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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7일 11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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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의 위력 앞에 선 인간의 모습

이웃나라 일본은 진도 9.0의 지진과 해일로 인하여 상상할 수 없고 형용하기 힘든 피해를 입어 폐허와 절망을 경험하는 고통에 처하여있다. 필자는 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그 지역에 있는 일본인 지인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전화자체가 불통이었다. 여러 곳을 우회하여 알아보려고 했지만 일본 국내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결국 안부전화는 포기하고 시시각각 전해지는 뉴스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해지는 소식은 해일의 피해가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피해지역과 해일이 닥쳐왔을 때의 장면들이 담긴 화면이 하나씩 전해지면서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아비규환의 장면은 노아의 홍수가 그런 것이었을까.

상상이 가능하도록 하는 순간의 상황들은 할 말을 잃게 했다. 인간이 무엇으로 그 재앙에 맞설 수 있을까. 사실은 그러한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순간적이었고,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다급하고 긴급했다.

게다가 원전사고까지 이어지면서 일본은 공황에 빠졌다. 안전을 담보하는 것은 그만두고 내일을 예측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절망하고 있다. 우려했던 원전폭발사고가 전해지면서 침착하기만 하던 일본인들도 동요하는 듯하다. 가능하면 피폭지역을 벗어나야 하겠기에 탈출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피폭지역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서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지면서 일본은 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지진과 해일에 의한 참상을 경험하면서 보여주었던 일본인들의 차분하고 침착하며 질서 있는 대처능력을 보면서 세계가 놀라게 했다. 그러나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능에 오염이 되자 피폭지역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마지막 소망까지도 버린 채 그곳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지만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 것이 이번 사건이 아닐까.

지진과 해일,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원전폭발로 이어진 재앙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첫째, 인간의 모습이 정말 작다는 사실이다. 인간인 만들고 세웠던 모든 것이 한 순간의 쓰나미 앞에 휴지조각만도 못한 것이었다. 대재앙 앞에서 인간이 만든 구조물과 차량들은 인간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 한낮 낙엽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것들이지만 쓰나미 앞에서 그것은 정말 하찮은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 밀려오는 쓰나미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때 인간은 먹히지 않기 위해 버둥거리는 모습 이상을 보여줄 수 없었다. 이 현실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애써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기부정에 지나지 않을까.

둘째, 대재앙 앞에서 일본인들이 보여준 태도다. 전 세계가 다 놀랄 수밖에 없을 만큼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처하는 그들. 인간이 어떤 위기에 처한다 할지라도 이성적인 존재로서 행동해야 하는 것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가족과 친지, 지인들을 잃은 상태고, 재산은 물론 당장 기거할 수 있는 곳을 모두 잃은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박하고 절망이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질서를 지켰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다.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도록 까지 보여주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들 같다고 할 만큼 지나치게 냉정한 그들의 모습은 위기 속에서도 인간이 해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닐까.

셋째, 인간이 산다는 것이 결코 혼자일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비록 모든 것을 잃었을지라도 복구하고 재건하며 주검을 수습하는 모든 과정은 주변의 사람들이 함께 감당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자세를 실제로 보여준 그들의 모습은 재앙 가운데서도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불가능한 상황에서 서로를 격려하면서 수습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이 함께 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구호의 손길을 펼치고 있는 것 또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은 함께 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놀라운 것은 매주 수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있는 정신대(위안부) 할머니들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소위 한류스타들을 비롯, 각 언론사와 여러 사람들이 일본을 돕기 위한 모금을 하고 있고, 그 참여도나 참여 액수가 엄청나다는데 놀랍니다. 비록 서로가 만족할 수 없지만 배려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만 있으면 적대적 관계와 아픔은 만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특별히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너’를 존중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너’에 대해서 또 다른 ‘자아’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게 한다. 인간이 이 땅에 사는 동안 꼭 간직해야 하는 인간의 진정한 모습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을 가장 즐겨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참에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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