스 신전을 세웠다. 이점은 베들레헴에도 동일하게 일어났는데 예수 탄생 장소에도 이방신전을 세웠다. 이러한 그의 행위가 골고다와 무덤 그리고 탄생 장소가 어딘가를 밝혀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AD 313 년에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하기까지 감히 황제가 세운 이방신전을 누구도 손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AD 콘스탄틴의 어머니 헬레나가 그 이방 신전을 헐고 갈보리 언덕과 무덤 터에 바실리카 즉 교회당을 세우게 된다. 그때 예수님을 못박았던 나무 십자가도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그것이 바로 AD 335년 콘스탄틴(어머니 헬레나의 간청으로)은 세운 교회가 바로 오늘 우리가 방문한 거대한 성묘교회이다. 콘스탄틴은 성묘 교회가 '지구의 중심'이라고 선언했다.


그곳이 우리가 가는 11번부터 14번 지점이다. 하지만 이 교회당은 노도처럼 몰려온 페르시아 인들에 의해 AD 614년 페르시아인들에 의하여 파괴 된다. 그러나 재건의 역사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어 아봇 모데스토스라는 사람에 의하여 전보다는 작게 건축 됐다. 다시, AD 1009년에 칼리프 하켐에 의하여 교회당이 파괴된다. 전 유럽은 분기하고 이 성지를 회복하고 교회당을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불의한 전쟁을 일으킨다. 십자군 전쟁이다.

AD 1048년에 이 장소는 콘스탄틴 모노모쿠스에 의하여 재건된다. 승리와 패배를 거듭하면서 이 자리도 온전치 않았다. 하지만 AD 114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아랍 진영이 점령했다 해도 이 장소만큼은 현재까지 보존되었다. 그 교회가 바로 성묘교회이다. 여러 번의 증축을 거듭했지만 성묘 교회는 십자군 전쟁 당시의 기초 모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1852년 부터는 터키시대에 정해진 6개의 교단에 의하여 성묘교회는 공동으로 관리되고 있다.

우리가 알수 있는 것들은 제1번에서 시작하여 2번 그리고 계속해서 마지막까지 어느 정도는 골고다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니면 반영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미 자세히 말한 역사적 부침 가운데도 이러한 보존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고려 왕조 실록조차도 잃어버리고, 한양에 있던 조선왕조 실록이 임진왜란 화재때 불타서 사라지고 전주 서고에 있던 것을 간신히 지켰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면 그것은 겨우 500년 조선 왕조사에 불과 400여년 전 일이라는 점이다. 유일한 조선왕조실록 중 정족산본 실록은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유일하게 보존된 곳이 다름아닌 전주 사고본인데(한양서고도 화재로 유실, 임진왜란 전쟁 통에) 그것도 제 1부의 원본 실록으로 태조실록~명종실록까지가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이 사료는 조선전기에 편찬된 실록의 원형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왕조 실록은 네곳에 분산 보관 되는데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이곳은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 강화도 사고 등 모두 4곳이다. 이곳에 조선왕조실록을 일제가 지배하기 전까지 분산 보관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의 실록의 존재가 확인되어 가만둘 리 없었다. 조선에 온 데라우치 총독은 오대산에 있는 실록을 1913년 일반으로 밀반출해버렸다.

사라져 버린 줄로만 알았던 그 사료가 놀랍게도 도쿄대학에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한국 정부가 그 사료를 되찾기 위해 교섭한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조선왕조 실록은 현재 국보 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불과 400년 전 사료를 애기하다가 곁길로 갔다. 다시 말하자면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 주님 지신 십자가의 길들을 ‘이 정도로 보존된 것이 다행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자칫 잘못했으면(?) 십자가의 흔적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길을 기억하고 보호하기까지 초대 교회, 예루살렘의 파괴, 비잔틴 시대, 이슬람 치하에 놓이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장구한 세월을 통해 이 길을 보전한 분들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이 절로 나오는 시간이다. 어떤 분들은 천주교회와 아르메니안 정교회등 우리 개신교회와 상관없는 분들이 오히려 그 의미를 퇴색시켰다고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일부는 일리가 있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동지역에 기독교의 흔적조차 지워버리는 곳이 있음을 보면서, 이나마 이슬람 치하에서 특히 오토만 터키 제국의 혹독한 압제아래서 보존한 그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지금 눈에 보이는 건물의 흔적은 2000년 전 모습과 다르다 해도 자그마한 흔적이라도 더듬어 가며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는 것은 모든 분들에게 깊은 의미가 있으며 슬픔의 길을 따르며 나도 다시한번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기를 다짐한다.


1. 제 1 지점

이곳은 일명 빌라도 법정이라고도 한다. 예수님께서 본디오 빌라도의 재판정(Praetorim, 마 27:11-14)에서 판결을 받으신 곳이며, 또한 사형 언도를 받으셨다.(요 19:4-16) 빌라도의 법정은 헤롯이 그의 친구 마가 안토니를 위한 지은 안토니아 성채 내에 있는 건물이다.

우리가 다녀 온 지중해 해변의 가이사랴에 당시의 로마 총독부가 있었다. 때때로 예루살렘에 폭동이 일어나거나 소요가 일 때 총독은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사람이 많이 모이는 유월절과 같은 절기에는 로마 총독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혹여 발생할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이다.

지금 이곳에는 선고 교회(Church of Condemnation)가 세워져 있다. 교회 이름이 예수님을 ‘정죄’(condemnation) 하였다고 해서 ‘선고’ 또는 ‘정죄’ 교회라고 한다. 이는 수녀원(Convent of the Sisters of Sion) 소속 건물로 1868년에 봉헌되었다고 한다.

알-오마리엘 대학(Al-Omariyel College)에는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유물이 하나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 형에 처하도록 내어 준 후 “자기는 죄가 없다”고 손을 씻었던 그릇이라고 한다. 이 그릇은 돌 그릇인데 대학 교정 바닥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2. 제 2 지점

이곳은 예수님에게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홍포를 입혀 조롱하고 멸시하던 곳이다.(막 15:15-16, 눅 23:11) 그리고 그가 채찍질을 당하셨기에 채찍 교회(The Flagellation) 가 세워져 있다.

이 교회는 천주교 소속이며 AD 1839년에 지어졌고 1929년에 십자군 시대 건물 모양으로 개조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들어 갈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셨기에 가시관 모자이크가 천정에 새겨져 있다고 한다.


요한 복음 19:1-3 에 보면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 하더라. 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이 글을 타자 치면서도 주님이 당하신 고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온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이 도시를 지나 골고다로 올라 가셨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가시관을 쓰게 하셨다. 갈릴리 산상수훈 언덕을 걸을 때, 텔단을 방문할 때 허다한 가시나무를 보았다. 생각보다 무시무시하게 생겼다. 가시관에 쓰여졌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 세나무 정도 된다.

예루살렘 지역에 흔한 대추나무가 있다. 또 다른 것 중에 유력한 것은 학명으로는 ‘시지프스 스피나 크리스티’라는 꽤 긴 이름을 가진 가시나무이다. 이 식물의 가시는 아주 특이 하다고 한다. 식물에 맺힌 가시는 그 끝 부분이 약간 휘어져 있어서 그 가지를 둥글게 몇 겹으로 감겨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번 씌운 뒤 돌려 누르면 잘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빌라도는 “보라 이 사람이로다(요 19:5)”라는 말을 했는데 라틴어로는 Ecce Homo 라고 한다. AD 135년에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가 이를 듣고 세운 에체 호모 아취(Ecce Homo Arch)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황제가 빌라도의 일을 인정하려고 지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오히려 그는 기독교를 핍박하고 흔적도 지우려 했던 사람이다. 빌라도가 임시 총독 관저로 쓰던 안토니오 요새의 북쪽부분으로 동쪽에서부터 채찍질 교회, 선고 교회, 에코호모 교회와 왕의 놀이 장소(The King’s Play)가 나란히 있다.

“왕의 놀이”는 로마 군인들이 쉬는 장소이다. 그곳이 바로 로마군병들이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마27:27-31) 라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예수님을 조롱하던 곳이다. 채찍질 교회 와 선고교회는 같은 장소에 있다. 하지만 에체 호모 교회는 다음 건물에 위치해 있다. 우리가 몇 발자국 움직이는 거리에 있었다.


3. 제 3 지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 쓰러지신 지점인데 그가 출발한 곳에서 150m 정도 되는 거리이다. 우리가 내려 가는 지점에 서쪽으로 내려가다가 남쪽으로 꺾이는 모서리 지점에 있었다.

1856년 이곳에 아르메니안 기념 교회가 세워졌다. 예수님의 쓰린 아픔을 아르메니안 교회의 양식을 반영해서 지었다고 한다. 전기한 바와 같이 우리는 Via Dolorosa 만을 간 것이기에 각 지점마다 있는 교회를 방문하지는 않았다. 이 정교회의 문에는 예수님과 시몬과의 만남을 기념하여 문에 새겼다고 한다. 시몬은 제5지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끝까지 지고 간다. 무의식 중에라도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자에게 축복 있을진저….


4. 제 4 지점

예수님은 채찍에 맞아 쓰러지시고 넘어지셨다. 그가 일어나 의식을 찾으실 때 만난 분이 슬픔에 잠기신 어머니 마리아이다. 제 3지점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10m 떨어진 곳이다. 길가의 좁은 문 위에 예수님과 마리아가 만나는 장면이 부조로 새기어 있다. 여기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비교적 빠른 시기인 AD 7세기 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 있는 교회는 1881년에 건축된 것이다. 제3,4,5지점은 예루살렘 성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일명 치즈 골짜기에 속한다. 이곳이 가장 낮은 지점이다.


5. 제 5 지점

제4 지점에 남쪽으로 10 m 정도 걸으니 나온 지점이다. 여기서부터 골고다 언덕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이곳은 구레네 사람 시몬(Simon of Cyrene)이 예수님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곳이다.(마 27:32) 초대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시몬의 아들들이 여러 나오는 데 마가복음 15:21 절에 ‘알렉산더와 루포’로 나와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13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아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 라고 하였다.

이곳에는 1895년에 세운 프란시스카 회에 속한 교회가 있다. 여기서부터 비아 돌로로사가 가파른 경사지를 올라가게 된다.


6. 제 6 지점

이곳은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얼굴을 물 수건으로 닦아 드렸다고 전해 지는 곳이다. 그 여인의 이름은 베로니카로 전해지며, 천주교회에서는 성인으로 인정해 St. Veronica라고 부른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얼굴을 실크 조각으로 닦아 주었으며, 그 예수의 형상이 묻힌 천 조각은 8세기부터 로마의 성 피터의 교회에 보관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이 자리에 기념교회가 세워졌다. 비잔틴 시대에는 코스마스 수녀원이었던 것이 지금의 수녀원으로 1895년에 지은 것이라고 한다. 베로니카라고 전해지는 여인은 12해를 혈루증을 앓다가 예수님 옷자락을 만짐으로 나음을 얻은 여인이라고 전해진다. (막 5:25-34)


7. 제 7 지점

이곳은 예수님이 두 번째로 쓰러진 곳이다. 6지점에서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남북으로 이어지는 길과 만나는 곳이다. 그곳에 두 개의 예배실이 있다. 이 건물은 1875년 천주교에서 구입하여 학교 (School of the Arts and Crafts) 로 사용하는 곳이다. 이곳은 예수님 당시 성 밖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히 13:12 ~ 13)


8. 제 8 지점

예수님은 이곳에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눅 23:28) 라고 말씀하셨다. 이 자리에 그리스 정교회 교회가 있다. 그래서 헬라어로 NIKA 가 돌판에 새겨저 있다. 검게 그을려서 지나치기 쉬운 표시이다.


9. 제 9 지점

예수님이 세 번째로 쓰러진 곳으로, 곱틱교회가 서있다. 거의 골고다 정상에 오른 곳에 세워진 교회이다. 여기에 교회 지하에 물 저장고가 있다. 갈증을 느끼신 예수님이 물을 마시지도 못하셨는데 이때 조금이라도 마셨더라면….


10. 제 10 지점

여기서부터 14번까지는 십자가형이 집행된 골고다 언덕 위이다. 골고다는 아람어이고, 헬라어로는 "크라니온(Kranion), 라틴어로는 "칼바(Kalva)" 영어로는 "갈보리 (Calvary)" 이며 "해골언덕"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Via Dolorosa 의 10지점부터 13지점까지가 한꺼번에 몰려 있다. 계단을 올라와서 만나는 곳이 바로 제 10지점이다. 여기에서 군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위해 옷을 벗긴 곳이다. 그 옆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마 27:35) 인 11지점이 위치해 있다. 여기서부터 우리 일행은 건물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거대한 교회당인 이곳은 천주교회식으로 된 바실리카이다. 골고다 언덕이라고 믿어지는 그 위에 세워진 교회가 지금의 성묘 교회이다. 계속해서 일련 번호가 14번 까지 성묘 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안에서 이어진다. 성묘 교회는 작은 도시를 방불케 할 정도로 여러 개의 복합 건물이 그 안에 함께 어우러져 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긴 곳이다. (요 19:23 ~ 24)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정면 벽화는 1938년에 세운 것이다. 예수님이 못 박히시는 장면을 어머니 마리아가 보고 있는 모자이크이다.


이 교회당 안에는 휘황찬란한 대리석과 아름다운 돔, 그리고 화려한 건물 양식과 샹들리에 등이 밖에 있는 분위기와는 확연히 다르다. 골고다 언덕인지는 고고학적으로 더 고증을 받아야 하겠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흔적만을 아주 단순하게 알렸으면 이 깊은 십자가의 의미를 새기지 않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곳의 존재 의미는 오랜 이슬람 통치 아래 “이 정도라도 없었다면 십자가의 의미를 전할 수 있었을까”라는 점에선 고맙기도 하다.

성묘 교회 입구에 들어가자 마자 잘 다듬은 분홍색 대리석이 맞는다. 이 돌은 유대 회당에서 기름을 부어 성별식을 거행하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전해지는 애기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그 몸을 이 바위에서 내려서 기름을 발랐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통곡을 했다고 전해진다. 요한복음 19장 39-40 절은 이렇게 전한다.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 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새 마포로 쌌더라.


11. 제 11 지점

예수님을 이곳에서 십자가에 못박았다. (눅 23:33-34)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임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를 뽑을쌔.

지금 이 자리에는 두 교회가 있다, 첫째는 “성 십자가 못 제단’ 이라는 천주교회인데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슬픔을 기억하기 위함이란다. 두 번째 교회는 정교회로 “마리아와 성 요한”의 초상화가 있다.


12. 제 12 지점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운명하신 곳이다. (마 27:45~ 51)

제11지점보다 조금 안쪽(북쪽)은 제12지점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신 자리입니다 (마 27:45-53). 이 곳의 관리는 희랍 정교회에서 하고 있으며 정면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 모습이 금속 조각으로 만들어 져 있고 천정에 등잔이 가득 달려 있습니다.


13. 제 13 지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내린 곳이다. (마 27:59, 눅 23:53) 여기에 눈물 흘리는 마리아의 목상이 놓여 있다. 이 마리아 상은 포루투칼의 마리아 1세가 1778년에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그 이전인 16-17세기에 리스본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무덤의 독석판 즉 자연석이 제단에 있다고 한다.


14. 제 14 지점

아리마대 요셉이 자기의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 지냈다. (마 27:60 ~ 61) 이 무덤은 콘스탄틴 대제 시대에 무덤 주위의 돌을 깎아 내리고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의 무덤과 골고다 언덕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그 부분은 자연석으로 남겨 두었다고 한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몸을 동산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마가복음 15:42-46 절에 나온다. 유대인 시신을 임시로 두고 동산에 영구적으로 묻기에 이런 경우가 있으리라 짐작된다.


예수님의 빈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이 교회는 정교회나 천주교회 소유가 아닌 에디오피아 교회 소유라고 한다. 고대의 무덤 형태로 큰 돌을 깎아지는 모습이 보인다. 마가복음 15:42-46 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날은 에비일 곧 안식일 전날임으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지 오래냐 묻고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는지라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지금까지 우리가 들러 본 것은 어디까지나 Via Dolorosa 가 있는 부분들이다. 언급한 바와 같이 고고학적 발굴이나 성서학적으로 위치나 또는 사실적 묘사가 각자 시각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이곳 예루살렘의 골고다에서 속죄의 제물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다는 점이다.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곧장 떠나야 했기 때문에 주변을 더 돌아 볼 수 없었다. 곧장 통곡의 벽으로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정원의 묘’가 있다고 한다.

정원의 묘라 불리는 이 무덤은 다메섹 문 북방향에 위치한 것으로 조성된 시기는 비잔틴시대라고 한다. 예수님의 몸이 실제 묻힌 곳이라고 암시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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