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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송화강의 추억 2012-08-23 20:11:22
작성인
정덕상 트위터로 보내기페이스북으로 보내기미투데이로 보내기 조회:1558     추천:125
   

           

                                    송화강 의   추억                                              


                                                                                           
정 요셉(덕상)

 

 

      이날 따라 교실문 노크 소리가 여느 때와는   달리 크고   빨랐습니다.   동시에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조선 어 책은 어느 사이엔가 제가끔 수단대로 말끔히 감추어

 

 지고, 대신 재빨리 일본어 책이 어엿이 놓여 지면서, 전에 하던 대로, 큰 목소리로

 

읽기 시작합니다.

 

"기비 당꼬, 기비당꼬,   닛본 잇찌노  기비당꼬,...................."

 

    아니나 다를 가,  부 르 독 같이 생긴 일본0  순사가 기다란 칼자루를

 

만지며 거만스레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 그것도 목청을 높이며 곁눈질로 그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 옆에는 전날에 보았던 사람이 아닌, 키가 작고 엉덩이가 튀어나온, 못되게 생긴 자가

 

뒤따라 들어 와서는, 교실 안을 한 바퀴 비잉 돌더니만, 한 아이의 책을 훌 딱 집어 보는가

 

 싶더니, 선생님을 쏘아 보면서,
 
    무어라 중얼거리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후유

    그제서야
 
   “야!  살았구나 오늘은

 

만약 조선어 책이 들켜지는 날엔 큰일 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력이 나서, 철부지 코흘리개 우리들이지만, 어쩌면 그렇게 이때만은 재치가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대견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일본 순사가 오는 날 은 기분 나쁜 날이었습니다.  욕하는 날, 죄짓는 날,

서러운
날 이었습니다.
 

당시 어린 내가 다닌 소학교는 길림 성 시방 현에 있었습니다. 기억으로는


퍼그나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강 이름은 잘 기억되지 않지만, 아마 송화강 지류가

 

 아니었나 싶은데, 하여 튼, 강물이 어찌나 맑은지, 고기떼가 노는 것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형들 따라 낚시미끼 심부름꾼으로 강가로 나갈 때 면, 석양에 비친 강물은

 

 비단 자락 같은데, 강 밑 자락에 깔린 조약돌은 흩어놓은 보석같이 빛나고 있었읍니다.

 

지금도, 그 강가의 무성한 버드나무 숲이 눈에 서언 하게 보이는 듯 합니다. 


특히 이곳은 
우리 한국사람이 많이 모여 살던 곳이어서, 당시 길림 성 은, 일본 경찰당국이

주시하던 곳이 었다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1주일에 몇 시간씩 우리말을 배웠습니다.

 

산아 산 아 조선산아, 비단 때때   옷 입어라………………………..기억이 납니다. 

우리
들 모두는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이곳으로 온 사람들이기에 고향을 그리며 살고,
 
또 그 언젠
가는 그리운 그 곳으로 돌아 가리라는, 꿈속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 나라를 빼 앗 기고, 바벨론 에서 포로생활 하면서 울부짖었던

 

  시편을 연상케 하던 삶이라 할까요!

 

 우리가 바벨론 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 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 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으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 손이 그 재주를 잊을 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 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 보다 지나

 

 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 천장에 붙을 지로다…………..

 

 

 제 나라 떠나 살면 다 애국자가 되나 봅니다. 감시원이 다녀간      이 틑 날 에는 으레

 

 우리는 노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에 풍금을 손수 치시면서 노래를 가르쳐 주시던 분

 

 은 연세가 높으신 것 같았습니다.

 

 머리가 반백이 넘는 헌 출한 키에, 퍽으나 인자하시면서, 그 눈과 얼굴에서는 유난히

 

빛이 나시던 분 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어르신이 오셔서 노래를 가르치는 시간을 얼마나 얼
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이제 수 타 한 세월 덧없이 흘러간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는 노래 속에서 그분의 애틋한 조

 

국 사랑, 민족사랑을 되새기면서, 그 분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 분이 누구였으며, 어떤 분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나는 너무 어렸기 때문이죠.

확실히 모르긴 하지만 스쳐 들은 얘기로는, 우리들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시간이 끝나면,

훌 훌 히 어디론가 가셨다가, 또 오시곤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우리 아버님이 몇 십 리를 가셔서 쾌 오셨는지, 소나무 한 그루를 뜰 옆에 심으시고는

 

"이게 우리 고향에서 자라는 소나무야, 너희들이 잘 키워야 될 거야 " 하시던 그

 

 모습이 기억이 되듯이, 그 때의 일이 떠 오르곤 합니다.…….

 

 

 

 그분이 풍금 앞에 앉아 손수 건반을 치시며 노래를 가르치십니다.

 

 

북편에 백두산과 두만강으로

 

남편에 제주도 한라산 동편에 강원도 울 능도 로

 

서편에 황해도 장산곶까지

 

우리우리 대한의 아름다움을

 

명호로 표시하니 십 삼 도로다.

 

 

 

 

그때는 13도로 되었던 것 같습니다. 목청을 높여 노래 하는 게 얼마나 신이 나던지, 내

 

 사 는 날 동안은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느 때는 흰 두루마기를 갈아 입으시고 들어 오셔서 가르치시기도 하셨는데, 특별히 다

 

음의 노래는 그의 유언이며, 조국 사랑의 짙은 얼의 표현이자, 또한 그의 불타는 가슴 그

   메모
ID : 문석진    
2012-08-24    
06:21:54    
드디어 올리셨네요. 축하합니다...
근데.. 밑 부분이 잘렸네요..
중간부분 문단 정리하시고 다시 올려보시면 어떠실지요?
ID : 정덕상    
2012-12-04    
18:03:05    
목사님, ! 너무 감사 합니다. 그렇게 하겠읍니다.
반가운건 제 ID와 번호를 찾아 내어 사용하게 되었읍니다.
그리고 본명 정덕상 대신, 정 요셉( 글쓸때 이름입니다)으로 고쳐 주실수 있겠읍니까?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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